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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후기는 공연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시나~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 우리는 가시나~ 가장 시를 쓰기 좋은 나이~.
공연을 다 본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흥얼거린 노랫말이다. 가사에 나와 있듯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나이가 꽤나 있는 가시나들이 시를 쓰는 이야기다. 이 공연을 보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제목이 너무 흥미로웠다. 제목에서부터 웃음을 보장하는 듯한 분위기에 끌, 직장생활으로 지친 마음으로 위로하고 엄마와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난 주말 국립극장에 향했다.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팔봉마을이라는 예능 일박이일에 나올 법한 시골로, 어르신들이 가득한 마을이다. 팔봉마을에는 젊은 이가을 선생님이 이끄는 문예학교가 있었는데, 예산 지원을 계속 받기 어려워 폐교를 앞두고 있었다. 할머니들의 학구열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가을 선생님은 문예학교를 구하기 위해 할머니들이 시를 쓰는 여정을 다큐멘터리도 담자는 제안을 수락한다. 이에 방송국에서는 젊은 PD 양반을 파견한다. 처음에는 문예학교 안에서도 뽀로로 마냥 노는 것만 좋아하는 할머니들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PD와 다큐멘터리 촬영에 마음에 열고 할머니들의 인생사를 보다 가까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빨래처럼 시는 어디에나 널려있어 쉽게 시를 찾을 수 있다는 가을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네 할머니는 생활을 하면서 한 명씩 자신만의 시를 완성한다. 누군가는 첫사랑의 기억이 시가 되고, 누군가는 못 이룬 꿈이 시가 되며, 또 누군가는 트라우마가, 다른 누군가는 어렸을 적 한이 시가 되기도 한다. 4인 4색의 시 덕분에 공연 내내 웃고 울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중 아무래도 슬픈 에피소드들이 여운이 오래 가 기억에 더 남는다. 먼저 팔봉마을 문예학교의 반장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영란 할머니는 사실 남몰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 바로 어렸을 때 일제의 영향으로 일본어 표현은 지금도 남아있지만 정작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기본적인 책 읽기도 어려운 것이다. 사랑해 마지 않는 손자가 조금씩 커가며 유치원에서 스스로 한글을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되자, 손자에 대한 뿌듯함도 잠시 두려움이 찾아온다. 손자가 책읽기를 부탁해도 한글을 읽지 못해 책 읽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문예학교를 다닌 이후로 조금씩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떠듬떠듬 한글로 마음을 담은 편지도 쓸 수 있다. 영란 할머니는 손자의 집을 떠나기 전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시가 되었다. 영란 할머니가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 문득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주신 용돈 봉투가 떠올랐다. 우리 할머니도 영란 할머니와 비슷한 연배로 한글 쓰기가 서투셨지만 한 자씩 또박또박 열심히 살아서 꿈을 이루라는 말을 전해주셨다. 당시에는 감사히 받았던 용돈 봉투에 영란 할머니와 같은 노력과 한이 담겨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 눈물이 흘렀다.
영란 할머니 이야기에서는 개인적인 경험이 떠올라 나혼자 훌적였다면 분한 할머니 에피소드가 나왔을 당시에는 공연장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한 할머니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분한 경험이 많았다. 당시 시대상에 여자라는 이유로 시부모님으로부터 핍박받는 어머니를 지켜봐야 했고, 그런 억울함은 대물림되어 분한 할머니의 청소년기를 가득 메웠다. 셋째였던 분한 할머니는 딸만 셋이라는 게 분하다는 부모님으로부터 분한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교복도 입지 못하고 한글은 커녕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분한 할머니. 그러나 70세에 배운 한글이 할머니를 변화시켰다. 이름을 직접 한자한자 적고 부르며 더이상 부끄럽지 않게 된 것이다. 할머니들의 이야기이고 웃음이 가득한 공연인 만큼 가족 단위로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이 많았는데, 다들 자신의 부모님이 떠올랐는지 가장 감정적인 공명이 컸던 부분이었다. 다큐멘터리의 목표였던 시 쓰기를 네 명의 할머니가 모두 해냈다. 처음에는 상사의 지시에 마지못해 온 PD도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동화되어 누구보다 할머니들의 여정을 응원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전국 시낭송 대회 참가를 제안해 할머니들이 멋지게 각자의 시를 낭송하고 단체 사진을 찍으며 막을 내린다.
처음에는 할머니들이 주인공이니 나이듦, 세월에 대한 내용이 나올 것은 예상했으나 공연에서 시 쓰기가 주요하게 다뤄진 점이 흥미로웠다. 독서모임을 1년 넘게 하며 나름대로 소설, 철학, 과학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학에 친숙해졌으나 시는 나에게 항상 난제였다. 수능 때 공부하던 버릇이 여전히 남아 있어 시 한 편을 읽어도 내가 어렴풋이 느낀 이 감정이 옳은 것인지 의심하며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바빴다. 하지만 가을 선생님과 할머니들에게 따르면 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시는 보물찾기 와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어렵지 않다. 최근에는 시는 읽는 사람의 몫이라는 문구를 접했는데, 시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 자유롭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먼저 웃다보면 웃을 일이 절로 나타난다는 가을 선생님의 한 마디처럼 시 또한 일상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찾아올 텐데, 대상이 칠팔십 긴 생을 살아 온 할머니들에게는 천지에 영감이 널려있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러니 팔십, 가장 시를 쓰기 좋은 나이이며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다.
주말에 방문하니 싱어롱 이벤트도 진행해 응원봉을 받고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과 배우들이 다 함께 뮤지컬 넘버 하나를 불렀다. 뮤지컬 공연에서 노래를 같이 부른 경험은 처음이어서 새로웠다. 또한 노랫말이 삶에 대한 응원으로 가득 차 떠듬떠듬 따라 부르다 보면 마음 깊숙이서 용기가 차올랐다. 배우 출연진들 또한 빵빵해 학창시절 일요일 개그콘서트에서 자주 봤던 희극인 김미려 씨(인순 할머니)와 김나희 씨(춘심 할머니)를 배우로 보게 되어 반가웠다. 또한 영란 할머니와 분한 할머니를 연기했던 배우 구옥분 씨와 이예지 씨는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는 구간에도 진짜 할머니 같은 자세와 분위글 풍겨 연기력에 내내 감탄했다. 1인 N역으로 뮤지컬 연극의 묘미를 잘 보여준 장민수 씨(지석구 PD), 열혈 청년 이가을 선생님을 연기한 신진경 씨 덕분에 공연을 보며 많은 에너지를 받았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어 가족 단위로 보기 좋은 공연 같다. 가족들과 주말에 놀러 갈 곳을 찾는다면 이 공연이 좋은 답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