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럴 때가 있다. 별생각 없이 발 딛고 있던 세계를 정통으로 맞아버려 낯설고 아득해지는 때가. 대형마트 한복판에서 고개를 들었다가 끝없이 진열된 상품들에 압도됐던 날이 그랬다. 이런 마트가 지역에 몇 개나 있으려나. 서울에는? 한국에는? 옆 나라에는? 지구 반대편에는? 이 모든 상품들은 다 어디서 오는 거지. 그날은 모든 게 새삼스러웠다. 거리에 빼곡히 늘어선 상가, 내리고 내려도 끝나지 않는 알고리즘의 바다. 이 뒤엔 얼마나 거대한 세상이 있는 거지.
내가 쌀 한 톨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이 작은 나는 어디까지 연결될 수 있을까. 얼마큼의 연결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고 자란 시골을 떠나 서울에 8년간 몸을 담고 있다. 그동안 내가 느낀 서울은 한 마디로 유사 연결의 공간이다.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진 않으나 언제든 연결가능한 대상이 즐비한 곳. 사람, 공간, 관념, 감각 어떤 것이든.
그 속에서 ‘연결되어 있음’과 ‘연결될 수 있음’의 차이를 자주 헷갈린다. 당장 손에 잡히는 게 없어도 전부 가진 것 같고, 전부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반대로, 당장 손에 잡히는 게 있어도 가진 것 같지 않다. 신체와 정신의 만성적인 인지 부조화 상태. 사실 현실과 상상이 흐릿한 경계로 이어진다는 감각, 착각할 수 있다는 면죄부는 달콤하다. 지금의 내가 아닌 가능성이 필요한 이들에게 대도시의 혼란은 안락함을 주기 마련이다.
동시에 그 막연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실질적인 만족은 현재 쥘 수 있는 것으로부터 채워지니까. 밥을 먹을 수 있고 간식을 먹고 책과 만화와 영화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여유 시간, 서로를 세심히 관찰하고 해석하는 친구들, 애증의 가족 같은 것에서. 허상과는 헷갈려서는 안 되는 나의 확실한 부분들에서. 그것들을 선명히 기억할 때 막연한 가능성은 말 그대로 막연한 정도만 있어도 괜찮은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은 가까이 놓인 것들을 나의 피부처럼 느끼는 집중이 필요한 때이다.
가위바위보를 변형한 게임으로 ‘하나 빼기’가 있다. 양손으로 가위, 바위, 보 중 두 가지를 만든 다음,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한 손을 내밀어 승부를 내는 규칙이다. 이기기 위해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것. 필승의 비술을 연마하기 위해 모든 걸 내던져 버리는 무인의 모습 같다. 어쩌면 삶과의 전투에서 자주 승리하기 위해선 비움을 단련해야 할지 모른다. 절벽 끝에 내몰린 상태에서도 확실하게 내리꽂을 수 있는 기술은 꼭 필요하니까.
하나씩 빼려고 해본다. 결국 내가 갖지 못할 것들을. 아쉬워하지 않으려고 해본다. 결국 내가 되지 못할 것들을. 왜인지 그 빈자리가 공허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내가 쟁취하지 못한 것을 거머쥔 누군가를 모실 수 있는 자리가 되니까. 손을 맞잡으면 그가 가진 내공이 티끌이라도 흘러 들어올 거란 믿음과 시샘과 존경으로 그들 옆에 서고 싶다. 각자의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을 교환하기를, 홀로는 채우지 못하는 퍼즐판을 완성할 수 있기를 꿈꾸며.
그러므로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비술을 갖고 있는지. 한 수 가르쳐줄 생각이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