도입: 놓아줌과 심판 사이
뮤지컬 <홍련>은 두 개의 오래된 이야기를 한 무대 위에 불러온다. 처녀귀신 서사의 원조 격인 <장화홍련전>의 홍련, 그리고 죽은 자의 한을 풀어주는 무속의 여신 바리공주. 둘은 저승의 재판정에서 처음 마주 앉는다. 바리는 심판하는 자리에, 홍련은 심판받는 자리에 앉아 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시작부터 어긋난다. 홍련은 죄를 인정하면서도 무죄를 주장하지만, 그녀의 진술은 자꾸 모순된다. 그녀가 정말 다투고 있는 것은 죄의 유무가 아니라, 오랫동안 붙들어온 억울함을 놓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홍련>은 그래서 단순한 원혼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의 억울함 속에 어떻게 스스로 갇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이 갇힘은 말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극은 언어로 따지고 묻는 순간과, 신체로 응어리를 쏟아내는 순간을 나란히 배치한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캐물어도 말로는 풀리지 않는 감정이 있다는 것, 그런 감정은 결국 몸으로 터뜨려야 풀린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이때 판결과 놓아줌, 이 둘 중 하나만으로 충분할까. 아니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거쳐야만 완성되는 걸까. 이 극이 끝까지 붙들고 있는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1. 매몰된 시간: 억울함이라는 감정의 지옥
홍련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동생을 해쳤다는 혐의로 끌려온다. 그녀는 죄를 인정하면서도 무죄를 주장한다.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늘을 대신한 단죄였다는 논리다. 이 모순된 항변이야말로 극의 핵심을 정확히 찌른다.
보통의 복수극은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허무와 함께 막을 내린다. 그런데 홍련은 다르다. 그녀는 복수 이후에도, 심지어 죽어서까지도 그 억울함을 놓지 못한다. 이것은 일종의 감정적 매몰비용이다. "내가 당한 게 있는데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논리는, 살아있는 인간이 잘못된 관계나 선택에서 좀처럼 발을 빼지 못하는 심리를 근본적으로 설명하는 단어다.
이미 투입된 고통과 눈물이 아까워서, 그 고통을 정당화하기 위해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홍련의 지옥은 외부에서 주어진 형벌이 아니라, 스스로 걸어 들어가 문을 잠근 내부의 감옥에 가깝다. 재판정에서 그녀의 진술이 계속 모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가 지키려는 것은 사실관계가 아니라, 자신을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억울함이라는 감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홍련이 자신의 억울함을 포기하는 순간 스스로의 존재 이유마저 사라진다고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매몰비용에 갇힌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녀에게 원한은 더 이상 견디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억울함을 내려놓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녀는 진실을 마주하기보다 차라리 모순된 진술 속으로 도망친다. 재판정이라는 공간이 잔인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곳은 죄를 묻는 곳이면서 동시에, 그녀가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온 서사 전체를 해체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홍련에게 재판은 판결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문제다.
또한 극은 홍련의 진술을 계속 어긋나게 둔다. 그래서 관객은 그녀를 쉽게 판단하지 못한다. 처음엔 그녀가 불쌍하다. 다음엔 그녀가 저지른 폭력에 놀란다. 그녀는 이미 복수를 했는데도 멈추지 못하고, 저승에서까지 끊임없이 누군가를 단죄하고 있다는 것. 복수를 아무리 반복해도 상처는 낫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홍련은 왜 그토록 애절하게, 그토록 오래도록 자신이 당한 가해를 부르짖는가. 나는 그 절규의 크기가 곧 그녀가 잃어버린 것의 크기와 정확히 비례한다고 본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처절하게 매달리는 이유는, 단지 당한 일이 억울해서가 아니라 사랑받는 딸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따뜻하고 온전한 원가족이라는 상을 그만큼 강렬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홍련의 분노는 상처의 크기가 아니라 결핍된 소망의 크기를 재는 척도에 가깝다. 그녀가 갖지 못한 것은 단순한 안전이나 평온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가족이라는 아주 근원적인 이상이었고, 그 이상이 강렬했던 만큼 그것이 무너진 자리의 공백도 그만큼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면 홍련의 매몰비용은 단순히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한 번도 충분히 가져보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이 뒤집힌 형태다. 그녀가 억울함을 놓는 순간, 그녀는 가해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이상적인 가정이라는 꿈 자체를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그러니 그녀에게 원한을 붙드는 일은 역설적으로 그 잃어버린 꿈을 아직 붙들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이기도 하다. 복수는 그녀가 받지 못한 사랑을 되돌려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기 위한, 가장 격렬하고 가장 슬픈 우회로였던 셈이다.
2. 재판정의 두 여자: 이성과 광기의 거울
뮤지컬 <홍련>이 영리한 지점은, 심판자 바리를 단순한 정의의 상징으로 놓지 않았다는 데 있다. 바리 역시 부모에게 버림받은 존재, 즉 홍련과 같은 상처의 뿌리를 가진 인물이다. 다만 그 상처를 다루는 방식이 갈린다. 바리는 자신의 상처를 승화시켜 죽은 자를 인도하는 신이 되고 수천 년간 감정의 중립을 지키는 존재가 되었고, 홍련은 그 상처를 무기 삼아 세상을 심판하려는 존재가 되었다.
극은 이 둘을 대립시킴으로써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같은 상처를 입은 두 사람이 왜 이토록 다른 길을 걷게 되는가?
이 구도에서 흥미로운 것은, 바리의 이성적 심판 역시 완전한 답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바리가 아무리 공정하게 판결을 내려도, 홍련의 한이 실제로 풀리지 않는 한 재판은 끝나지 않는다. 법과 절차, 즉 시스템으로서의 바리와, 그 시스템이 담아내지 못한 개인의 원한으로서의 홍련이라는 이 대립은 극 전체에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내며, 동시에 관객에게 되묻는다. 시스템으로서의 법과 절차는 한 인간이 가진 원한을 모두 풀어줄 수 있는가?
이 재판정에는 바리와 홍련 외에도 차사 강림이 함께 자리한다. 강림은 절차를 집행하는 존재이자, 동시에 홍련을 향한 연민을 숨기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재판을 장악하려는 홍련의 당돌함 앞에서 속절없이 휘둘리다가도, 반복되는 심문 속에서 그녀가 겪는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강림의 태도는 이 재판정이 냉정한 법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킨다.
바리가 이성의 축이고 홍련이 감정의 축이라면, 강림은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관객의 시선을 대신하는 존재에 가깝다. 그는 판결을 내릴 권한이 없기에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두 여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관객의 눈높이에서 되비춰준다.
무대 형식 자체도 이 이성과 감정의 대립을 소리로 구현한다. 논리와 질문과 답변의 리듬을 닮은 음악이 재판이라는 절차를 담당한다면, 절차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감정의 응어리를 몸으로 풀어내는 의식적인 순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긴 천을 가로지르며 망자를 인도하는 이미지는, 바리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심문해도 닿지 못하는 지점, 즉 홍련이 몸으로 토해내야만 풀리는 한의 영역을 시각화한다.
결국 이 극에서 진짜 심판은 대사가 아니라 그 천 위에서, 말이 아니라 몸짓과 소리로 완성된다. 바리의 언어가 이성의 언어라면, 그 몸짓은 홍련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감정을 말이 아닌 방식으로 흘려보내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홍련>의 재판정은 죄를 다투는 곳이 아니라, 애초에 언어로는 완전히 번역될 수 없는 감정을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부딪히는 자리다. 바리 혼자였다면 판결은 나왔을지언정 홍련의 한은 풀리지 않았을 것이고, 몸으로 풀어내는 순간만 있었다면 애초에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 극이 이질적인 두 가지 표현 어법을 굳이 한 무대에 섞어놓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 심판이 아니라 놓아줌
결국 이 극이 진정으로 묻는 것은 죄의 유무가 아니다. 바리가 아무리 공정한 판결을 내려도 홍련의 한이 실제로 풀리지 않는다면, 그 지옥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극의 결말부에서 분명해진다. <홍련>이 결국 보여주는 것은 심판과 놓아줌은 서로를 대체하는 관계가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위한 통로가 되어주는 관계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 극은 처녀귀신 설화라는 낡은 틀을 완전히 새로운 질문으로 바꿔놓는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부당함을 겪지만, 사회적 체면이나 "이미 지나간 일이니 참자"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간다. 반면 홍련은 그 모든 계산에도 불구하고 "내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이 지옥을 끝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인간이다.
관객이 이 위험하고도 파괴적인 인물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유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도 참고 삼켜온 무수한 말들, 미처 터뜨리지 못한 분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홍련>은 그래서 무섭다. 재판정에 선 것은 홍련이지만, 정작 심판받는 것은 억울함을 삼키며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바리의 심판 없이는 그녀의 억울함이 정당하게 들릴 자리가 없었을 것이고, 그녀의 놓아줌 없이는 아무리 공정한 심판도 결국 허공에 흩어졌을 것이다. 이 극은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두 방식이 만나는 자리에 우리 자신을 그 흰 천 위에 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