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에게 ‘바다’는 어떤 의미일까. 매일 같은 공간을 오가며 쳇바퀴 같은 삶을 사는 우리는 자주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는 말을 내뱉곤 한다. 그만큼 바다는 많은 이들에게 휴식과 휴양을 상징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에게 바다는 단순한 쉼터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바다는 영감의 원천이자 삶의 투영이었고, 때로는 자유의 무대이자 두려움의 경계였다.
‘모네와 카유보트는 왜 트루빌로 갔을까?’의 김경미 시인은, 그 바다를 만나기 위해 직접 유럽의 해안을 여행하며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떠난 여정 속에서, 저자는 저자만의 언어로 그림 속 바다가 품은 52인의 예술가들의 삶과 시대적 맥락을 새롭게 드러낸다.
시인의 여행기로 본 예술 작품
김경미 시인의 여행기는 늘 뜻밖의 순간들로 가득하다. 길을 헤매다 우연히 마주친 풍경이나, 기대했던 공간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기억들은 시인의 글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난다. 예측 불가능한 여정의 굴곡은 화폭 속 바다와 맞닿으며, 익숙한 작품은 낯설고 신선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저자는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여행 속에서 만나는 작품 속 바다와 풍경을 시인만의 언어로 다채롭게 풀어낸다. 그의 해석을 따라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면 익숙한 작품도 시인의 해석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독자는 마치 처음 보는 듯한 새로운 시선으로 작품을 마주한다.
▲ Paul Gauguin, Horsemen on the Beach, 1902. (Image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저 분홍색은 죽음에 이른 그때까지의 생을 돌아보는 분홍색이라기보다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한 상징, 그러니까 고갱이 생각하는 죽음 이후의 이상향에 대한 묘사고 채색이라는 것이다.
- '모네와 카유보트는 왜 트루빌로 갔을까?', p.33
화폭 속 풍경은 한 예술가가 그 순간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를 드러내는 언어가 된다. 김경미 시인만의 시선과 언어로 해석되는 트루빌과 니스의 풍경들은 독자 역시 독자만의 시선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더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반적인 예술 서적과 달리 독자 스스로 정해진 틀 없이 작품을 해석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한다.
화가의 삶, 그 안의 통찰
무엇보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 조사와 현장 탐방을 바탕으로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준다. 작품 너머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시인이 기울인 집요한 탐구 덕분에, 독자는 그들의 고민과 선택을 지금 우리의 현실과 나란히 놓아볼 수 있다.
흔히 모네라고 하면 지베르니의 정원과 수련을 떠올리지만, 김경미 시인이 아끼는 작품은 의외로 트루빌 해변을 그린 그림이다. 그 바다에는 젊은 시절 가족과 함께한 모네의 기억이 담겨 있다. 이렇게 시인의 해석을 따라가며 독자는 익숙한 이름 뒤에 숨은 또 다른 모네를 만나고, 사랑과 함께함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게 된다.
▲ Monet, The Boardwalk on the Beach at Trouville, 1870. (Image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아이바좁스키와 휘슬러를 다룬 대목에서는 새로운 통찰이 이어진다. 저자는 이들의 사연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성격과 삶의 태도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자아 탐구와 삶을 헤쳐 나가는 방식은 시대를 초월한 화두이며, 그들의 작품은 지금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준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예술가의 삶을 오늘 우리의 일상과 겹쳐 생각하게 하는 탁월한 시적 시선과 해석력을 보여준다.
▲ Aivasovsky, The Ninth Wave, 1850. (Image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때때로 아이바좁스키의 말을 예술 활동만이 아니라 인생에도 견주어 보고는 한다. 살아가는 일 또한 자꾸 반복되는 같은 단점을 계속 수정하고 극복하고 개선하는 과정이기도 하니까. 그런 뜻에서 내가 자꾸 반복하는 글과 일상과 인생의 주제와 그에 대한 가장 큰 단점을 가만히 떠올려 본다. 괴롭지만, 새로운 열 번째 구원의 빛을 기대하면서.
- '모네와 카유보트는 왜 트루빌로 갔을까?', p.69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바다처럼 보이는 그림들. 그러나 저자가 들려주는 예술가 이야기를 비추어보면 그 안엔 각자가 견뎌낸 고난과 고유한 해석이 담겨 있다. 누군가에게 바다는 위로의 공간이자 자유의 상징이 되고, 또 다른 이에게는 끝없는 두려움과 싸움의 무대가 된다. 이 책이 단순한 미술 여행기를 넘어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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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와 카유보트는, 그리고 수많은 예술가는 왜 트루빌과 니스의 해변을 화폭에 담았을까. 저자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은 예술가들에게 삶의 고단함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쉼터이자 빛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회화적 실험의 무대, 그리고 사랑과 상실이 투영된 내밀한 공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빠르고 불안정한 현대의 삶 속에서 김경미 시인이 전하는 예술가들의 바다는 잠시 멈추어 숨 고르기를 허락한다. 치열하게 살아낸 예술가들의 이야기와 그 바다에 담긴 의미들은 현대 독자에게 위로이자 성찰의 기회가 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