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힘, 모르는 것이 약. 어느 쪽에 힘을 실어야 할지 몰라 방황해온 시간이 길다. 두 갈림길에 선 채, 가능한 적게 고민하며 적절한 노선으로 옮겨다니는 것이 인생의 지혜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릴 때에는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이 곧 나의 세상을 둘러싼 두꺼운 문들을 열어 젖힐 힘이 된다고 믿었다. 실제로 이를 경험할 때마다 앎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져만 갔다. 비밀의 향기는 언제나 고소하고 유혹적이었고, 그걸 꼭 입에 넣고 굴리며 껍질을 하나하나 까 봐야만 직성이 풀리곤 했다.
그러나 나이를 조금씩 먹어갈 수록 나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무지를 사수하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든다. 나라는 인간의 시선을 벗겨낸 누군가의 진짜 얼굴, 진의, 마음들을 외면하고 싶고 나아가 지식, 정보, 세상을 뒤덮은 수많은 비밀들을 있는 그대로 두고만 싶다는 욕구. 그러면 나의 작은 평화를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긴다. 특히 오래 교류하며 사랑해온, 이별을 감히 생각도 해본 적 없는 가까운 관계들일수록 '내가 아는 그 사람'의 이미지 바깥에 놓인, 뜻밖의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를 발견하면 배신감이 들기까지 하는 걸 보면.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사망한 후이면 어떨까. 더 이상 '의외의 면'을 새로 생산해낼 리 없는 죽은 자인만큼 우리는 평생 자신이 판단하고 재단해온 그 사람을, 즉 헛된 환상을 그리워하게 되는 걸까. 망가질 리 없는, 더 안전한 사랑을 이어갈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렇게 펼쳐진 무지의 동산은 평온하기만 할까.
세상은 무지의 작고 산뜻한 천국을 유지하도록 허락하지 않기도 하는 모양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은 이후에 그의 생을 둘러싼 비밀을, 전혀 몰랐던 그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한다면 우리는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며 그 수긍의 단계를 견뎌가야만 하는 걸까. 영화 <그을린 사랑>이 내게 남긴 것은 이런 씁쓸한 질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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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영화 <그을린 사랑>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을린 사랑>은 한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은 공증인으로부터 어머니가 남긴 두 통의 편지를 전해 받는다. 아버지와 형을 찾아 해당 편지를 전달하라는 유언은, 그 전까지는 제대로 된 장례는 물론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경고가 더해져 더욱 오싹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버지와 형의 존재조차 모른 채 살아온 쌍둥이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둘 사이에 의견 차이가 발생한다. 어머니는 원래 이상한 사람이었다며 유언을 신경쓸 필요는 없다는 아들 시몽과 달리 딸 잔느는 나왈 마르완의 고향이 있는 레바논으로 향한다. 이후 영화는 어머니의 생전 발자취를 밟아 가는 잔느를 통해 그의 생전의 비밀들을 하나하나 밝혀가는 방식을 취한다.
나왈 마르완의 일생을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그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레바논으로 건너온 이슬람계 팔레스타인 난민과 사랑에 빠져 가족들에게 명예살인 당할 위기에 처한다. 겨우 살아남아 죽은 남편의 아이를 낳지만 거두지 못하고 고아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게 된다. 언제든 그를 찾을 수 있도록 발 뒷꿈치에 나란히 줄 지은 점 세 개를 새긴 후에 말이다. 이후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에 진학한 나왈 마르완은 내전의 낌새가 심해지자, 고아원에 맡겨진 아들을 찾으러 내전 지역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아들을 찾지 못한 것은 물론, 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마주하고 각성해 테러단체의 일원이 된다. 주요 인물을 살해한 죄로 정치사범이 된 나왈은 열악한 감옥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고, 고문 전문가 '아부 타렉'의 성폭력으로 쌍둥이 아이를 출산한다. 그들이 바로 잔느와 시몽이다.
영화 후반부에 드러난 진실에 관객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실제로 본인은 ―물리적으로―입을 다물지 못한 채 영화를 관람했다.) 아부 타렉이 바로 마르완의 첫째 아들이었던 것. 즉 그는 쌍둥이의 형인 동시에 아버지인 인물이었다. 출생 직후, '니하드'라는 이름으로 고아원에 맡겨졌던 그는 이슬람 테러단체에게 거둬져 살인 병기로 키워졌다. 그러다 기독교 테러 단체의 포로가 되고, 이후 전향해 나왈이 머물던 교도소의 고문 전문가로 일하게 되었던 것. 이후 나왈 마르완과 쌍둥이처럼 캐나다로 넘어와 평범한 버스 청소부로 살아가고 있던 그를 나왈 마르완은 수영장에서 발견한다. 발 뒷꿈치에 새겨진 문신을 따라 시선을 올린 나왈 마르완은 이 운명의 장난을 마주하고 끔찍한 기분에 휩싸인다.
이렇게만 보자면 흔하디 흔한 오이디푸스 서사, 코웃음 나오는 막장 서사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줄거리를 나열했기 때문이고, 이 정보값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아주 영리한 방법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을린 사랑>은 단순한 신파 멜로 드라마를 아득히 뛰어 넘는다. 플래시백이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은 있으나, 영화는 자극적으로 번질 수 있는 이야기를 줄곧 담백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의 반전도 '뒤통수를 후려치는' 여타의 반전들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실제 우리네 삶의 많은 진실들이 그러하듯, 괴로우면서도 먹먹한, 그러나 서둘러 수긍을 강요하는 잔인한 반전이다. 또한 이 가족의 이야기는 전쟁과 대량 학살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기에 개인의 비극을 넘어 더욱 다채로운 의미를 생성해낸다. 이는 훌륭한 반전(反戰) 영화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나왈 마르완이라는 인상적인 캐릭터에 대해 조금 더 얘기 해보고 싶다. 영화 속 그의 진의를 깨닫기란 참 어렵다. 어차피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침묵하여 진실을 영원히 묻어둘 수도 있었을 테다. 쌍둥이가 받을 충격과 진실의 불편함 -을 넘어선 극한의 고통-을 생각하면 그러해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혹은 후련하게 숨겨둔 모든 것을 하나하나 고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버지와 형은 누구인지, 자신의 생과 쌍둥이의 탄생을 둘러싼 비밀들을 전부 편지에 고백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는 마치 쌍둥이가 직접 그 해답을 찾아가길 바란다는 듯 영문 모를 유언만 남기고 떠난다. 쌍둥이가 진실을 통해 느낄 고통은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았던 걸까?
나왈 마르완은 오랜 수감 기간 동안 '노래하는 여자'라고 불렸던 인물이다. 그는 침묵하는 법을 모른다. 처음에는 그저 옆 방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소리를 묻기 위해 부른 노래가, 곧 많은 이들의 귀에 남고 또 맴돌아 저항의 증거가 된다. 마르완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 침묵이 아닌, 시끄러운 발화와 노래의 힘을 믿게 된 사람일 테다. 이 사실을 통해 그의 마음을 조금은 짐작해볼 수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세상, 혹은 이야기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남겨진 자로서 그의 삶이 남겨온 수많은 그을음을 따라 거슬러 올라갈, 진실을 마주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마주한 진실은 다소 괴롭지만 수긍과 용서, 그리고 깊은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밝은 가능성을 지닌다. 우리는 그 사람의 몰랐던, 혹은 외면해왔던 이면을 마주하고 이를 수긍해감으로써 진정한 애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렇게 남은 사랑은 비록 새빨갛고 생기있는 사랑이 아닌, 잿가루를 우수수 떨어트리는 그을린 사랑일 테지만 말이다.
영화를 모두 보고 나면 이 모든 것이 '용서'라는 키워드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아부 타렉의 시점에서 보는 나왈 마르완의 편지는 무거운 용서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쩌면 그는 그 용서의 과정에서 느낀 작은 진심을 쌍둥이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쌍둥이가 부디 자신의 지난 삶의 속속들이를 알며 자신을 용서할 수 있기를, 무지의 천국보다는 괴롭더라도 그을린 사랑을 기꺼이 품고 나아갈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바란 것일지 모른다. 진실의 지옥을 버틸 수 있는 성숙한 인간들이 늘어날 수록, 세상 역시 더욱 성숙해지고, 우리는 더 이상 전쟁이라는 비극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모든 편지에서 전해지듯, 그렇게 더욱 마음의 거리를 좁힌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기 때문이다.
약 15년만에 4K 리마스터링으로 한국 극장을 다시 찾은 <그을린 사랑>은 드뇌 빌뇌브의 팬들에게 후회하지 않을 영화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특히 최근작 <듄> 시리즈를 사랑하는, 나아가 파트 3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이들이라면 그가 거장 감독으로 발돋움한 계기가 되어준 이 작품을 돌아봐도 좋을 것이다. 6월 25일 재개봉 하는 <그을린 사랑>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