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찾아온다. 어쩌면 인간이 고독으로 향한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기쁨이나 슬픔처럼 한순간의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리 없이 인간의 몸에 있다 여름철이나 겨울철에 더욱 심해지는 아토피처럼 이유 없이 발현되곤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독한 순간에 머무른다. 홀로 세상에 왔다 홀로 간다는 말처럼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나’로 시작해 ‘나’로 끝나기 때문일까.
편혜영의 <서쪽 숲에 갔다>는 거대한 숲을 관리하는 ‘박인수’에게 실종된 형이자 박인수의 전임자였던 ‘이경인’을 찾는 ‘이하인’이 찾아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형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하인이지만 그에게 경계심을 보이는 마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나 볼수록 의구심은 커져만 갔고 마을을 대표하는 ‘진선생’을 만난 후에는 불길한 예감이 그를 사로잡는다. 외지인 이하인의 등장으로 과거 벌목꾼으로 일하던 마을 사람들과 숲 관리자를 맡은지 4개월 밖에 되지 않은 박인수 또한 흔들리기 시작하고, 숨겨져있던 마을의 진상과 영원히 도망칠 수 없는 이들의 과거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지독한 과거로부터의 도피
주민 수 보다 숲속 나무가 더 많은 마을에는 떠나온 사람들이 가득하다.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스스로에게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몰락해가는 과거로부터, 잊고 싶으나 곁에 둘 수밖에 없는 기억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검은 숲으로 둘러 쌓인 마을로 모두가 흘러 들어왔다. 때문에 이 마을은 여느 곳처럼 평범한 마을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저마다 말하지 못한 과거를 품고 있고, 그 과거를 잊기 위해 새로운 장소와 사람, 때로는 무언가에 대한 강렬한 의존을 택한다. 이들의 이동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모험기가 아닌, 달아나는 도피에 가까워 보인다.
이 소설에서 반복되는 중독과 집착 역시 도피의 한 형태처럼 읽힌다. ‘박인수’는 시작이 어찌 됐든 간에 이제는 마시는데 이유를 찾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알코올중독이었고, 마을 사람들과 그들을 보살피는 ‘진선생’은 마치 어미 새와 새끼들처럼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향해 집착한다. 마을 사람들 입장에선 외지인으로 볼 수 있는 ‘이하인’ 또한 실종된 형을 혐오하는 자신의 마음과 달리 마음 한편에 자리한 죄책감에 이상할 정도로 마을 수색에 집착하며, 박인수의 아내인 ‘모유진’은 반복되는 남편의 주정에도 박인수가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이 무서운 것은 한순간에 사람을 집어삼키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은 여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동안 조금씩 고요하게 삶의 영역을 내어주게 만든다. 그렇게 끌려가다 보면 어디서부터 이 악몽이 시작된 건지, 어디까지가 자신의 의지이고 습관인 건지 경계가 점점 흐려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극도로 불안정해지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속에서 평온을 찾았다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모습이 세상에서 잊혀가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때문에 과거를 버리려 할수록 오히려 그것에 함몰되어 버린다. 잊으려 할수록 더욱 강하게 사로잡히고, 도피는 좀처럼 이뤄지지 못한다.
의심으로 다져지는 관계들과 스스로를 향한 의심
각자가 비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위안을 발견했다면 마을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이 마을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 사회가 존재한다. 한때는 정부의 지원을 두둑이 받던 산림 연구소와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 연구소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며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 그리고 벌목이 금지되기 전 숲에서 나무를 베던 벌목꾼들.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각자의 일에 임하며 서로를 살리기 위한 경제 순환 구도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이들의 관계는 연구소가 지원을 받지 않게 되면서 틀어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욱 견고해졌다. 연구소와 마을, 그리고 벌목꾼들을 잇는 ‘진선생’의 비밀스러운 일로 보이지 않던 계급의 구도는 점차 선명해져갔다. 비밀스러운 일 때문에 ‘숲의 관리자’가 생겨났다. 연구소의 소멸과 함께 마을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가는 바람에 생긴 가장 하층 구조의 관리자를 외지인을 데려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들은 꽤 괜찮은 조건으로 그들을 유인하여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길들였다.
“형이 그랬거든요. 숲에서 부엉이가 울고 나무들이 달려든다고요”
일반적으로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을 ‘신뢰’라고 한다면, 이 마을 속 외지인과 마을 사람들의 관계는 오히려 의심으로 다져진다. 자신이 도망친 마을을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지키려는 사람들은 진실을 감추기 위해 애썼고, 그 실체 없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끊임없이 상대를 바라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가 된다. 이해하기 위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기 때문에 관찰하고, 관찰할수록 더 많은 의심을 발견한다. 그렇게 의심은 사람들을 밀어내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묶어놓는 장치가 된다.
“진 선생과 나눈 대화에서 그가 알게 된 점은 하나의 진실이 있으면 어디에든 또 다른 진실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알아야 하는 진실에는 끝이 없었다.”
의심으로 인해 쌓인 성벽은 점차 스스로를 고립 시키게 된다. 타인에게 향하던 신뢰 없는 화살은 스스로에게 돌아오고 만다. 중독 역시 이 틈을 파고든다.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온전히 가지지 못한 채 스스로에 대한 믿음마저 잃어가며 의심하던 자들은 스스로 자멸하기 시작한다.
숲으로 향하는 자, 고립인가 자유인가
“이 숲은 미로처럼 구불구불합니다. 성경에 새겨진 글자처럼 촘촘하게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요. 어디를 봐도 나무뿐입니다.”
<서쪽 숲에 갔다> 속 ’숲‘은 푸르고 울창한 아름다운 세계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촘촘하게 매워진 녹음들은 멀리서 보면 인간을 잠식시킬 것만 같은 ’검은 숲‘으로 묘사되어 있고, 숲의 관리자들은 부엉이인지 귀신인지 모를 소름 돋는 소리가 숲에서 들려온다 했다. 하물며 숲의 길이라면 훤히 알 것 같은 벌목꾼들조차도 숲속에서 길을 잃자 자신들을 찾아낸 진 선생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울고 말았다 하니 이 마을의 숲은 마을을 먹여 살리는 공동체 같다가도 세상으로부터 단절되는 미지의 공간으로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때문에 숲으로 사라진다는 말은 묘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누군가에게 사라진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잃는 일이지만, 사라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속박되어 있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은 한순간에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도망쳤고, 무언가에 중독되었고, 타인을 의심하다 자기 자신까지 의심하며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마치 해가 서쪽으로 천천히 기울듯 선명히 보이던 자신이었던 것으로부터 멀어지며 서서히 서쪽을 향해 어둠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숲에서 보려는 것, 봐야 할 것, 보게 될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알 수 없어 두렵고 단지 그것을 목격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을 듯하여 겁이 났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 일이 인생을 허비하게 만들지라도.”
끝내 의심하던 깊은 숲으로 향한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붙잡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것일까. 작가는 마지막까지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그래서 숲은 끝까지 숲으로 남는다. 누군가에게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고립의 공간이고, 누군가에게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마지막 장소일지도 모른다.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는 결말은 끝내 무엇이 진실인지 말해주지 않은 채 독자들마저 숲속에 남겨둔다. 지독하게 엮여있는 마을의 사슬이, 해악 한 걸 알면서도 떨쳐내지 못하는 연약한 마음이 내면 깊숙이 숨겨져있던 고독함을 느끼게 한다. 속절없이 빠져들고야 마는 이야기의 끝에서 진 선생이 말한 또 다른 진실을 찾아 나 또한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음을 깨닫는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서쪽처럼, 진실과 믿음 사이을 끊임없이 헤매는 우리의 걸음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