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을 재현하는 서사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더군다나 그 인물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내용을 넘어 실제 그 인물을 재현하는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연극 <안응칠 워크숍>은 단순히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안중근은 어떠했는지를 알아가기 위한 시도를 다룬다. 안중근에 관한 연극을 만들어가는 연출가와 배우들, 그리고 무대감독은 기존의 신화화된 안중근을 다루는 대본에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서사의 가능성을 찾아내고자 한다. 이들은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때 쓴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바탕으로 여러 놀이와 시도를 반복하며 인간으로서의 안중근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인과관계에 의해 매끈하게 다듬어진 신화나 이야기 속 인물과 달리, 현실의 인간은 모든 것이 인과관계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왜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스스로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완벽하게 전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삶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직접 경험하지 못한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일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특히 이미 세상을 떠난 역사적 인물이라면 그 사람의 행동과 말 뒤에 있었던 생각과 감정에 직접 접근할 방법은 없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남겨진 기록을 바탕으로 그를 추측하고 해석하는 일뿐이다.
연극의 제목에 등장하는 ‘안응칠’은 안중근의 아명으로, 가슴에서 배까지 일곱 개의 점이 북두칠성과 같은 모양으로 나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체포된 이후 조사와 재판을 받을 때 본명 대신 이 이름을 사용했으며 자서전 역시 ‘안응칠’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그가 왜 자신의 본명 대신 아명을 사용했는지 그 이유는 현재의 우리가 알 수 없다. 직접 그에게 물어볼 수 없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추측하는 일뿐이다.
연극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역사적 사료인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역시 불완전한 기록이다. 두 책의 원본은 소실되었고 일본인이 작성한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어, 현재로서는 필사본과 실제 안중근이 작성한 원본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설령 원본과 완전히 같다고 하더라도 기록을 읽는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한문으로 작성된 기록을 현재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문의 의미와 뉘앙스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오늘날 읽는 ‘안중근의 말’은 기록과 필사, 번역과 해석의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도착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안중근 역시 여러 층위의 해석을 통과한 안중근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안응칠 워크숍>은 안중근을 재현하는 공연이라기보다, 안중근을 재현하려다 실패하는 공연에 가깝다. 제목의 ‘워크숍’이라는 말에서 암시되듯 극중에서 벌어지는 안중근에 관한 이야기들은 완성된 하나의 서사라기보다 파편화된 여러 시도와 실험에 가깝다. 연출가는 기존의 신화화된 안중근을 반복하는 작가의 극본에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려 한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시작할 때마다 또 다른 질문과 한계가 발생하고, 극은 하나의 매끈한 서사로 수렴하기보다 계속해서 분절되고 흔들린다. 데본 바깥으로 나가는 불안정한 시도 속에서도 이들은 계속해서 ‘진짜 안중근’을 되살리려 한다.
이러한 재현의 실패는 메타연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배우들은 연습을 시작하기 전 태평하게 일본 여행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장면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실수하거나 자신이 연기하는 안중근을 납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연출은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한 음악을 틀었다 끄기를 반복하고, 무대 구조물 역시 필요에 따라 임의로 회전하거나 배우들의 책상이 된다. 극의 감정을 강화해야 할 음악과 무대장치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가 무대 위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관객은 지금 보고 있는 안중근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 배우와 창작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해석임을 계속해서 인식하게 된다. 동시에 극장 곳곳에 쌓여 있는 안중근 관련 서적들은 이들이 그를 이해하고 재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고민했는지를 보여준다. 재현의 실패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은 동시에 무대 위에 존재한다.
이러한 형식은 관객이 기존의 통념처럼 굳어진 안중근의 이미지에서 잠시 벗어나도록 한다. 관객은 익숙한 영웅의 서사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는지, 그가 주장했던 동양평화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안중근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재현하는 일은 결국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실패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이 연극의 목표이자, 역설적으로 이 공연이 성취하는 하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재현의 실패를 보여주는 일과, 그 실패가 곧 하나의 연극적 성취임을 관객에게 설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안응칠 워크숍>에서 분절적이고 비선형적으로 제시되는 정보들은 관객에게 장면 사이의 빈틈을 스스로 연결하도록 요구한다. 이는 기존의 인과관계에 따라 진행되는 선형적인 서사보다 관객에게 더 많은 판단과 사고를 요구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정보의 양과 분절의 정도가 지나치게 커질 경우, 이러한 사고의 과정이 작품이 의도한 적극적인 사유라기보다 극을 따라가기 위한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관객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많은 사유가 발생하지만은 않는다.
<안응칠 워크숍>은 이러한 문제를 공연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설정으로 보완한다. 작가와 연출가가 현재의 결말을 두고 갈등하는 상황, 아직 완전히 인물을 연기해낼 배우가 없어 무대감독과 연출진이 직접 안중근을 연기하는 상황 등은 파편적으로 제시되는 정보들을 하나의 공연 제작 과정 안에 묶어준다. 관객은 완성된 안중근의 이야기를 보는 대신, 그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를 함께 지켜보게 된다.
실제 인물을 연극에서 완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어쩌면 재현을 시작하기 위한 첫 단계일 것이다. <안응칠 워크숍>은 완성된 안중근을 보여주는 대신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만 그 실패를 관객이 하나의 연극적 경험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파편화와 거리두기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도록 각각의 장면과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더욱 치밀한 고민이 필요하다. 역사적 인물을 다시 무대 위에 불러오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면, 그 불가능성을 어떻게 관객과 함께 경험할지에 대한 고민 역시 앞으로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창작자들이 계속 이어나가야 할 질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