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주인공 ‘고영’을 연기한 남윤수는 말했다. *한국에서 이런 드라마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꼭 봐달라고. 앉은 자리에서 모든 회차를 보고 난 후 그의 말엔 추호의 과장이 없었음을 느꼈다. 그래, 이런 이야기의 드라마는 분명 전무후무할 거고 모두가 봐야만 마땅하다.
박상영 작가가 쓴 본명의 원작 「대도시의 사랑법」은 네 단편이 수록된 연작소설이다. 단편마다 세세한 이야기는 다르지만, 모두 ‘영’이라는 게이가 대도시 서울에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말그대로 영의 일대기이고, 드라마도 그 구성을 따라 ‘고영’이라는 퀴어의 삶을 긴 호흡으로 조명한다.
나는 무엇보다 <대도시의 사랑법>만이 보일 수 있는 장르적 독특함에 이끌렸다. 1명의 인물을 각기 다른 에피소드로 10년이라는 시간성 속에 담아낸 작품이 드라마인 동시에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진 것이다. 드라마가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가상을 재현한다면, 다큐멘터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실상을 재현하지 않나. 이것은 각본이지만 섬세한 고증으로 적나라할 정도의 현실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다큐라마’ 정도로 불려야 할 것 같다.
이 생생한 기록이 특히 의미 있는 이유는, 20대 한국 게이의 삶을 집요하게 추적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퀴어 작품은 특정한 시기의 아픔이나 사랑에 집중하고 그것이 떠나간 이후의 서사는 공백으로 남긴다. 찰나의 거대한 사건보단, 그 뒤로 이어지는 지난한 시간들이 삶에 가깝다고 믿는 나는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드문드문한 점이 아닌 선형적인 선으로 그린 퀴어의 초상화에 갈증을 느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결코 고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오랜 관찰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삶의 비하인드를 낱낱이 증언한다. 남자와의 사랑이 전부인 것 같은 그의 뒤엔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품어준 미애, 동성애를 부정하는 엄마를 향한 애증, 어떤 상황이든 곁을 떠나지 않는 ‘티아라’ 친구들, 몸속의 카일리, 주기적인 섹스, 글을 쓰고 싶은 욕망, 술에 대한 집착, 세상에 대한 회의, 사랑을 향한 갈망, 발랄함, 공허함도 있었다.
고영은 그 모든 것들의 합으로써 존재했고, 여러 욕망이 잔뜩 뒤엉킨 채 자신조차 모르는 목적지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랑하고, 실패하고, 환호하고, 절망하고, 낙관하고, 무력하기를 반복하면서. 이때 게이라는 정체성은 고영의 삶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맺는다. 그에게 게이라는 건 축복이면서 저주다.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최고의 슬픔 모두 그가 게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고영이라는 서사를 거치며 퀴어는 결코 단편적으로 논할 수 없는 풍부한 의미의 정체성으로 다가온다.
고영의 이면(혹은 삶 그 자체)을 알아갈수록 그는 퀴어인 동시에 보편의 인간으로 읽힌다. 그의 모습은... 외로운 도시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안쓰러운 영혼으로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영은 보통의 인간을 대변하게 된다. 저마다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살아가기 위해 애써 사랑을 좇아야 하는 것만이 인간의 본질이니까.
그런 고영을 보면서 나는 지금껏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모든 감정들이 뭉쳐진 이상한 표정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불쌍해지면서도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사랑을 믿게 되어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반복되는 불행 속에서, 벗어났는가 하면 실은 제자리인 불운 속에서 길을 헤맨다. 그럴 때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고영 역시 삶이란 늪 한 가운데에 갇힌 것과 같다는 걸 안다. 사랑만이 유일한 동아줄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기에 그것은 너무나 연약한 실체라는 것도 안다. 사랑은 신뢰할 수 없으면서 신뢰해야만 하는 구원.
바보 같단 걸 알면서도 고영은 매번 모순적인 구원을 믿는다. 사랑의 절망으로 공허한 밤을 버티고 일어나 또 다시 어떤 사랑을 찾는다. 언제나 처음인 듯,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것이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고영의 사랑법이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생존법이다. 낮고 원초적으로 보이는 그의 삶에 불가피하게 끌리는 이유다. 어쩌면 이 도시의 불빛은 위태롭게 사랑을 찾아 떠다니는 반딧불이들의 구조신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모든 삶의 역사이자 예언 같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계시. 너무나 정확한 미래를 보게 된 탓일까. 나는 도리어 막연해졌다. 다만 고영이 사랑을 좇는 것만은 멈추지 않을 것 같아서, 나 역시 그러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 그처럼 살고 싶다. 망설이지 않고 사랑에 뛰어드는 그처럼 살고 싶다. 꼬박 그렇게 살고 싶다. 나의 과거이자 미래인 이 이야기를 두고두고 꺼내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왜인지 이 도시가 애틋해졌다.
여담으로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을 탄생시킨 박상영 작가와 감독들, 배우들께 직접적인 감사를 드린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겪었고, 내 안의 무언가가 명확해졌다. 아직은 형언할 수 없는 이 감각들이 많은 고비에서 나를 살려줄 것이란 확신이 든다. 순수하고 당당한 고영을 만들어 준 남윤수 배우에게 특히 애정을 전한다. 지금의 용기는 그런 고영을 목격했기에 가능했다. 자신이 만드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온 영혼을 실어 사랑을 외친 당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
* 얼루어 코리아, ‘대도시의 사랑법 – 남윤수 & 권혁’의 남윤수 인터뷰 中
** 모든 사진의 출처는 주식회사 메리크리스마스의 공식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