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양가가 증조 혹은 친할머니 때부터 그리스도교를 믿어온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신실한 신앙심이 나에게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나는 굉장히 의구심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신앙 자체가 합리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점을 고려한다 해도 말이다!)
그러나 한 종교에 대한 이러한 의구심과는 별개로, 그 종교가 가진 역사적 사료에 대해서는 유구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 들었던 수업 중 가장 흥미로웠던 수업을 손꼽으라면 서양 고대사 수업을 꼽을 정도로 고대의 고고학적 분야에 대한 개인적인 흥미도가 높았다. 사실 종교에 대한 의구심을 뒤집으면 그것에 대한 긍정적 의미의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한 종교에 대한 관심을 나는 그렇게 소극적으로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그 기묘한 관심이 오랜만에 증폭될 수 있었던 책이 있었는데, 바로 하세가와 슈이치의 ‘유대인은 언제 유대인이 되었는가’였다. 사실 내가 대학원에서 전공한 철학자도 독일인이지만 그 뿌리는 유대인이었기에, 그리고 기독교의 뿌리도 거슬러 올라간다면 유대교에 있기에, 도대체 유대인들의 종교는 어떠한 것인지 궁금했다. 그들의 문화 중에서도 가장 관심이 있었던 카테고리는 바로 ‘배타성’이었다. 즉, ‘선택받은 민족’, ‘유일신’ 등의 주제는 세계의 많은 종교가 보편성을 획득함으로써 세계의 보편 종교로 자리잡은 반면에, 그들의 카테고리는 보편화되기 어려운 것이었음에도 왜 그들은 그 속성을 유지하는지를 절실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자 하세가와 슈이치는 이때 유대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 것의 원형이 되는 사건으로 두 차례에 걸쳐서 일어난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사건을 꼽는다. 바빌론 유수 사건에 대해 저자의 설명을 가져와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이 서술될 수 있다. 기원전 1000년경, 고대 서아시아에 유다 지파 출신 다윗이 왕국을 세우고 예루살렘에 수도를 두었다. 왕국이 공식으로 섬기는 신은 야훼였다. 그러나 기원전 10세기 후반, 왕국은 ‘남유다 왕국’과 ‘북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된다. 그러다 남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에 멸망하고, 이때 일부 거주민이 바빌로니아로 기원전 9세기와 기원전 5세기, 즉 두 세기에 걸쳐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시대에 다시 돌아와 ‘예후드’라는 지역에 살면서도 고유의 관습을 지켜나가면서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시켜나갔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바빌론 유수 시대는 히브리어 성서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고 저자는 본 것일까? 우리는 흔히 '디아스포라'(diaspora:특정 민족이 본토를 떠나 다른 지역에 흩어져 거주하는 현상)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겪은 민족은 비단 유대인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현재 시리아 북부에 위치한 네이라브 출신의 포로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 또한 바빌론 유수 때 강제로 이주당한 뒤, ‘네이라브의 도시’라는 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페르시아 시대에 해방되어 고향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 후 다른 집단들의 문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반면,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자신들의 사상을 문서로 남겨왔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바빌로니아 문화를 피부로 경험하며 맞닿은 채 살아왔으나,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야훼의 성전과 율법이었다고 한다. 바빌로니아에 강제 이주를 당한 유다 포로들은 강제 이주를 당했음에도 이주 직후부터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 귀환이 그리 빨리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귀환 후 예루살렘을 재건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그들은 신을 모시는 성전이 자신들에게 있어 엄청나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임에도 바빌로니아에서 야훼 성전을 새로 짓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 야훼를 모시는 성전이 없이도 야훼를 숭배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율법’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해지는 일은 신이 명령한 율법을 제정하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왕궁 서기들이 야훼를 숭배하는 자로서 지켜야 할 사항을 ‘율법’으로 제정하였고, 그것에 신의 권위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율법에 담긴 내용은 기존에 이미 관습으로 자리 잡혔던 기존의 율법만이 답습된 것만은 아니다.
고대인들은 전쟁을 인간 대 인간이 벌인 싸움이 아닌, 신 간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조국의 멸망을 겪은 유다 사람들은 야훼가 자신들을 왜 곤경에 빠트렸는지 되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답으로는, 야훼에 대한 믿음을 자신들이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다시는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율법들을 상세하게 정리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여러 사건들이 히브리어 성서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면, 이제부터 설명할 헬레니즘 시대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은 히브리어 성서의 완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남레반트(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 지역에 그리스 문화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 문화는 유대인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계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 각기의 도시들에 그리스식의 도시들이 건설되었고, 지배층은 그 문화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나아가 기원전 175년에 즉위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코오스 4세는 지배 지역을 그리스화하는 데 더욱 몰두했다. 심지어 그리스 신의 신상을 야훼 성전에 설치하고, 율법을 실천하는 것을 금기했으며, 이에 거역하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격렬하게 반발하며 저항했고, 이로 인해 대 제사장 가문 히스몬가의 일원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맞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이는 ‘마카베아 전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여러 차례 지난한 분쟁을 겪은 후, 유대인은 약 450여년 만에 이방인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머지않아 왕조로 자리잡은 히스몬 왕조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또다시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한 혼란의 시기는, 로마가 서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유대교로 개종한 이두매 출신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초대되면서 더 가중된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건설 활동을 추진했는데, 그 성전들은 대부분 유대교 전통과는 거리가 먼 그리스·로마식 건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건설 사업의 경제적 부담은 자연스럽게 민중들에게 돌아가 민중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된다.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종말론’이 이내 대두되기에 이른다. 히브리어 성서에 깊이 뿌리내린 이 사상은 메시아가 종말의 때에 나타나 이방 나라의 지배에서 유다 민족을 구원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달리 유대교는 예수를 그에 해당하는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후대의 사도 바울은 유대교가 강조한 율법 없이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정착시킴으로써,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교와 기독교는 완전히 결별하여 서로 독립된 종교가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유대교에 대한 박해와 탄압은 끊이지 않았다. 기원후 66년 유대인들은 로마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에 불을 질렀다. 중세에는 봉건제도가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그 봉건제도에서 제외되었기에 대부분이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누군가는 금융업에서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도, 그들에 대한 탄압은 여전했다. 가톨릭을 비판한 루터는 유대교인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이라 여겼으나, 받아지지 않자 그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문서를 발행하기도 했다.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 시기에 있어서는, 1894년의 ‘드레퓌스 사건’(프랑스 육군 대위였던 유대인 드레퓌스가 증거도 없이 스파이 누명으로 체포되어 유죄를 받은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동의 움직임으로 시오니즘 운동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오니즘 운동은 20세기에 들어 1948년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건설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저자에 따르면, 수천 년간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음에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은 이유는, 바빌론 유수 이후 이를 지키기 위한 체제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이러니한 지점은 그들이 탄압의 주요 대상으로 여겨지는 데 일조한 것도 바로 그 ‘체제’라는 점이다. 그들의 고유하고 특유한 문화를 만들어낸 데 근본적인 축인 그 ‘배타성’은 동시에 다른 민족들이 수천 년동안 그들을 탄압하기 위한 명분이 되기도 했다는 점이 참으로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그 배타성은 그 종교가 보편 종교로 자리잡지 못하도록 장애가 되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단점으로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 민족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만들고 그것을 율법으로 체계화했다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인류의 지난한 수난사와 해방의 역사를 이방인의 관점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