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Review] 우리가 가진 건 서로뿐이라는 걸 - 연극 '플리백' [공연]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이란

by 임솔지 에디터
2026.08.06 20:45

11.jpg

 

 

연극 <플리백>은 주인공 '플리백'이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1인극이다. 왜 극 속의 다른 인물이 아니라 관객에게 말을 거는 것일까? 나는 플리백의 세상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오롯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털어놓는 이야기 속에는 외로움과 결핍의 감정이 느껴진다.

 

플리백은 정말 솔직한 사람이다. 그것도 지나치게 솔직하다. 성적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낯선 사람과의 성관계를 반복하려고 하며, 자신의 가장 사적인 욕망과 실수까지도 숨김없이 드러낸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플리백은 단순히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이어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극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성관계'는 사랑과 가장 가까운 행위이면서도, 플리백에게는 오히려 가장 공허한 행위가 된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것을 선택하지만, 결국 그 관계는 어긋나 버리고 오래 이어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다시 다른 관계로 메우려 한다. 그러나 그 반복은 결핍을 채워주지 못한다. 오히려 외로움만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22.jpg

 

 

극 중에는 플리백만큼이나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바로 기니피그 '힐러리'다. 힐러리는 플리백이 함께 카페를 운영하던 가장 친한 친구 '부'에게 준 생일 선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플리백에게 힐러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레 그것이 플리백에 대한 이야기로 들린다.

 

 

"그거 알아? 기니피그가 원래는 다른 기니피그랑 꼭 같이 살아야 한대. 외로워서 죽을 수 있다고.

그런데 우리 힐러리는 짝이 필요 없었어. 사람들의 관심을 정말 넘치게 받고 있었거든.

손님들이 워낙 힐러리를 좋아해서 꼭 누군가의 무릎 위에 있었고, 부가 있었으니까.

부는 힐러리를 절대로 혼자 두지 않았거든. 둘은 서로를 존나 좋아했어."

 

 

힐러리가 카페를 찾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는 설정이, 플리백이 타인과의 얕고 즉각적인 성적 관계를 통해 얻으려 했던 일시적인 온기와 애착을 떠올리게 한다. 즉, 늘 누군가의 무릎 위에 올려진 기니피그처럼 사람들의 품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간적인 자극에 불과했다. 반면 "부가 있어서 짝이 필요 없었다"는 문장은 그 얕은 관계들의 허무함 속에서도 플리백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를 보여준다. 기니피그는 외로워서 죽을 수도 있는 취약한 존재이지만, 플리백에게는 부가 의지할 수 있는 '짝'이 되어 주었기에 수많은 스쳐 지나가는 관계 속에서도 생존이 가능했다. 그러나 부는 먼저 하늘로 떠나 버렸고, 플리백은 여전히 예전처럼 누군가의 무릎을 오가며 관심을 갈구하지만, 자신을 절대 혼자 두지 않던 유일한 '짝'이 사라졌기에 '외로워서 죽어가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 후 플리백은 지하철에서 눈이 맞아 관계를 이어가게 된 남자를 자신의 카페에 초대한다. 그런데 남자는 힐러리를 쥐로 착각하고 공포에 질려 여러 번 걷어찬다. 이때 플리백은 남자에게 화를 내거나 힐러리를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남자에게 이만 가 봐도 좋다고 말하고, 바닥에 엎어진 힐러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우리에 넣는다. 고통에 이를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는 힐러리를 무릎에 앉혀 달래 보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우리에 넣어 버린다.

 

이 장면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마주하는 법을 몰라 외면하고 가둬 버리는 플리백 자신의 내면 상태를 그대로 상징한다. 즉 이 장면은 겉으로는 당당하고 냉소적인 척하지만 소중한 존재가 떠나 버린 후 상처와 고통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진 플리백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결정적 순간이다.

 

이후 플리백은 힐러리를 맨몸으로 끌어안으며 비이성적인 성적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그러한 충동에 극심한 공포와 자기 혐오를 느끼며 그것을 억제하려고 절규한다. 그 어떤 장면보다 이 장면이 플리백과 힐러리가 동일시되는 장면이라고 느껴졌다. 플리백은 그동안 외롭거나 트라우마가 몰려올 때마다 성적인 자극으로 자기 감정을 덮어 버리는 방식을 써왔다. 그런데 힐러리를 안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그 익숙한 습관과 충동에 대해 더 이상 자신을 이런 성적인 방식으로만 다루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과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3472599574431670604.jpg

 

 

어느 날 카페의 나이 든 단골손님인 '조'가 안색이 어둡자 플리백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본다. 그러자 조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말한다. 이에 플리백은 "그쵸, 사람들 진짜 거지 같죠."라고 말한다. 그런데 조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 아니야. 사람은 놀라운 존재란다. 다만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가 가진 건 서로뿐이라는 걸."

 

 

아무리 힘들지언정 결국 상처를 치유하고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의 진실한 연결뿐이다. 이러한 조의 말은 그동안 외로움을 달래려 얕은 관계로 도피하던 플리백의 모습과 대비된다.

 

플리백이 부에게 힐러리를 선물로 주던 날, 부는 감동하며 "이게 뭐야?"라고 묻는다. 이에 플리백은 답한다. "글쎄? 뭔가 사랑할 것?"

 

플리백에게 세상의 수많은 관계는 늘 불안하고 성적인, 복잡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에게 건넨 힐러리는 상처받을 걱정 없이 애정을 쏟을 존재였다. 따라서 플리백의 그 대사 속에는 자신 역시 이렇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진심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부는 힐러리를 받으며 그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힐러리가 플리백의 상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면, 부를 통해 플리백은 힐러리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고 느낀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조의 말처럼, 사람은 놀라운 존재다. 날 상처 주고 아프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나를 치료하고 구원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육체가 아닌 마음으로 하는 진정한 사랑일 것이다. 그러니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아파하며, 또다시 치유받아야겠다.

 

 

 

컬처리스트 명함 임솔지.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