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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산이 스스로 몸을 움직여 내 앞으로 다가오는 형국이다. 회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프로젝트가 이제 막 발동 걸린 상태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행사 기획자로 인턴 5개월, 주니어 4개월 차. 통합 9개월이라는 애매한 경력을 가진 나. 그래도 내게 지금 다가오는 것이 작은 쥐인지, 호랑이를 품은 거대한 산인지 정도는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행사 기획자의 업무는 일반적인 기획자가 하는 일과 큰 차이는 없다. 문제 진단과 아이디어 도출, 제안서 작업, 피저체크와 견적 작업 등 모두 동일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실제 오프라인 현장에 유형의 구조물을 세우고 사람을 모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현장 세팅과 운영, 철수까지 모두 관리하며 이 과정에서 실제 현장에서 발로 뛰어다니는 역할을 맡는다.


이런 구조로 흘러가는 서너번의 프로젝트 경험 속에서 이제야 조금씩 ‘기획’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기획의 본질은 창의성도, 계획성도 아니다. 기획은 철저히 문제 해결과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이었다.


아이디어는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은 프로젝트의 목적과 방향성, 즉 우리가 짚어낸 핵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단계를 넘어가면 이제는 머릿속으로 설계한 나만의 구상을 수많은 이해관계자와 소통하며 실질적 결과로 창출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는 정확한 정보 전달과 매력적인 설득력이 필요하다.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인 것이다.


난생처음 해보는 일들 속에서도 조금씩 본질에 다가가고 있다는 건 단시간 안에 그만큼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배웠다는 뜻일 것이다. 일이 많은 만큼 감을 잡아가는 속도도 빠를테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일이 많다는 건 그만큼의 연속되는 야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프로젝트마다 최소 일주일은 새벽 퇴근이 기본이다. 저녁을 먹어도 새벽 한두 시가 되면 또 배가 고파지는 아이러니. 대입 수험생 때도 독서실에 이렇게 오래 있지 않았는데. 12시가 되면 공부하던 책상을 칼같이 정리하고 안락한 침대에 몸을 던지던 나. 다 늙어서 새벽에도 사무실을 지키려니 컨디션 관리가 완전히 꽝이다.


힘들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계속해서 버티기만 하는 상황들이. 그나마 제안서 작업 전 진행하는 기초 스터디와 제안 내용의 뼈대를 잡아가는 일은 경영이라는 전공에서 늘 해왔던 작업이기에 익숙해 조금 재미있다. 경영이라는 전공에서 늘 해왔던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일, 예컨대 업체와 소통하거나 일의 계획을 짜거나 여러 TF팀에 속해 서너 가지의 일을 동시에 돌려야 하는 일들은 여전히 어렵다. 그런 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매번 머릿속에서 맴돈다.


그렇게 반복되는 야근과 출근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봤을 법한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가?’라는 질문은 내게도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상황을 버티고 있는 걸까?


내가 이 일을 처음 선택한 이유는, 어떤 형태로든 예술가를 도울 수 있는 직업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무식하리만치 그 명분 하나면 되어서, 그게 마케팅이든 PR이든 기획이든 심지어는 HR이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저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원하는 영향을 만들고 내 명분에 부합하기만 하면 됐다.


그래서 당시엔 공고가 가장 많이 떴던 마케팅 직군으로 취업을 준비했었다. 수많은 인턴 및 신입 공고에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넣었고 그러다 ‘오프라인 기획자’라는 아주 흥미로운 직종을 발견했다. 마침, 그 시기에 매주 오프라인 페스티벌을 다녔던 지라 무대를 만들 수 있겠다는 꿈에 부풀어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결국 ‘타인’ 때문이었다. 이 직업을 선택한 이유는 나의 실속이 아니라 나의 바깥에 있는, 내가 사랑하는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일이 성향에 맞지 않아도, 지금 당장 나의 실속을 챙길 수 없어도 나는 버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어떤가. 희한하게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일하고 있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오로지 나의 오기, 내가 나를 이겨야만 한다는 이상한 고집 하나로 버티고 있다. 물론 여전히 내 꿈은 동일하지만 그 꿈을 좇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나의 성장과 회복 탄력성에서 오는 성취감에 내가 취하고 있다. 이 감각은 내가 나의 가치관에 맞는 일을 하고 있음에서 오는 만족감보다 세 배 정도는 더 중독적이라, 이제는 내가 나 때문에 이 일을 놓지 못하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제는 명분에 기대지 않는다. 더 이상 내게 명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을 할 뿐이고, 언젠가 그게 내 꿈에 닿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일타쌍피로 아주 좋은 결과이다! 난 그 과정에서 때로는 인내하고 때로는 즐기고 때로는 실패하기도 하겠으나, 이제 그것은 그저 내가 감당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외부 요소라는 명분이 없어도 이제 조금은 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일하는 감각은 나에게 생각보다도 더 큰 지지가 되어준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프로젝트도 그런 마음을 바탕으로 마주해보려 한다. 이 방식이 정답이라고 할 순 없지만, 나와 비슷한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한 번쯤은 자신을 믿는 쪽을 선택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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