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유형을 거칠게 분류하면 비극적 주인공과 희극적 주인공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사회적 평균 이상의 지위나 시분, 높은 도덕적 이상, 훌륭한 성품 등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런 강인한 인간 역시 인간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만큼 거대한 세계와의 대결에서 종종 패하고 만다. 관객들은 그의 여정을 따라가며 숭고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반면 희극적 주인공은 정확히 반대이다. 눈에 띄는 결점도 많고, 사회적 기준에 번번히 박탈되는 천한 성품의 소유자가 대부분이다.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그들의 바보같은 선택들은 우리에게 웃음을 준다. 그들을 보며 우리는 쉽게 우월감을 느낀다. 웃음이 터진다는 것 자체가 그를 완전히 타자화 해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희극적 주인공에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즉 그가 사실 나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태도는 조금 달라진다.
여기 '플리백(fleabag)'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있다. 사전에 이 단어를 검색하면 'a dirty or shabby person or animal', 즉 더럽고 추레한 사람이나 동물을 가리키는 비격식 단어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 이름을 부여 받은 인물은 어떠하겠는가. 퍽 잔인한 처사처럼도 느껴진다. 관객들의 앞에 나타나기 전부터 그는 이미 몇 가지 정의 속에 욱여 넣어지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인간이겠지. 게으른 인간일 거야. 도덕이라고는 모르는 인간이겠지. 자기 인생을 내버린 인간임이 분명해.
그러나 이 평가들이 전환되는 한 순간이 있다. 형편없어도, 게을러도, 도덕이라고는 모르고 설령 자기 인생을 내버렸대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이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특성임을 내 안에서 발견하는 그 순간은 마법처럼 우리를 사로잡는다.
연극 <플리백>을 소개한다.
무대 위로 한 젊은 여성이 뛰어 들어온다. 곧바로 면접이 시작되는데, 여자는 내내 뛰어온 건지 헐떡대는 숨과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한다. 연신 부산스러운 느낌의 여자는 면접관의 질문에도 내내 농담조로 받아치고, 결국 웃옷까지 들어올리는 만행 끝에 말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면접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다. 이 인터뷰 장면은 마치 이 여성의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를 은유하는 장면 같다. 진지한 상황을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무마해온 여자, 플리백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런던에서 기니피그 카페를 운영하는 플리백은 동업자이자 친구였던 '부'의 끔찍한 죽음 이후 홀로 가게를 지키며 산다. 그러나 영업 실적 부진으로 가게는 폐업 위기에 처하고, 플리백에게는 돈이 없다. 이 가게에는 항상 11시마다 찾아오는 '조'라는 노인이 있다. '조'는 극중 거의 유일하게 플리백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다정함을 허락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플리백은 '조'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이나 외형을 조롱한다. 끝내 그에게도 성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가 내어준 한 조각의 다정을 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뿐이라는 듯.
또 부의 생일선물로 주었다가 카페에서 함께 기르게 된 기니피그 '힐러리' 역시 유사한 역할을 한다. 그저 작고 까만 눈으로 플리백을 바라보고, 또 기다린다. 힐러리와 조의 공통점은 플리백을 어떤 식으로든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부끄러운 과오를 저지르더라도 그들은 그저 일정한 시간, 일정한 공간에서 플리백을 맞이한다. 그러나 플리백은 자신의 손으로 그 유일무이한 관계들을 부숴버린다.
플리백은 그런 둘의 존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그의 사연을 듣다보면 그가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을 짐작할 수 있다. 조건부 사랑에 익숙하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관계를 망치면서도 언제나 끔찍한 고독에 시달린다. 성적이거나 금전적인 목적을 배제한 인간관계는 받아들이기도 어려워 하는 인간이다. 다만 플리백은 언제나 그것을 비틀린 유머, 냉소, 자조적인 농담에 담아 발화한다. 이 역시 사건의 심각성을 과소평가 하는 그만의 방법, 그만의 방어기제라 볼 수 있다.
플리백은 성적 집착과 욕심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자신의 남성 편력을 줄줄이 늘어놓기도 한다. 이는 관객에게 묘한 불편감을 안기기 때문에 관객으로서의 방어기제, 바로 '저건 저 사람 인생이니까.'라는 타자화 하고픈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이 극은 배우의 재량으로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말하자면 스탠드업 코미디 같은 형식을 취한다. 즉 관객을 적극적으로 극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청자가 있기에 화자가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듯, 플리백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으면서도 관객들의 존재를 지우지 않으며 모두를 이야기의 공범으로 끌어들인다.
한 사람의 내밀한, 그렇기에 추하기까지 한 얼굴을 직접 목도하는 일은 많지 않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것은 예술 작품을 통해서 종종 실현되곤 한다. 우리는 작품을 일방적으로 관람하며 소비하기 위한 고고한 목적으로 극장을 찾는다. 그러나 발가벗을 듯 노골적인 솔직함을 마주하면 그를 동정이라도 하게 된다. 가릴 것 없이 솔직해질 수 있는 건 어쩌면 가장 숭고한 인간만의 속죄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희극적 주인공 플리백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저 플리백을 비난하며 끝나지 않는다. 그에게 또 다른 기회를 선사한다. 그건 바로 아직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길, 인생이라는 막막한 기회이다. 마지막에는 처음과 동일한 면접 상황으로 돌아오며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작품 내내 보여진 플리백만의 강점, 노골적인 솔직함이 빛을 발하며 플리백은 면접관에게도 그 솔직함을 전염시킨다. 조금은 누그러진 분위기에 면접관이 제안한다. "우리, 면접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어때요?"
작품은 말한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한층 후련해진 미소와 함께 플리백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의 노골적인 솔직함은, 그 숭고하고 사랑스러운 특성은 결국 플리백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 결국 연극 <플리백>은 자기 구원의 이야기이다. 오직 의자 하나와 작은 소품 몇 개, 배우 한 명과 핀조명으로 완성된 이 작품은 덜어냄으로써 더욱 풍부해지는 훌륭한 연출로 우리 자신에게도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플리백>의 역사는 유구하다.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처음 공개된 후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작품이 전세계 관객을 만난 끝에 한국에 상륙했다. 솔직한 것을 넘어 발칙한, 그러나 어딘가 서늘한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의 풍부한 레이어를 하나하나 들춰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오직 텍스트와 배우의 힘만으로도 이렇게 무대를 풍부히 채울 수 있구나 느낀 시간이기도 했다. 9월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되는 이 작품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