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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파편과 파편 사이, 서로에게 가닿는 가능성 [미술/전시]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를 통해 바라본 예술의 개념과 감각, 그리고 이해의 조건

by 서연화 에디터
2026.10.1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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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미술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더 이상 직관적인 이해만으로 작품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눈앞에 놓인 물리적 실체는 그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읽어야’ 한다. 현대미술 전시에서는 작품 앞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 작품에 관한 설명을 읽으며 사유하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한다.

       

      현대미술은 더 이상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에 가까워졌다. 그 출발점에 개념미술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동시대미술의 상당 부분은 개념미술이 제기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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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념미술은 작품의 외형이나 물질적 결과보다 작가의 아이디어와 개념을 중시하는 미술이다. 말 그대로 물질적 실체 자체보다 그 실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개념에 무게를 둔다. 오랜 시간 예술, 특히 모더니즘 예술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예술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시각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개념미술은 이러한 시각 중심적 접근에서 벗어나 언어와 개념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이는 예술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예술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언어를 호출한 개념미술은 예술의 범위를 확장하는 동시에 예술의 존재 조건 자체를 다시 묻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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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한국 현대미술의 개념적 전환을 재조명한다. 특히 언어를 중심으로 한 담론의 형성과 더불어, 기존의 미술 개념을 재검토하려 했던 다양한 시도들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여러 실험은 하나의 양식이나 범주로 간단히 환원되지 않는다. 전시 제목에 괄호로 삽입된 ‘(아니)’ 역시 이러한 다층성을 드러낸다. 어떤 작품은 개념미술로 규정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범주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을 수도 있다. 개념미술이라는 명칭을 확정하기보다 그 경계를 흔들고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둔다는 점에서, 전시의 제목 자체도 개념미술의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듯하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은 이건용의 <장소의 논리>와 성능경의 <수축과 팽창>이었다. 개인적으로도 흥미롭게 생각해 온 이건용의 ’이벤트 로지컬(Event-Logical)’을 비롯해 Space and Time 조형미술학회(ST) 작가들의 작업은 언어를 문자나 텍스트의 차원에 한정하지 않는다. 이들의 작품에서 신체는 사전에 설정된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반복하며 하나의 사건을 구성한다. 여기서 행위는 일상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논리적 구조를 형성하고 의미를 생성하는 사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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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는 개념을 단순히 표현하는 도구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논리를 생성하고 전달하는 매체로 기능한다. 작가들은 일상성과 목적성으로부터 분리된 신체 행위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신체의 움직임과 공간의 관계를 낯설게 만들고, 그 안에서 세계를 새롭게 인식할 가능성을 탐색한다.

       

      반면 코디최의 <스캠프스, 스크램을 위한 모델링>에서는 논리적 구조를 통해 신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앞선 작품들과 접점을 이루면서도, 그 구조가 불러일으키는 의미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이 작품은 분절된 상자 속에 신체의 일부를 일정 시간 넣어 두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신체를 분리하고, 그 부분들을 서로 다른 위치에 배치한다. 이러한 반복적 행위는 신체를 하나의 통일된 전체가 아니라 분리되고 재배치될 수 있는 단위로 바라보게 한다.

       

      작가는 이 분절된 신체의 모습에서 디아스포라적 경험과 분열된 정체성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상자에 놓인 신체의 각 부분은 여전히 하나의 몸을 이루는 일부이지만, 동시에 더 이상 온전한 나의 일부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신체의 일부가 나에게 속해 있으면서도 낯선 것으로 경험되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을 확인하는 문제가 아니라 분리된 부분들이 어떻게 관계 맺고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가라는 문제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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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다른 신체 부위가 각기 다른 위치에 놓이고,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신체는 하나의 기호 체계처럼 기능한다. 신체의 분절과 재배치는 익숙했던 신체의 통일성을 해체하고,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획득한 부분들을 다시 모으면 온전한 ‘나’가 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 에너지를 하나로 모은다고 해서 분열된 자아가 다시 하나의 존재로 통합될 수 있을까?

       

      작품은 이러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보다, 하나의 존재를 구성한다고 믿었던 요소들이 과연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ST 학회 작가들과 코디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신체와 논리의 관계를 탐구하지만, 익숙한 사유의 틀을 낯설게 만들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관계를 재검토하게 한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작품은 박현기의 <무제>였다. 1983년 전시 당시 작가는 ’I am Not a Stone(나는 돌이 아니다)’이라는 문구와 가슴과 배에 ’stone and so forth(돌과 그 외의 것)’이라는 문구를 적은 채 돌 사이를 걸어 다녔다. 작품을 보며 늑대 무리 속에서 자란 인간이 늑대도 인간도 아닌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떠올랐다.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외톨이이자 이방인, 아웃사이더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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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돌뿐인 환경 속에서 돌처럼 웅크려 앉거나 돌을 들어 올린다고 해도 돌은 인간이 될 수 없고, 인간 역시 돌이 될 수 없다. 마이크를 돌 사이에 놓고 돌에 헤드폰을 씌운다고 해도 인간의 언어가 돌에게 전달되거나 돌의 언어를 인간이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마련한 장치가 오히려 둘 사이의 간극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듯했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돌을 인간의 언어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제시함으로써 언어를 인간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게 하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바깥의 세계를 사유하게 만드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마주한 나에게는 그와 동시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이 세계가 나에게 주어진 전부라면, 돌이 아닌 나는 이곳에서 홀로 다른 무엇으로 존재할 용기를 갖고 있는가? 돌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은 결국 내가 속할 수 있는 세계와 그렇지 못한 세계의 경계를 묻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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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이 의도한 의미와 별개로, 관람객은 자신의 경험과 감각을 통해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작품의 의미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이 하나의 정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석은 작가의 의도를 넘어 관람객의 사유 속에서 계속해서 생성되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이번 전시를 통해 살펴본 20세기 후반 한국 작가들의 시도는 언어뿐 아니라 일상적 사유 속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신체와 사물, 측정과 기호, 제도와 권위의 논리를 재검토하고 뒤집으려는 실험이었다. 이들은 익숙한 대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고, 기존의 범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를 드러내며,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이 시도해 온 다양한 실험의 결과를 한자리에 펼쳐 보이는 하나의 실험실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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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내게 남은 것은 개념미술이 열어 놓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감탄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술이 개념과 논리를 통해 확장될수록, 그것이 관람객에게 어떤 감각과 감정으로 전달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욱 선명해졌다. 고도로 발전된 추상은 어쩌면 가장 구체적인 구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추상이란 결국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붙잡을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교한 개념과 논리를 구축하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전달되고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예술은 그저 이해해야 할 대상으로 남을 수 있다. 그렇기에 현대 예술가에게 주어진 과제는 추상적인 개념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인 경험으로 전환해 타인과 공유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데 있을 것이다.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파편화’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세계와 자아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이해하기 어려워진 사회에서 예술 역시 분열과 해체, 이질적인 요소들의 공존을 통해 현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파편화된 세계를 표현하는 일이 반드시 파편화된 형식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 다른 조각들이 하나의 완결된 전체로 통합되지 않더라도, 그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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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개념미술이 내게 던진 질문은 예술이 무엇인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서로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현대미술은 더 이상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읽고 해석하는 행위만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개념을 이해하는 일과 작품을 감각하고 경험하는 일,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일과 정서적으로 연결되는 일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어쩌면 현대미술의 난해함은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이해가 감각과 감정으로 이어지지 못할 때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현대미술에서 찾고 싶은 것은 모든 파편을 하나로 봉합하는 완결된 답이 아니라, 서로 다른 파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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