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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내가 사랑하는 세계의 창조주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우연히 경기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소설 <긴긴밤>을 쓰신 루리 작가님의 특강 소식을 알게 된 것이었다. 시간을 확인해 봤다. 알바 때문에 중간에 나와야 할 것 같다. 그러면 그 전까지만 있으면 되지, 바로 신청했다.

    

<긴긴밤>은 지구상 단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이 ‘펭귄’과 함께 바다를 향해 걷는 길고 긴 밤들을 그린 작품이다. 나는 뮤지컬로만 이 이야기를 만나봤기에, 강연을 듣기 전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서점을 찾았다. 역시 덕질은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런데 이후에도 <긴긴밤>은 나에게 다양한 매체로 다가오며 이곳저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이 글은 그 걸음에 대한 기록이다.

 

 

 

소설로 걷는 밤


 

카페에 앉아 첫 페이지를 펼친 후, 4분의 3 정도를 단숨에 읽었다. 주변이 시끄러웠음에도 술술 읽혔는데, 동시에 텍스트 속의 울림 또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의 까만 글자 뒤에는 ‘연대’라는 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특히 코끼리 고아원에서의 일화 부분이 그러했다. 노든은 그곳에서 혼자 코뿔소였지만, 코끼리들은 그를 따스히 품어주었다. 그래서 노든은 그들과 같아질 수 있었다. 코끼리가 될 수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 12p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문장이다.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개인 간의 차이가 약점이 되고, 차별이 된다. 그러나 코끼리 고아원의 코끼리들에게는 그 차이가 ‘함께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코가 자라지 않는 것은, 남들과 다른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코가 긴 코끼리들이 코뿔소 옆에 있어주면 된다. 그 순리의 온기가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는 동시에,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얼굴의 열감이 되기도 했다. 나는 기다란 코를 그저 우월성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어느 날, 코끼리 고아원을 떠나는 노든에게 코끼리들이 말한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 16p

 

 

코뿔소 노든은 훌륭한 코끼리였고, 나중에는 훌륭한 펭귄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노든이 함께하는 누군가와 ‘종족’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기꺼이 ‘우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코끼리로 사는 법을 알려준 코끼리들 덕분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어제의 연대는 오늘의 연대를 만든다. 소설은 그 불빛을 내 맘에도 옮겨 심어주었다.

 

 

 

강연으로 걷는 밤

 

한 코뿔소의 이야기가 어떻게 <긴긴밤>이 되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알아보기 위해 경기도서관으로 향했다.

 

 

긴긴밤 특강.jpg

 

 

루리 작가님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을 피피티로 보여주셨다. 작가님은 소설 <노인과 바다>의 결말이 처음에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노인이 힘들게 잡은 청새치가 상어에 잡아먹혀서 결국 뼈만 남게 되는 허무한 결말은, 정말로 우리의 인생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뼈만 남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노인에게 남은 뼈는 초라하지만, 그가 겪었던 고통과 사투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님은 이어서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사진을 보여주셨다. 이 영화는 한 남자가 무인도에 2년 동안 갇혀 있었던 이야기다. 그곳에서 주인공을 버틸 수 있게 했던 것은 약혼녀의 사진이었다. 그러나 극적으로 무인도에서 나온 후,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걸 본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남기 위해 난 끝까지 버텼어.

그러던 어느 날 파도가 돛을 보내줬고 바람이 뗏목을 밀어줬어.

그 결과로 내가 여기에 와 있어.

그녀를 다시 잃어서 너무 슬퍼.

하지만 나와 섬에서 같이 있어줬으니 괜찮아.

이제 뭘 해야 할지 알겠어. 난 계속 살아낼 거야.

내일이면 태양이 다시 떠오를 테니까.

파도에 또 뭐가 실려올지 모르니까."

 

- 영화 <캐스트 어웨이> 中

 

 

이렇게 살다 보면 가진 걸 모두 다 잃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그 험난한 여정과 상처들이 이야기를 이어나가게 하고, 내일을 살아가게 한다. 이렇게 ‘뼈만 남은 것’들이 영감을 주었고, 작가님은 그로부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긴긴밤 사진.jpg

 

 

어느 날 작가님은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 종이 사실상 멸종의 길로 들어섰다는 뉴스를 보게 된다. 그걸 보며 수단은 소중한 것을 하나하나 뺏겨 가면서 혼자 남게 된 그 시간들이 너무 끔찍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복수심에 가득 찬 코뿔소의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랬던 이야기가, ‘함께’라는 가치가 따뜻하게 빛나는 지금의 이야기가 되었다. 작가님은 솔직히 지금의 <긴긴밤>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말하셨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자신의 인생도 비슷했던 것 같다고. 가끔 동창들과 만나면 별별 이야기를 다 하지만, 결국에는 깔깔 웃고 끝나는데 이 책이 그렇게 된 것 같다고. 힘든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살아서 얻는 게 뭐지?’ 고민하다 그저 웃어버리게 되는 것처럼, 노든도 친구들이 등장하면서 결국에는 복수심보다 훨씬 좋은 이야기, 서로의 긴긴밤을 지켜주는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작가님은 이사한 신혼집 벽에 그려져 있던 키눈금 사진을 보여주셨다. 전에 살던 가족들이 아이들의 자라나는 키를 기록하기 위해 그렸던 키눈금이었다. 작가님은 이것을 덮어버리기보다, 계속 그려 나가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과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의 키눈금을 그곳에 덧댔다. 그리고 그 집에서 이사한 후에도, 나중에 살게 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키 또한 기록하는 모습을 기분 좋게 상상했다고 한다.

 

작가님은 그 키눈금들처럼, 이야기라는 것은 쌓이고 쌓여서 이어지는 무언가라고 했다. 이야기는 혼자 쓰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의 키눈금을 보고 나의 키눈금을 새긴 것처럼, 어떤 이야기를 보고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사는 이야기는 슬프고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좋은 일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은 이야기의 힘, 동화의 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연을 들으니 펭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펭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잃어버린 인연들에 대한 슬픈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그 이야기를 펭귄에게 기꺼이 들려준다. 그리고 펭귄은 독자에게, 관객에게 그 이야기를 또 들려준다. 그렇게 그 아픈 이야기는 쌓이고 덧대지며 우리에게 세상을 살 만한 장소로 바라볼 수 있는 관대한 시선을 준다. 이렇듯 나에게 닥친 슬픈 일이 결국 동화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이야기가 가진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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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은 강연이 끝난 후 ‘작가 맘대로 만든 <긴긴밤> 속 나의 부캐 찾기 테스트!’를 진행해 주셨다. 테스트 결과 나의 부캐는 노든이었다.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더더욱 노든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카페로 걷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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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뮤지컬 <긴긴밤>을 보기로 한 날, 극장 앞에 위치한 ‘NOL 라운지’에서 음료를 마셨다. 메뉴는 “저기 초록빛 보여요?”, 바로 <긴긴밤> 테마의 스페셜 드링크였다. 오렌지 자몽 그린티였는데 작품 포스터와 색감이 비슷해서 맘에 들긴 했지만 조금 아쉬웠다. 극 중에 망고가 등장하니까 음료에 오렌지 자몽이 아니라 망고 주스를 썼으면 완벽했을 텐데!

 

 

 

공연으로 걷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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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배우님의 팬인 친구가 <긴긴밤>을 보겠다고 했을 때, 고민도 안 하고 “나도 그럼 볼래!”라고 말했다. 나는 이제껏 설가은 배우님의 펭귄만 봐왔기에, 다른 펭귄은 어떤 느낌일지 무척 기대가 되었다. 그렇게 보게 된 최은영 배우는 발랄하고 귀엽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영락없는 아기 펭귄이었다. 게다가 엄청난 연기와 노래로 성인 배우들과 이질감 없이 섞이는 모습은, 나보다 훨씬 어린 그녀를 ‘배우님’이라고 부르게 했다.

 

이번이 벌써 <긴긴밤>을 세 번째 관람하는 것이기에 안 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맨날 우는 포인트에서 또 울어 버렸다. (참고로 나는 관극할 때 잘 우는 스타일이 절대로 아니다. 절대.)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펭귄과, 또다시 소중한 이와의 작별을 맞닥뜨린 노든의 이별은 언제 봐도 눈물이 난다.

 

그리고 펭귄은 마침내 바다에 도착한다. 펭귄 또한 (뼈만 남은 청새치를 가지게 된 노인처럼) 알일 때부터 자신을 지켜주던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을 모두 잃은 채 혼자 바다에 도착한다. 그렇게 도착한 바다는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차갑고 매서운 파도가 몰아친다. 그러나 펭귄은 괜찮을 것이다. 노든이 들려주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가 가르쳐 준 수영하는 법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뮤지컬 <긴긴밤>에 대한 오피니언을 기고했었다. 그런데 내가 <긴긴밤>을 소개하는 오피니언을 한 번 더 쓰게 된 이유는, <긴긴밤>의 대사를 인용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 15p

 

 

내가 <긴긴밤>을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또 다른 누군가도 <긴긴밤>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긴긴밤>이라는 소설로부터 비롯된 강연, 카페, 공연이라는 키눈금들을 발견하고 그 위에 조심스레 덧댄 나의 키눈금이다. 누군가가 나의 이 눈금을 보고, 다시 자신만의 새로운 키눈금을 새겨 넣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명함 임솔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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