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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는 뮤지컬 ‘레드북’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가운 책, 『레드북』이 2년 만에 돌아왔다. 신사의 나라 영국, 그중에서도 보수적인 시대로 손꼽히는 19세기 런던에서 안나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고정된 ‘여성상’이 존재하고,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사회 속에서 안나는 자기의 감정과 욕망을 가감 없이 표현하며, 한 명의 주체로서 발돋움한다. ‘레드북’은 그런 안나의 목소리를 빌려 관객에게 사랑의 본질과 존재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이 무대에서만큼은 시대가 묵인했던 ‘여러분(다른 말로 나머지)’이 이야기의 주역이다. 이미 많은 수상과 평단의 찬사를 받은 창작 뮤지컬 ‘레드북’은 단순히 여성 서사에 그치지 않고, 『레드북』을 읽은 사람들이 ‘내가 나를 말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여정을 응원하고 격려한다.
본 공연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오는 12월 7일까지 이어진다.
여정의 시작, 난 뭐지?
‘신사, 숙녀, 그리고 여러분. 다른 말로 나머지.’
‘Ladies and Gentlemen’에서 소외된 나머지의 ‘난 뭐지?’가 뮤지컬의 막을 연다. 앙상블의 화음이 어우러진 경쾌한 음악은 곧이어 안나가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성상’과 ‘여성상’이 뚜렷했고, 각각은 신사와 숙녀로 규정되었다. 하나의 개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여러분은 철저히 엑스트라로 취급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 여자의 인생은 단어 몇 개로 아주 쉽게 정의되었다. 사람들에게 안나는 ‘구직 중인 노처녀’ 혹은 사회 규범을 거부하는 ‘비정상’이다.
“거지는 첫날이 제일 힘든 법이지.”
일자리를 구하러 간 면접 자리에서 성희롱을 남발하는 고용주에게 맞선 대가로 안나는 거리의 거지 클로이와 한방에 갇힌다. 나를 찾아 나선 여정도 첫날이 가장 힘들고, 서럽다.
"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해"
그러나 안나는 주눅 들지 않고, 슬픔을 이겨내는 자기만의 방식을 꺼낸다. 옛사랑 올빼미를 부를 시간이다.
그대로 써요, 그렇게 써요, 아무런 꾸밈없이
“안나 이야기를 써보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던 순간, 안나에게 들려온 것은 바이올렛 부인의 목소리였다.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세상에 미련 따위는 없었던 그녀에게 안나는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목도 결말도 뻔한 이야기였지만, 식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바이올렛의 마음에 다시금 사랑이 싹튼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안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안나는 우연한 기회로 글 쓰는 사연 있는 여성들의 모임 로렐라이 언덕의 회원이 된다. 그리고 『레드북』에 자기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낡은 침대를 타고>를 연재하며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녀의 솔직한 문장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만, 동시에 거센 비난을 받게 된다. ‘여성 작가’가 남녀의 관계와 신체를 묘사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안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사회에게 기꺼이 ‘야한 여자’가 될 것을 선언한다.
오늘날이라면 그 말은 농담처럼 ‘야한 여자가 되’와 같은 밈으로 소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런던 한복판에서 그것은 사회적 추방을 감수해야 할 만큼의 도전적인 행동이었다. 안나는 자신에게 찍힌 낙인을 다시 자기의 언어로 승화하며, 사회에 기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야기에는 역시 힘이 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레드북’ 속 문제들은 다소 구시대적으로 보인다. 결혼하지 않으면 재산을 소유할 수 없고, 여성이 글을 쓴다는 이유로 손가락질받는 시대는 한참 뒤떨어진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거리감이야말로 이 작품을 더 보편적으로 만든다. 현재는 지나간 그러나 일정 부분 지속되는 문제를 두고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논의를 이어갈 수 있다. 안나가 부딪힌 벽은 완벽히 과거의 것은 아니다. 다만, ‘레드북’은 위트 있는 대사와 경쾌한 음악으로 그 무게감을 가볍게 밀어내며, 관객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사유가 스며들게 한다.
‘레드북’은 표면적으로 보수적인 런던의 진취적인 여성을 그린 듯 보이지만, 결국 ‘나’를 찾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어쩌면 이 시점에 가장 필요할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로렐라이 언덕의 여성들은 각자가 사연을 지닌 인물이다. 사회가 외면한 상처와 욕망, 좌절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의 독자이자 작가가 되어준다. 누군가에게 쉽게 공감받기 어려운 일이라도, 이야기로 써지는 순간 그것은 향유되기 시작한다.
자기를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다. 글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내 이야기’가 어렵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그러나 때로는 '나조차 모르겠는 나'를 표현하는 그 불완전함에서 진심이 피어난다. 나의 이야기는 곧 가장 창의적이며, 솔직한 연약함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뻔하디뻔한 사람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여전히 쓰이고,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레드북』은 여전히 유효한 스테디셀러다.
오늘도 『레드북』과 로렐라이 언덕은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