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살이 유난히 부드럽게 내려앉던 초여름의 오후였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었지만 땀은 나지 않았다. 이름 모를 풀에서는 짙은 초록 냄새가 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하루였지만, 나는 그날의 산책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창밖에는 습한 공기와 함께 장맛비가 쉼 없이 쏟아지고 있다. 방금까지 걷고 있던 그 초여름은 음악이 잠시 꺼내 보여준 어느 날의 풍경이었다. 가끔 음악 한 곡만으로 이토록 선명한 장면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괜스레 마음을 벅차게 만든다.
음악은 참 은밀하고도 아름답다.
아마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계절 플레이리스트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노래, 특별한 이유는 없어도 그 계절의 공기와 냄새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들. 노래들은 계절을 기록하는 동시에, 그 계절을 살아가던 나를 다시 만나게 한다.
1) Family of the year - Hero
Let me go
나를 내버려 두세요
I don't wanna be your hero
당신의 영웅으로 자라고 싶지도 않고
I don't wanna be a big man
대단한 남자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세상은 온통 멋지고 쿨하고, 당차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평범하게, 작게, 수줍게 살아가는 법은 누가 알려줄까.
영웅이 되고 싶지 않다는 고백. 누군가에게 대단한 사람이 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고 싶다는 조용한 마음. 이 노래는 울부짖지 않는다.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고 싶다고 조용하게 고백한다.
이 곡은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보이후드> OST이기도 하다. 열두 해 동안 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시간을 담담하게 따라가는 영화처럼, 'hero' 역시 애써 거창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영웅이 되려 애쓰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소박하게 노래한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려 애쓰다보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잊기도 한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영웅이 아닌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용기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상하게도 초여름의 햇살과 함께 기억된다.
2) hollow coves - these memories
Now I am far way
지금 난 멀리 있지만
These memories still remain
이 추억은 아직도 남아 있어요
Now I am far way
지금 난 멀리 있지만
You stay with me the same
당신은 변함없이 내 옆에 있어요
'wanderlust'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
참 좋아하는 단어다. 한 아티스트의 노래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어느새 이 단어는 내게 떠날 용기를 건네는 신호같은 단어가 되었다. 단어를 찾아보다 우연히 hollow coves의 wanderlust를 발견했다. 이 앨범은 멤버들이 각자 여행하며 마주한 풍경과 추억을 되새기면서 만든 작품이다. 지금도 여행을 떠날 때면 이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꼭 담는다.
음악이 시작되는 순간 가장 먼저 어느 여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작은 창문 너머로 보이던 초록 나뭇잎, 옅게 내려앉던 안개. 그때 마주했던 풍경과 경험들 그리고 사람들.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wanderer가 된다. 시간이 지나 장소의 이름은 희미해져도 그때의 감정만큼은 음악 속에 오래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김없이 어느 여름의 나를 불러온다.
3) Joe Hisaishi - One Summer's Day
이 곡을 들으면 여름은 더 이상 덥고 습한 계절이 아니다. 햇살은 눈부시지만 따갑지 않고, 바람은 기분 좋게 스쳐 지나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의 모습이 이 음악 안에 담겨 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메인 테마인 이곡은 영화의 첫 장을 연다. 낯선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치히로의 설렘과 불안은 잔잔한 피아노 선율 위에 흐르고, 그 감정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다양하게 변주된다. 제목 그대로 ‘어느 여름날’이라는 시간을 음악으로 그려낸 곡이다.
이 곡을 처음 만난 건 영화가 아니라 음악 학원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피아노 선생님께 숙제로 받은 악보의 첫 장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때의 나는 예쁜 멜로디를 가진 곡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한 줄이 궁금해 영화를 찾아봤고, 그렇게 나는 음악보다 조금 늦게 치히로를 만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올해 초, 내한 공연으로 다시 이 작품을 만났다. 한겨울 극장에서 다시 들은 이 음악은 신기하게도 여전히 초여름의 공기를 품고 있었다.
계절은 달라도 음악이 기억하는 풍경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내가 떠올리는 이상적인 여름은 이 곡이 오래전부터 만들어 준 풍경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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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해마다 다시 찾아오지만 같은 계절은 한번도 없었다. 달라지는 것은 날씨만이 아니라 그 계절을 살아가는 나이기도 하다. 계절이 바뀔 때 마다 플레이리스트를 다시 꺼내 듣는 일은 단순히 음악을 듣는 일이 아니라 어느 계절의 나를 다시 만나러가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