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어둠 속에서 자고 있는 새벽 5시 반에 나는 이 글을 쓴다.
추석. 가진 형편 내에서 최고로 잘 챙겨 먹어야 하는 민족 대명절.
나는 추석 첫째 날에 본가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배가 주려 식당에 들릴까 했지만, 어머니는 집에 음식이 많다고 하셨고 그 말씀은 맞았다. 나는 전과 오징어젓갈 그리고 고사리 나물을 입에 우겨넣으며 “이 맛이 그리웠다”고 연신 되뇌었다. 사실 그 것들은 모두 반찬 가게에서 산 것이었지만.
오후에 낮잠을 잤던가? 나는 첫 날 최대한 “착한 아이”를 연기했다.
직장도 잘 다니구요, 규칙적으로 운동해서 살도 많이 빠졌어요. 집밥도 해 먹고, 오기 전에 자취방 청소도 싹 하구, 가계부도 쓰구요.
저녁엔 갈비찜을 내가 만들었다. 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양념 된 물을 재차 빼내자 엄마가 뭐라고 잔소리하셨다. 아깝다고. 나는 죄송하다고 연신 말씀드리다가 결국 짜증이 나서 “양념 몇천 원짜리가 귀하냐, 첫째 딸이 귀하냐”라고 질러버렸다. 어머니는 결국 갈비가 맛이 좋다고 하셨다. 동생들과 재료를 아끼지 않은 갈비찜을 몇 대씩 먹었다. 어머니는 밥을 세 공기 드시고.
술도 없이 잠들었다.
둘째 날. 성묘에 가야 했다. 아버지와 나 둘만 가기로 했다.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의 묘 앞에서 기도했다. 누구의 눈물일지 모르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외가에 갔다.
본디 나는 충청도 사람인데, 특히 외가댁은 인삼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일흔이 넘으신 외할아버지는 오전에 땅벌에 열대는 족히 쏘였다고 하셨다. 효자인 우리 아버지는 장인어른을 모시고 바로 응급실로 갔다. 대기 시간 동안은 누룽지 삼계탕을 먹었다. 할아버지들과 셀카를 찍었다.
아흔여덟 세인 증조할아버지는 우리 넷 중에서 삼계탕을 가장 빠르게 또 많이 드셨다. 나는 김치를 세 번 리필해왔다. 돌아오는 길 증조할아버지는 요즘 자꾸만 숨이 찬다며 늙었다고 하셨지만, 그의 아들인 할아버지는 태연히 “그럼 늙으면 숨이 차쥬, 지금 목소리 크기 들으니 백 살 까지 사시겠구만.” 이렇게 답하셨다. 충청도였다.
아빠와 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빠는 헤어지기 전 외할아버지의 등 자락을 걷어 벌레 물린데 바르는 약을 콕콕 찍어 발라 주셨다.
직접 짠 들기름을 받아오면서 외할머니의 묘소까지 걸어갔는데 가시나무가 너무 많아 묘 앞까지 가지 못했다. 우린 지척에서 기도했다. 아빠는 엄마와 나의 이름을 기도 중에 부르셨다.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돌아오면서 우리는 힙합과 팝송을 번갈아 들으며 엄마 뒷담화도 하고, 내 얘기도 하고 아빠와 동생들 얘기도 했다. 수삼 시장에 들려 인삼주 작은 병들을 사고, 인삼정과도 사고, 인삼 막걸리도 한 병. 엄마 몸살약도.
집에 돌아와 내가 새콤달콤한 비빔국수를 간단히 말아 가족들과 먹었다. 외할아버지에게 받은 들기름과 깻순을 넣었더니 아주 맛있었다. 인삼 막걸리를 마시며 내가 좋아하는 미국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아빠는 물으셨다.
한별아, 너 저거 다 알아듣냐?
그럼요 아빠.
인삼 술을 마시고 칵 잠든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났고 거실에서 나와 함께 주무시던 엄마도 깨어나셨다. 우리는 신의 광휘와 감사함,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짧게 나눴다. 새벽에 공부하러 일어나신 아빠와 국화차를 나눠마시고, 계란을 삶아 먹고, 커피를 한 잔 타서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아침 6시. 시퍼런 새벽빛이 좁지만 완벽한 거실을 감싼다.
추석.
취업과 가족과 정체성과 유교문화의 예절이라는 것 안에서 흔들리는, 그 와중에 배가 부르거나 너무나 배가 고픈 명절. 나는 나의 핏줄을 생각했다. 정확히는 나를 아주 오랫동안 사랑해 온 사람들의 따뜻하고 거친, 농사로 부르튼 손바닥의 온도를 생각했다. 한별아, 하고 고요히 나를 부르던 당신의 음성을.
오늘은 조기를 구워 먹고. 오후에는 낮잠을 자려나.
일요일에는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난 다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