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사적인 예술가(Late Fame)』는 한때 짧은 각광을 받고 잊혀진 시인이자, 수십 년간 우체국 직원으로 평범하게 살아온 에드가 한 청년 예술가에 의해 뒤늦게 '재발견'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영화평론가 출신으로 다큐멘터리 『히치콕 트뤼포』와 극영화 데뷔작 『다이앤』을 통해 연출 역량을 입증한 켄트 존스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다. 『메이 디셈버』의 새미 버치가 각본을 쓰고, 킬러 필름스 제작 및 마틴 스콜세지 총괄 프로듀싱을 맡았다. 또한 뉴욕 실험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윌렘 대포가 주인공 에드를 연기하고, 그레타 리는 글로리아 역을 맡아 연기력과 가창력을 동시에 선보인다. 일찍이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과 뉴욕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주목받은 바 있다.
영화 같은 일상
젊은 시절 시집 한 권을 남긴 에드는 30년이 넘는 세월을 우체국 창구에서 보내왔다. 그의 일상은 반복적이고 안온하다. 누군가는 이를 단조롭다고 할지 모르지만, 삶에 충실한 한 인간임과 동시에 누구도 모르는 청년의 때를 간직한 그의 평화로운 하루는 그 자체로 영화의 아름다운 첫 장을 장식한다.
그러나 이 고요한 일상에 작은 균열이 인다. 청년 예술가 마이어스가 에드의 집을 찾아와 이제는 잊혀진 그의 시집 『너무 지난 길(Way Past Go)』을 예찬하며, 자신이 그의 열렬한 팬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를 자신이 속한 젊은 예술가 모임으로 초대한다. 세월의 뒤편으로 밀려났던 시인의 자아가 다시 호명되는 일은 꽤 달콤했지만, 노년의 에드가 소화하기엔 지나치게 달았다. 자기 책의 제목처럼 이미 '너무 지나버린' 과거에 묘한 거리감과 부담을 느끼며 에드는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이후 길에서 마이어스와 재회하며, 그의 청춘다운 열정과 젊은 날의 향수에 이끌려 그들의 모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에드'와 '색스버거'
영화는 에드가 발 딛는 두 세계를 '호칭'을 통해 구분한다. 에드가 수십 년간 드나들던 술집의 오랜 친구들은 그를 언제나 '에드(First Name)'라 부른다. 그들은 에드가 과거에 시를 썼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지만, 함께 포켓볼을 치며 고단하고 무료한 일상을 함께 견뎌온 진짜 삶의 동반자들이다. 그러나 에드가 오랜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낭독회 소식을 전하며 자신의 책을 선물했을 때, 친구들은 짐짓 당황스러워하며 짓궂은 농담을 던진다. 긴 시간 함께했음에도 그들은 시인으로서의 에드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반면, 청년 예술가 모임의 수장 마이어스는 자신들의 모임에서는 이름이 아닌 반드시 사회적 지위와 가문을 상징하는 '성(Last Name)'을 사용한다고 강조하며, 에드를 매번 구태여 '색스버거'라 칭한다. 예술가 모임의 다른 구성원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상대의 배경, 집안을 상징하는 '성'을 먼저 바라보는 것은 비단 이 청년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역시 현실에서 타인을 관찰할 때 마주하는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타성적인 시선이다. 그러므로 모임의 청년들에게 필요했던 것 역시 노년의 깊은 지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예술적 커뮤니티를 빛내줄 '그럴듯한 배경을 가진 시인 색스버거'라는 존재였다.
한편, 낭독회를 준비하는 에드가 난항에 부딪힌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새로운 시를 써보려 하지만,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어쩌면 친구들조차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에드 안에서 시인이라는 자아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거나, 반짝 지나가는 환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낭독회 전날 에드가 솔직하게 "시를 쓰지 못했다"고 고백하자,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을 예술로 치환해주던 청년들의 태도가 냉담해진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마이어스가 그를 ‘에드’라고 부르는 순간 이 관계의 기만성이 드러난다. 에드는 낭독회에서 새로운 시를 발표하는 대신 이전에 썼던 시를 읊는다. 관객들은 환호로 무사히 낭독회를 마치고 기념의 월계관을 쓰지만, 알 수 없는 허탈감 속에 미련 없이 그것을 이웃에게 넘겨버린다.
후일에 윈이 자신을 포함한 모임의 구성원 모두가 에드의 시집을 단 한 줄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결국 '시인 색스버거'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색스버거’란 그저 잠시 젊은 날의 꿈에 취했던 에드와 그의 시 한 구절 읽지 않은 청년들의 허상일 뿐이었다.
영화 같지 않은 이야기
영화 같았던 첫 장면과 수미상관을 이루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다만, 에드의 이야기를 따라 다시 마주한 평온한 일상은 '영화같지 않게' 사실적이며, 현실적이다. 영화는 대담한 반전 대신 지극히 솔직한 인간의 속내를 그려낸다. 마치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에서 관객은 폭소하면서도 한편으로 영화 속 인물들에게 이입하게 된다.
낭독회에 대한 냉소적인 평을 쓴 사람이 마이어스임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우리는 자신의 성취와 명예를 위해 쉽게 타인을 도구화해 버리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마주하게 된다. 함께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너무도 쉽게 와해되는 집단을 보며 씁쓸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우리에게도 마이어스와 같은 면모가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특히 이 유복한 청년들의 놀이터에서 유일하게 정착할 곳이 없는 글로리아의 존재가 눈에 밟힌다. 타인의 집에 거주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만 하는 그녀에게 '연기'는 무대 위를 점령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식이다. 이 모든 소동이 끝난 뒤 에드조차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 돌아가지만, 글로리아는 여전히 돌아갈 집 혹은 무대를 찾아 헤맬 지도 모른다. 인정의 다른 말은 확실한 내 자리다. 끊임없이 자기의 가치를 증명하고,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불안은 글로리아를 통해 투영된다.
영화의 원제 ‘Late Fame’이 『나의 사적인 예술가』로 번역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짐작건대 이는 마이어스의 시점을 빌린 표현일 것이다. '나의 사적(Private)인'이란 말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현재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한 때는 시인이었던 색스버거’의 이름을 소유하고 싶었던 마이어스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 아닐지 추측해본다.
신기루 같았던 예술가로서의 삶을 청산한 에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는 이제 시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체국에서 일하는 그의 귓가에는 항상 펜이 꽂혀있고, 독자와 관객은 아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 그렇게 그는 온전한 ‘에드 색스버거’로의 삶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