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루함에 대하여: 피곤하게 지루하기 [사람]

글 입력 2023.04.10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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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일 동안 출근을 하고, 주말 이틀 동안은 글을 쓴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밥을 챙겨 먹고, 좋아서 읽는 책과 읽어야 하는 책과 글을 쓰기 위한 책을 골라 쌓아둔다. 다음 주에는 무엇에 대한 글을 쓸까 고민하며 도서관에 가기도 하고, 글 주제에 대한 생각이 나지 않으면 미뤄둔 채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언제나 성공하지는 못한다. 퇴근 후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다시 일으키기란 허기진 배조차도 성공하기 너무 어려운 일이다.

 

이따금 간신히 옷만 갈아입은 채로 침대에 누운 채 유튜브에 들어간다. 1초간의 머뭇거림은 미래의 내 모습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지만, 결국 나의 손가락은 쇼츠를 눌러버리고야 만다. 곧 눈이 감겨도 무방한 몸으로 할 일이 남아있는 나는 반쯤 뜬 눈으로 1분도 되지 않는 쇼츠를 몇 시간 동안 넘긴다. 2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리고 상체를 일으키지만, 몸은 더 피곤하고 뇌는 나보다 먼저 잠에 든다. 매번 차라리 핸드폰을 할 시간에 잠깐 자고 일어날걸 후회하지만 왜인지 저녁에 잠깐 잠드는 일은 너무 어렵다. 퇴근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10분 정도의 시간이 너무나도 지루하다. 그 잠깐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나는 언제나 그 지루함을 거부하기 위한 2시간을 지불하고 더욱더 피곤한 몸을 얻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왜 나는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겪는 10분의 시간 동안 지루해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SNS를 몇 시간동안 해내고야 마는 역설적 행위의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고쿠분 고이치로는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2014, 한권의책)에서 ‘한가함’과 ‘지루함’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의 차이에 주목한다. 유목 생활을 하던 인류가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유목 생활에서 필요한 인지적 능력의 잉여가 지루함을 나았고 이는 인류의 문화예술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정착혁명은 한가함이라는 객관적인 조건을 인간에게 부여했고, 그 결과 인간은 지루함이라는 주관적인 상태에 빠졌다.”(93쪽)

 

한가한 자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해 좋아하는 일, 재미있는 일을 찾으려고 하지만 사실 인간은 ‘좋아하는 일’만을 찾지 않는다. 우리가 지루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취하는 방식은 쾌락이 아니라 자극이다. 이 자극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좋거나 좋지 않을 수 있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인 철학자 레오 슈트라우스는 유럽에서 이륙한 근대의 이성 혁명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젊은 세대들에게 이성의 당위성을 증명해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동시에 부흥하던 공산주의 혁명이 ‘모두가 평등함’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며 갈등을 지우고 평화 자체를 주창하며 세력을 모았고, 젊은 세대들이 느끼는 ‘자신의 사명감을 불태울 목표가 상실되며 얻어진 지루함’이 히틀러, 무솔리니와 같은 파시즘의 발현을 가능하게 했다고 해석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쉽게 ‘지루함을 피하려고 선택하는 취미’는 어떨까?

 

고전 경제학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에서 적절한 가격이 형성된다는 수요-공급 곡선으로 기본적인 경제학의 토대를 설명했다. 그러나 현대에서 소비자의 수요보다 우선하는 것은 생산자의 공급이다. 그러나 생산자들은 재화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들은 욕구를 생산하며 재화의 자리를 관념으로 바꿔치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루함의 해소를 위해 끊임없이 재화를 소비하지만 만족은 없다. 우리는 ‘소비’라는 관념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지루함을 해결할 수 있냐는 질문에, 고이치로는 ‘동물 되기’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동물은 인식할 수 있는 세계가 제한적이며 그 세계 속에서만 살아간다. 그에 반해 인간은 세계 자체를 받아들이며, 새로운 환경세계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하나의 환경세계에서만 살아가는 인간은 금세 지루함에 빠지게 된다. 인간은 살아가며 자신의 세계에 금을 내거나 압도하는 ‘불법 침입’을 자주 겪게 되는데, 이때 인간은 자신의 익숙한 세계를 변형하며 새로운 세계를 형성한다. “충동에 의해 ‘붙잡혀’ 하나의 환경세계에 빠져버리는 상황에 숙달된 존재를 동물이라고 한다면, 이 상태를 ‘동물 되기’로 칭할 수 있다”(305쪽)

 

자신의 세계에 큰 충격을 가하는 새로운 침입을 받아들여, 즉 압도되어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 인간임을 즐기는 것임과 동시에 동물 되기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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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 인간,

피곤한 인간은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


 

앞서 꺼낸 나의 사례를 다시 떠올려본다. 퇴근 후에 할 일이 남아 있는 나는 한가함을 즐길 수 없는 노동자이다. 누릴 수 있는 휴식을 취하려고 하지만 나는 한가한 대신 지루해진다.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압박감과 죄책감으로 인한 회피행동일지 모르지만 잠깐 눈을 붙이려고 누운 나는 그 잠시의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SNS를 킨다. 결국 할 일도,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는 나는 어제보다 더 피곤한 눈으로 다음날 출근을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취미를 물었을 때, ‘졸린 눈으로 유튜브의 쇼츠를 봅니다’라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로 ‘유튜브의 쇼츠’를 택한 적이 없다. 그것은 이미 수요 없는 내 앞에 놓인 이미 공급된 재화이고 나는 내가 그것을 선택했다고 착각한다. 끊기지 않는 쇼츠를 무한히 내린다고 해서 지루함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 쇼츠의 영상들은 나의 익숙한 세계에 금을 내지 못한다. 불법 침입하지 못한다. 자기 파괴적인 자극으로는 지루함을 해소할 수 없다. 그러한 자극적인 짧은 영상은 내게 압도당할 순간도, 그러므로 나의 세계를 쏟아부을 계기도 제시하지 못한다. 


제발 그냥 자면 안 돼? 

 

스스로 매번 묻지만, 이것 또한 쉽지 않다. 여가를 활용해서 자기 계발을 해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의 압박감은 내게 쉽사리 눈을 감을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가함은 더욱더 멀어지고 내게는 해갈되지 않는 지루함 해소에 대한 갈증만이 남는다. 이대로 눈을 감고 일어난 내일, 나는 오늘의 나보다 더 나아질 수 없고, 나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낼 수 없고, 그러므로 나는 이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으로 사용될 수 없고, 사용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나는 사회의 잉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도태의 불안과 인간으로서의 지루함은 다음 날 떠지지 않는 눈꺼풀로 나타난다. 수면 부족으로 퉁퉁 부어버린 얼굴로도, 언제나 30퍼센트 정도는 자고 있는 머리로도 발현된다.

 

고이치로는 한가함과 지루함이 혼용되어 사용된다고 하며 두 단어를 정의했지만, 나는 피곤함과 지루함이라는 두 단어를 구분할 수가 없다. 일상적으로 피곤함과 지루함은 교집합이 거의 없는 개념이다. 지루하다는 발화 속에는 ‘피곤하지 않다’라는 느낌이 어느 정도 암시되어 있다. 하지만 피곤하면서 지루한 나의 여가시간을 상상하자면, 나는 정말로 피곤하면서 지루하다.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에서 저자는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한 방식 중 하나로 독서를 제시한다. 사고할 수밖에 없고 저자의 철학을 어떻게든 나의 세계와 접촉하게 해야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의 세계를 넘나들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곤하게 지루한 나는 책 읽기를 실행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답변을 하며 책을 ‘못 읽는’ 것인지 ‘안 읽는’ 것인지 구분하기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야 하는지,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하나 현재 사회는 이 둘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이 둘이 뚜렷하게 구분될 때는, 이 두 개념을 구분하는 일이 상대에게 더 큰 비난을 가할 수 있을 때뿐이다. 

 

상반된 두 지점이 교차하는 순간 생성된 세계에서. 나는 사고능력을 자본, 기업, 대중, 언론 등에게 외주 맡긴 채 세계를 만드는 일을 멈춘다. 보여주는 것을 보고, 필요하다고 알려주는 것을 사고, 왜곡된 사실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구분되지 않는 세계를 형성하고, 구분선이 흐린 세계 사이에서 왕복운동을 하며 지금 내가 속한 세계가 어느 곳인지 인지하지도 못한다. 이러한 흐린 경계는 압도당할 수 없고, 금이 갈 수 없다. 그러니 내 세계는 고요히 마모되고 있다. 어느 날 내가 손상 부위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내가 직접 사고의 틀을 쥐여준 ‘누군가/어떤 것’에 의하여 압도된 이후일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면 나는 생성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피곤하고 지루한 머리로 완벽한 답을 찾아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고이치로의 말을 떠올리며 독서를 고를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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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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