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은 틀렸다. 공평한 것은 시계뿐이다.
1분은 예외 없이 60초이고 하루는 모두에게 24시간이다. 그러나 시계는 시간의 길이를 잴 수 있을 뿐, 그 안을 통과하는 사람의 속도까지 재지는 못한다.
2024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인 83.7년을 24시간으로 줄여 보면, 내 나이는 오전 6시 38분쯤이다. 하루가 겨우 밝아오는 시각.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가 많고, 잠에서 깨지 않은 사람도 많다. 무엇을 시작하기에도 충분히 이른 시간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자주 하루가 저물어가는 사람처럼 조급해진다. 너무 늦기 전에 평생을 몸담을 직장을 정해야 할 것 같고,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할 것 같고, 지금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은 곧 영영 사라질 것만 같다.
인간이 오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 많은 여유를 주었을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학업과 취업, 경력과 자산, 사랑과 가족처럼 삶을 결정한다고 여겨지는 일들은 여전히 청년기와 중년기 초입에 밀집되어 있다. 살아갈 날이 늘어난 만큼 대비해야 할 미래와 노후도 길어졌다. 우리는 더 긴 생애를 얻는 대신, 그 생애를 먹여 살릴 책임을 젊음에 떠넘겼다. 젊음은 미래의 선납금이 되고, 노년은 젊음을 얼마나 잘 사용했는지 확인하는 결산표가 된다.
“아직 젊으니 무엇이든 해보라”는 말과 “젊을 때 기반을 마련하라”는 말은 서로 반대처럼 들린다. 하지만 둘 다 지금을 가만히 살아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다. 도전하면서 안정되어야 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뒤처지지도 않아야 한다. 그렇게 현재는 아직 오지 않은 삶에 저당 잡힌다. 반대로 노년은 젊은 날의 선택이 남긴 결과로만 설명된다. 잘 준비했는지, 얼마나 이루었는지, 무엇을 남겼는지를 평가받는 동안 그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의 새로운 욕망과 가능성은 지워진다. 청년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고, 노년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의해 현재를 판정받는다.
그렇다고 미래를 포기하고 젊음을 즐기자는 말은 아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일 역시 현재의 나를 지키는 중요한 선택이다. 어느 시기도 다른 시기를 위한 비용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젊음은 노년의 재료가 아니며, 노년 역시 젊은 날의 성적표가 아니다. 둘은 한 사람이 서로 다른 계절에 맞이하는, 똑같이 현재인 시간이다.
그렇다면 지금이 늦었다는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를 쫓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간표인지도 모른다. 같은 나이라면 비슷한 지점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는 믿음, 삶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은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믿음 말이다. <가려진 시간>은 시간의 속도를 어긋나게 하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생애의 방향을 뒤집는다. <퍼펙트 데이즈>는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제자리로 돌아오는 하루를 반복한다. 세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시계를 고장 낸 뒤, 비로소 한 사람의 삶을 보여준다.
<가려진 시간>, 시계가 기록하지 못한 시간
<가려진 시간>에서 성민과 수린은 같은 또래의 아이로 만나 둘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를 만들고, 숲과 터널을 오가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쌓는다. 그러나 동굴에서 발견한 신비한 물체가 깨진 뒤 이들의 시간은 갈라진다. 수린이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며칠이 흐르는 동안, 시간이 멈춘 세계에 남겨진 성민에게는 십수 년이 지난다. 소년은 그 안에서 어른이 되어 돌아오지만, 아무도 그가 성민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영화가 시간을 멈추는 방식은 화려하면서도 쓸쓸하다. 공중에서 멈춘 물방울과 허공에 고정된 사물, 움직임을 잃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아이들을 위한 거대한 놀이터처럼 보인다. 먹고 싶은 것을 가져오고 어디든 들어갈 수 있으며, 어른의 제지를 받지 않는 세계다. 그러나 움직이는 존재가 자신들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자유는 고립으로 변한다. 바람도 파도도 다른 사람의 표정도 이어지지 않는 세계에서 아이는 성장한다. 성장은 흔히 앞으로 나아가는 일로 묘사되지만, 이곳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함께 시간을 나눌 사람이 하나씩 사라지는 일이다.
성민이 돌아왔을 때 그의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세상은 그에게 어른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사회가 인정하는 그의 시간과 그가 실제로 통과한 시간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굴은 시간이 흘렀다고 말하지만, 주민등록과 타인의 기억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직 수린만이 둘만의 암호와 기억을 통해 그가 성민임을 알아본다.
우리 역시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을 ‘동갑’이라 부르며 비슷한 시간을 살아왔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오래 돌봄을 받았고, 누군가는 일찍 자신을 책임져야 했다. 출생 연도는 같아도 각자가 건너온 시간의 밀도는 다르다. <가려진 시간>의 멈춰버린 풍경은 그 보이지 않는 차이를 극단적인 이미지로 드러낸다. 우리는 같은 시계 아래 있으면서도 각자의 가려진 시간을 통과한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반대 방향의 시계
영화의 첫머리에는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시계공 개토가 등장한다. 그는 뉴올리언스 기차역에 거꾸로 가는 시계를 설치한다. 전쟁터로 떠난 젊은이들이 시간을 되돌려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시곗바늘은 과거를 향해 움직이지만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듯, 거꾸로 가는 시계 아래에서도 역을 오가는 사람들은 각자의 미래로 떠난다.
그 시계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벤자민이다. 그는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시간이 흐를수록 젊어진다. 그러나 벤자민의 삶 자체가 과거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새로운 사건을 겪고 기억을 쌓으며 미래로 나아간다. 달라지는 것은 몸이 가리키는 방향뿐이다. 이 모순은 나이가 단지 살아온 시간의 양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결정하는 사회적 표식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얼굴과 숫자를 보고 그 사람이 무엇을 시작하기에 이른지 늦은지, 무엇을 책임질 수 있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판단한다. 벤자민은 어느 나이에도 그 나이에 맞는 사람으로 읽히지 않는다.
영화는 이러한 어긋남을 오래된 엽서와 빛바랜 사진 같은 화면 안에 담는다. 병상에 누운 데이지가 딸에게 벤자민의 일기를 읽게 하는 액자 구조 속에서, 한 사람의 생애는 이미 지나가 버린 기억으로 펼쳐진다. 따뜻한 황갈색의 화면, 낡은 건물과 기차역, 반복해서 등장하는 시계는 모든 것이 언젠가 과거가 된다는 감각을 만든다. 그 안에서 벤자민의 젊어지는 얼굴만이 시간에 저항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의 몸이 젊어질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무한히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억과 몸의 간격은 커지고, 그는 다시 타인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젊음이 곧 가능성이고 노년이 곧 쇠퇴라는 직선적인 믿음은 그의 생애 앞에서 힘을 잃는다.
데이지와 벤자민은 서로를 오래 사랑하지만, 나란히 나이 들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성숙해지는 동안 다른 사람은 젊어지고, 마침내 두 사람의 나이가 비슷해진 순간조차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벤자민은 자신이 점점 어려지는 미래를 두려워하며 데이지와 딸을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기억마저 잃은 아이의 몸으로 데이지의 품에서 눈을 감는다.
그래서 이 영화가 건네는 위로는 “늦어도 괜찮다”는 말보다 조금 복잡하다. 삶에는 모두가 따라야 할 올바른 순서가 없다는 것.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사람과도 잠시 같은 계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우리는 흔히 안정된 직장과 관계, 분명한 미래가 오래 지속되어야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속된 시간의 길이만으로 한 시절의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다. 시차가 생겼다는 이유로 사랑이 거짓이 되지 않듯, 방향을 바꾼 삶도 뒤처진 삶이 아니다.
그럼에도 질문은 남는다. 사람마다 속도도 방향도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한 뒤,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까. 타인의 시계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내 시계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퍼펙트 데이즈>, 제자리에서 흐르는 시계
<퍼펙트 데이즈>는 여기서 시간을 크게 비틀지 않는다. 시간을 멈추거나 거꾸로 돌리는 대신, 너무 평범해서 쉽게 흘려보내는 하루를 오래 바라본다.
도쿄의 공공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는 매일 비슷한 시각에 일어난다. 골목을 쓰는 빗자루 소리에 눈을 뜨고, 이불을 개고, 식물에 물을 준다. 출근 전 자판기 커피를 뽑고, 차에서는 그날 고른 카세트테이프를 듣는다. 점심에는 같은 신사에서 나무를 올려다보며 필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퇴근 후에는 목욕탕과 단골 식당에 들른다. 밤에는 중고 서점에서 산 책을 읽다가 잠든다. 다음 날이 되면 영화는 다시 비슷한 장면으로 돌아온다.
좁은 4:3 화면은 히라야마의 단출한 생활 반경을 닮았다. 화려한 도쿄의 속도와 확장을 보여주는 대신, 카메라는 한 사람의 몸과 그가 반복하는 동작을 차분히 화면 안에 머물게 한다. 반복되는 구도는 관객이 사건보다 차이를 보게 만든다. 같은 출근길에도 선곡이 달라지고, 같은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빛도 매일 달라진다. 밤마다 이어지는 흑백의 꿈은 낮에 스쳐 간 빛과 얼굴, 나뭇잎을 다시 섞는다. 하루는 똑같이 되풀이되는 듯하지만 한 번도 정확히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영화의 중요한 이미지는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햇빛, ‘코모레비’다. 빛은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바람에 잎이 흔들릴 때마다 모양을 바꾸고, 같은 나무 아래에서도 같은 빛을 두 번 볼 수 없다. 히라야마가 그 순간을 필름에 남기는 것은 시간을 붙잡아 소유하려는 행동이라기보다, 오늘의 빛이 어제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습관에 가깝다.
우리는 변화가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돈, 더 뚜렷한 성과가 생겨야 시간이 제대로 흘렀다고 믿는다. 그런 시계로 본다면 히라야마의 반복은 정지에 가깝다. 그러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과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은 다르다. 계절은 같은 자리에서 바뀌고 나무는 서 있는 채로 자란다. 원을 그리는 시간도 분명히 흐른다.
조카 니코에게 건네는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라는 말은 그의 시간관을 압축한다. 이 말은 다음을 생각하지 말라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더 나은 미래가 오기 전의 대기실이 아니며, 다음 역시 오늘의 선택을 채점하기 위해 기다리는 결산의 시간이 아니다. 각 시기를 그 시기의 현재로 사는 것. 그것이 히라야마가 자신의 시간을 지키는 방식이다.
물론 그의 생활을 누구나 따라야 할 정답으로 삼을 수는 없다. 일정한 일과와 고독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 역시 사람마다 다르고, 단순한 생활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선이 노동의 고단함이나 경제적 불안을 가릴 위험도 있다. 히라야마의 과거와 가족 사이에는 그가 말하지 않는 상처가 있으며, 반복되는 하루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을 들으며 운전하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와 눈물이 동시에 떠오른다. 완벽한 하루란 슬픔이 없는 하루가 아니라, 슬픔까지 밀어내지 않고 통과하는 하루에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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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한 사람이 몇 년을 살았는지는 말해주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뎠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성민의 십 년을 기록하지 못하고, 벤자민의 나이를 읽지 못하며, 히라야마의 반복을 정지라고 오해한다. 잘못된 것은 그들의 시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애를 하나의 시각으로 읽으려는 우리의 시계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완전히 같은 속도로 살아갈 수 없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조차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시차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시차를 믿어주는 일, 그리고 자신의 하루에만 들어오는 빛을 알아보는 일일 것이다.
내 나이가 오전 6시 38분이라는 계산도 결국 하나의 비유에 불과하다. 누구에게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아침이고, 누구에게는 밤을 꼬박 지새운 뒤 맞이한 시각이며, 누군가에게는 이미 중요한 일을 시작한 하루일 수 있다.
삶에는 표준시가 없으므로, 지금이 이른지 늦은지를 타인의 시계로 판단할 수는 없다. 아직 오지 않은 일몰을 헤아리느라 막 밝아오는 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이 몇 시인지보다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누구의 시간을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