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부재 앞에서, 그 사람의 가장 생생하고도 유일하게 남은 흔적이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까? 트라우마 속에서 고통받을지라도 나에게는 그것을 극복할 힘이 없을 것만 같다. 정신분석학에서 우울은 애착의 대상과의 분리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미 상실한 대상을 마음속에서도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저히 놓아줄 수 없는 것이다. 연극 《다시 쓰는 세계》는 엄마의 지독하고도 깊은 흔적 속에서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되고, 농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사회에서도 소외되는 유림의 삶을 따라간다. 그리고 엄마가 없는 세계를 다시 써 내려가는 그녀의 과정을 그려낸다.
유림은 농인 여성으로, 엄마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홀로 살아간다. 연극은 내면의 존재, 타인, 동료, 이웃이라는 네 가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유림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해 보여준다. 단편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기보다 파편적으로 흩어진 기억과 현재의 장면을 겹쳐 놓음으로써 한 인간의 삶에 내재한 다층적인 감정과 상황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유림이 겪는 독립의 과정은 단순히 부모로부터 벗어나는 성장담에 머무르지 않는다. 엄마와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동시에 농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경험하는 소외와 편견에 맞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유림은 사람에게 상처받기도 하지만, 다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위로받는다. 작품은 그렇게 상처와 위로가 교차하는 관계의 모습을 더듬으며 우리가 점차 잊어가는 연대의 의미를 되짚는다.
상실한 사람을 향한 환상은 그 존재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인간은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소망을 무의식 속에서 반복하고, 때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 그 대상을 다시 불러낸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유림에게 엄마와 아빠의 기억이 생생한 환상으로 나타나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엄마가 현재의 삶에 불쑥 나타나는 일은 유림이 엄마를 떠나보내지 못하게 하며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존재를 환상 속에서나마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은 유림에게 위안이 되기도 한다. 환상은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굴레인 동시에, 상실한 존재와의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가려는 마음의 표현인 셈이다.
그러나 유림의 기억 속에 남은 엄마는 그리움의 대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농인으로 살아가는 유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의 언어와 감정을 온전히 나누지 못했던 시간들이 엄마와의 기억을 채우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소통을 포기하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유림은 기억 속의 엄마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과거의 망령과도 같은 엄마를 현재의 삶에 불러들인다.
하지만 동료와 이웃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크고 작은 위로를 경험하면서 유림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긴다. 엄마의 환상을 현실에 존재하는 엄마처럼 대하는 대신,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기억이자 감정임을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엄마와의 기억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되풀이해 불러내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결국 엄마를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하는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다.
마침내 유림은 엄마를 향해 ‘보고 싶다’고 발화한다. 어쩌면 이 짧은 말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끝내 전하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이 응축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엄마를 향한 원망과 상처, 이해받지 못했던 시간과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리움까지. 그 모든 감정을 비로소 자신의 언어로 인정하는 순간, 유림은 엄마의 기억에 갇혀 있던 자신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난다. 엄마를 잊거나 그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부재한다는 사실과 자신이 여전히 엄마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함께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상실은 더 이상 현재의 삶을 잠식하는 환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 안에 자리 잡은 하나의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된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마음에 바람 하나 걸어두는 거래.
언제 또 불어올지 모르는 날카롭고 아픈 바람 말이야.
부재한 사람의 흔적에서 비롯된 상처는 단순히 다른 흔적으로 대체되거나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관계와 경험이 그 흔적 주변에 겹겹이 쌓이면서, 상실의 기억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게 된다. 유림에게 타인과의 연대는 엄마를 대신할 누군가를 찾는 일이 아니었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채워지지 못했던 감정과 이해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경험하고, 그제야 엄마와 자신을 분리해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의 부재를 견디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일도,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는 일도 아닐 것이다. 그 부재를 끌어안은 채 새로운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써 내려가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인간적인 연대에는 정체성의 구분이 필요하지 않다. 물론 유림이 농인 여성으로서 겪는 소외와 차별은 결코 개인적인 노력이나 관계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작품은 서로 다른 조건과 언어를 지닌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다가가고 서로의 흔적을 남기는 일은 계속될 수 있다. 엄마의 부재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다시 써 내려가는 유림의 모습은 결국 상실 이후에도 삶이 계속될 수 있는 이유를 보여준다. 어쩌면 세계를 다시 쓴다는 것은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흔적을 끌어안은 채 그 위에 새로운 관계와 시간을 덧붙여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