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를 처음 읽은 게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이후로, 이유 없이 재즈가 듣고 싶어지는 밤이 생겼다.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달라진 무언가. 그게 하루키를 읽는다는 것의 정체였는지도 모른다.
재즈는 설명하는 대신 반복되는 리듬과 미묘한 어긋남 속에서 듣는 사람 각자의 방식으로 완성된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는 레코드와 음악을,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서는 재즈바를 운영하는 주인공을 내세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재즈 같다. 명확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읽는 순간 각자의 감각으로 다르게 번역된다.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는 개관 10주년을 맞아 기획전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한 작가의 문학을 설명하거나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아, 그의 소설이 어떻게 타인의 감각 속에서 변주되고, 또 각자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지를 탐색한다.
문학, 시각예술, 음악, 그리고 개인의 기억까지. 서로 다른 감각들이 한 공간 안에서 교차하며, 관람객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흐름은 특정한 해석을 요구하기보다, 스스로의 내면을 더듬어보도록 만든다.
고양이,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전시는 벽을 넘나드는 고양이의 안내로 시작된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고양이와 대화하는 인물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세계의 결을 감각하고,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는 주인공이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세계의 균열을 마주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고양이는 늘 경계에 서 있는 존재다.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넘나들며, 때로는 길을 안내하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사라진다.
이번 전시에서 고양이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 하나의 동선이 된다. 벽을 통과하듯 말을 건네는 고양이를 따라 걷는 순간, 관람객은 외부의 관찰자가 아닌 이야기 속을 통과하며 자신의 인생을 되짚어 보는 주인공이 된다.
삶과 문학 사이, 반복으로 만들어진 세계
전시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작품이 아닌 삶으로 풀어낸다.

안자이 미즈마루가 그린 하루키
와세다대학교 국제문학관(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과의 협력을 통해 공개된 소장품들은, 그의 문학이 어떤 시간 위에서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오랜 협업자였던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의 원화 200여 점이 국내 최초로 공개되며, 두 창작자가 오랜 시간 주고받아 온 감각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달리기, 재즈, 위스키, 그리고 반복되는 루틴. 그의 문학을 구성해 온 요소들은 개인의 취향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읽힌다. 재즈바를 운영하던 시절을 지나, 야구장에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의 시간. 그 이후의 삶은 오히려 단조롭다. 매일 달리고, 음악을 듣고, 같은 리듬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그 반복이 쌓여 하나의 문학이 된다.
하루키 이후의 이야기들
이 전시가 흥미로운 지점은, 하루키의 세계를 현재로 확장한다는 점에 있다.

『노르웨이의 숲』은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로 사랑과 죽음, 상실과 기억이 교차하는 소설이다. 한국에서는 『상실의 시대』, 프랑스에서는『불가능의 발라드』, 독일에서는 『나오코의 미소』, 스페인에서는『도교 블루스』, 태국에서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이 차이는 번역의 문제가 아닌, 읽기의 방식에 가깝다. 하루키의 문장은 언제나 여백을 남긴다. 그리고 그 여백 위에 무엇을 올려놓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소설을 읽고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

강애란, The Towering of Intelligence
한국 현대미술 작가 강애란, 김찬송, 순이지, 이원우, 한경우는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키의 세계를 변주한다. 여기에 뮤지션 장기하, 셰프 조광호 등 하루키의 문학에서 영향받은 이들의 필사와 편지가 더해지며, 하나의 텍스트는 여러 개의 감각으로 확장된다. 누군가는 고독을, 누군가는 사랑을, 또 다른 누군가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균열을 읽어낸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김찬송의 작업이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며 느껴지는 추상적인 감각의 층위들이 신체적인 회화로 내려오며, 현실과 이상 사이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어떠한 온도와 밀도로 몸을 감싸고, 부드러운 색채 앞에서 오래도록 그림을 바라보게 된다.
이 지점에서 하루키의 문학은 작가의 것을 넘어, 각자의 감각으로 번역된다.
결국,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래서 이 전시의 제목은 하나의 설명이 아니라, 문장처럼 남는다.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하루키를 말하는 척하며 ‘나’를 말하게 되는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타인의 문장을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감정으로 덧입혀 다시 써낸다. 전시의 마지막에는 하루키의 재즈바가 등장한다. 음악이 흐르고,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전시를 보는 것을 멈추고 머무르는 시간 안으로 들어선다.
내가 왜 하루키를 좋아했는지, 하루키를 읽으며 어떤 감각을 느꼈는지, 그것이 타인과 무엇이 달랐는지 고민한다. 작은 노트를 꺼내서 생각나는 단어와 문장을 마구 적어 내리다 보면 더 이상 하루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대신 내가 어떤 감각에 오래 머물러 있었는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만 들어봤어도 괜찮다. 다만, 어떤 감각에 오래 머물러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전시는 그 감각에 이름을 붙여줄지도 모른다.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3월 27일부터 8월 2일까지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진행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