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브릿팝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오아시스와 블러의 시대가 저물 무렵, 영국 록 음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브릿팝 특유의 거친 반항과 과시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보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섬세한 감성을 앞세운 ‘포스트 브릿팝’이 등장한 것이다.
포스트 브릿팝은 1990년대 록 음악의 열기를 이어받아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추구하며 영국 록의 마지막 황금기를 장식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록 음악의 대중적 영향력이 점차 약해지고 새로운 음악 장르들이 주류 시장을 장악하면서, 록은 더 이상 시대의 중심에 서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 브릿팝은 록 음악이 주류 대중음악의 한가운데에서 마지막으로 빛났던 시절이자, 록 팬들에게는 한 시대의 영광을 간직한 마지막 자부심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마지막 황금기를 대표하는 밴드가 있다. 바로, ‘트래비스 (Travis)’이다.
1997년 1집 ‘Good Feeling’을 발표한 트래비스는 브릿팝의 열기가 이어지던 영국 음악계에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오아시스의 서포트 밴드로 무대에 오르며 경험을 쌓았고, 이듬해 브릿 어워즈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Travis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트래비스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1999년 발표한 두 번째 앨범 ‘The Man Who’부터였다. 발매 직후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수록곡들이 입소문을 타며 점차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의 대표적인 음악 페스티벌인 글래스톤베리에서 펼쳐진 공연은 밴드의 운명을 바꾼 순간으로 회자된다.
수록곡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를 부르기 시작하자 실제로 비가 쏟아졌고, 이 우연한 상황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공연 이후 밴드의 인지도는 급격히 상승했고, 해당 곡 역시 트래비스를 대표하는 곡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Travis 'Writing To Reach You'
여기에 오아시스의 대표곡 ‘Wonderwall’을 연상시키는 코드 진행을 활용한 ‘Writing to Reach You’, 섬세한 감성과 강렬한 후렴이 돋보이는 ‘Turn’까지, 트래비스는 서정적인 멜로디를 앞세운 자신들만의 음악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성과는 마침내 브릿 어워즈 최우수 밴드상과 최우수 앨범상 수상으로 이어졌고, 2집 ‘The Man Who’는 트래비스를 당대 영국 록의 중심에 올려놓은 작품이 되었다.
‘The Man Who’의 성공으로 트래비스는 탄탄대로를 걸으며 세계적인 록 스타로 거듭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히트곡을 보유하고도 정작 거리에서 밴드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2001년 발표한 세 번째 앨범 ‘The Invisivle Band’라는 제목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여전히 대중의 시선에서 투명 인간처럼 존재하는 밴드의 처지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이다.
Travis 'Re-Offender'
이후 2003년 발표한 네 번째 앨범 ’12 Memories’에서는 한층 더 내밀하고 어두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는 히트곡을 만드는 대신, 자신들이 진정으로 들려주고 싶은 내면의 이야기를 음악에 담아낸 것이다. 앨범 전반에는 불안과 상처, 관계의 균열에서 비롯된 우울한 정서가 짙게 배어 있으며, 대표곡 ‘Re-Offender’는 프론트맨 프란 힐리가 직접 겪은 가정 폭력과 관련된 가정사를 기반으로 만들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07년, 트래비스는 4년간의 공백을 깨고 다섯 번째 정규 앨범 ‘The Boy With No Name’을 발표한다. 전작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트래비스 특유의 따뜻하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되살린 작품이었다. 앨범의 첫 싱글 ‘Closer’는 부드러운 기타 사운드와 중독성 있는 후렴구가 어우러진 곡으로, 오랜 기다림 끝에 돌아온 밴드의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Travis 'Closer'
특히 트래비스는 한국 팬들과의 특별한 추억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내한 공연에서 ‘Closer’와 함께 팬들이 무대 위로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내는 이벤트를 펼쳤고, 이는 밴드와 관객이 음악으로 교감하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트래비스의 서정적인 음악과 한국 팬들의 진심 어린 애정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트래비스는 자신들만의 음악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리고 얼마 전인 2024년, 열 번째 정규 앨범 ‘L.A. Times’를 발표하며 다시 한번 건재함을 증명했다. 프론트맨 프란 힐리는 이번 앨범을 두고 그들의 최전성기였던 1999년 ‘The Man Who’ 이후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라고 소개했으며, 삶의 변화와 그 속에서 마주한 감정들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Travis 'Gaslight'
앨범은 영국 앨범 차트 4위로 데뷔하며 발매 당시 기준 25년여 전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평단에서도 오랜 시간 자신들의 색깔을 지켜온 밴드의 저력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브릿팝의 화려한 전성기에서 출발해 포스트 브릿팝의 황금기를 장식했던 트래비스. 이들은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 거대한 록 스타가 되기보다는, 자신들만의 서정적인 멜로디와 진솔한 이야기로 오랫동안 음악을 이어왔다. 비록 록 음악이 대중음악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밴드의 이름이 예전만큼 자주 언급되지 않게 되었지만, 트래비스의 곡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에 남아 그 시절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