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것은 이 소설의 서두에서 이미 자신의 실패를 고백한다. 전쟁이 끝나고 이십여 년이 지나도록 드레스덴에 관한 책은 "말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14~15)고 적는다. 그날을 함께 겪은 전우 오헤어를 찾아가지만 "우리는 마치 전쟁 이야기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처럼 이따금 낄낄대고 싱글거렸지만, 둘 다 이렇다 할 만한 것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28). 이 서문이 소설 전체의 방법을 예고한다. 《제5도살장》은 재현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재현을 포기한다. 대신 실패 자체를 형식으로 삼는다.
왜 하필 SF였는가: 킬고어 트라우트라는 자화상
1945년 드레스덴 폭격은 히로시마보다 사망자가 많았는데도 오랫동안 미국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23). 보니것은 이 학살을 정면으로 쓰는 대신 시간여행과 외계 행성 트랄파마도어를 경유한다. 도피로 오해받기 쉬운 선택이지만, 소설 안에서는 필연으로 그려진다. 병상에서 빌리 옆에 눕는 전직 대위 로즈워터가 이유를 말한다. "그들 둘 다 인생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에서 본 것 때문이었다. (…)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과 우주를 다시 만들어내려 하고 있었다. 과학소설이 큰 도움이 되었다"(131). 사실주의가 감당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SF가 시작된다.
이 문장이 가리키는 인물이 킬고어 트라우트다. 무명의 SF 작가다. "소설을 몇 권이나 썼는지는 본인도 모른다—그런 물건을 아마 일흔다섯 개는 만들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단 하나도 돈이 되지 않았다"(206~207). 보니것 자신을 자조적으로 옮겨놓은 자화상에 가깝다. 로즈워터는 "킬고어 트라우트가 글을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142)이라고 외친다. 이 외침에는 형식의 초라함과, 그 형식이 아니고서는 닿을 수 없는 진실 사이의 간극이 함께 담긴다. 트라우트의 문장은 형편없지만 아이디어는 전쟁을 겪은 자의 자리에서 나온다. 그러니 자전적 이야기를 SF로 썼다는 것은 형식 실험이 아니다. 사실주의로 감당이 안 되는 학살 앞에서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다.
서사가 무너지는 방식: "So it goes"와 시간여행
서사 능력의 붕괴는 두 장치로 나타난다. 하나는 "So it goes"의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예고 없이 일어나는 빌리 필그림의 시간여행이다. 표면적으로 둘은 정반대다. "So it goes"가 사건을 압축하고 멈춰 세운다면, 시간여행은 사건을 끝없이 재배치하고 흩어놓는다. 그러나 출발점은 같다. 트랄파마도어인의 시간관에 죽음은 없다. "지구인을 연구하느라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다면, '자유의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전혀 몰랐을 겁니다. (…) 그런데 오직 지구에서만 자유의지 이야기를 합니다"(113). 이 철학을 받아들이면 사건에 인과를 부여하고 원인을 추궁하는 서사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붕괴는 인물 설계에서도 이어진다. 전통적인 전쟁서사라면 클라이맥스가 되었을 장면, 가장 도덕적인 인물 에드거 더비가 폐허에서 찻주전자를 가져갔다는 이유로 총살당하는 대목은 감정의 고조 없이 지나간다(264~265). 반대로 가장 무력한 반영웅 빌리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뒤바뀐 배치는 우연이 아니라 핵심 주장이다. 전쟁은 도덕적 응분을 따르지 않는다. 생존은 자격이 아니라 우연의 문제다.
위안인가 면죄부인가: 트랄파마도어 철학의 양면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소설이 트랄파마도어의 운명론을 곧이곧대로 지지하는가다. 답은 두 방향으로 갈리고, 둘 다 소설 안에 근거가 있다.
먼저 옹호할 수 있는 쪽. 트랄파마도어의 철학은 빌리에게도 독자에게도 실제로 위안이 된다. 죽음이 한 순간의 나쁜 상태일 뿐이고 다른 모든 순간에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생각은, 상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발판이다. "여기서 행복한가요?"라는 물음에 빌리가 "지구에 있을 때와 비슷하게 행복합니다"(146)라고 담담히 답하는 것도 이 철학 덕분이다. 슬퍼할 기력조차 없는 사람이 계속 살아가려고 두는 최소한의 거리다.
그러나 화자는 말미에서 이 철학에 완전히 승복하지 않는다. "빌리 필그림이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것이 사실이라 해도, 즉 우리가 가끔 죽은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영원히 사는 것이라 해도, 나는 그리 기쁘지 않다"(260). 이 한 문장이 앞선 위안의 논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위안이 되는 것과 진실인 것은 다르고, 진실인 것과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도 다르다. 모든 순간이 이미 정해져 있고 자유의지가 착각이라면, 드레스덴 폭격을 결정한 사람들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훗날 럼포드가 빌리에게 "그럴 수밖에 없었소"(246)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논리가 가해자 쪽으로 넘어갈 때 어떤 말이 되는지 보여준다. 트라우마를 견디는 개인의 언어로는 정직하고 필요한 것이, 책임을 묻는 정치적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가해와 방조를 흐리는 면죄부가 된다. 결국 소설이 하는 일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두 가능성을 나란히 열어둔 채 봉합하지 않는다.
연줄 없는 자들의 신: 예수를 다시 쓰다
이 이중성이 가장 선명한 곳이 예수를 다루는 대목이다. 로즈워터가 낭독하는 킬고어 트라우트의 소설 《우주에서 온 복음》에서, 우주의 방문객은 기독교인이 그토록 쉽게 잔인해지는 이유를 연구하다가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복음서들은 실제로는 이런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을 죽이기 전에 반드시 그가 연줄이 시원찮은지 확인해라. 뭐 그런 거지."(140)
이어 그리스도의 신성이 오히려 독자를 안심시킨다는 점을 짚는다.
"그리스도 이야기의 약점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가 사실은 우주 최강의 존재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방문객은 그렇게 말했다. 독자들은 이 점을 알고 있어서, 십자가 처형 대목에 이르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오, 이런—이 사람들은 린치할 사람을 잘못 고른 게 틀림없어! 이 생각에는 형제가 있었다. '린치하기에 적당한 사람들이 있다.' 누굴까? 좋은 연줄이 없는 사람들이지. 뭐 그런 거지."(140~141)
우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트라우트는 새로운 복음으로 구도를 뒤집는다.
"우주의 방문객은 지구에 새로운 복음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이 복음에는 예수는 실제로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는데, (…) 그러다가 이 별 볼 일 없는 존재가 죽기 직전, 하늘이 열리고 천둥과 번개가 쳤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아래로 울려퍼졌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이 부랑자를 아들로 입양하겠으며, (…) 이 순간부터 아무런 연줄 없는 부랑자를 괴롭히는 자는 누구든 무시무시한 벌을 받을 것이다!"(141)
세 단계를 나란히 놓아본다. 자비를 가장한 선별의 폭로, 독자의 안도감에 대한 조롱, 연줄 없는 자를 뒤늦게 입양하는 신. 이 우화는 신약을 조롱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비라는 이름의 제도가 실제로는 연줄 있는 자를 먼저 보호한다는 사실, 전쟁이 되풀이해 증명해온 사실을 드러낸다. 새로운 복음이 신을 부정하지 않고 뒤늦게 개입시키는 방식을 택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정의는 사후에야, 그것도 천둥과 함께 요란하게 도착한다. 이미 죽은 자에게는 소용이 없는 방식으로.
빌리가 진료실에 걸어두는 평온의 기도문도 같은 곳을 향한다.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82)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기도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 "빌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었다"(82). 노력과 수용 사이의 균형을 청하던 기도가, 빌리에게 와서는 미래조차 정해져 있다는 선언과 함께 체념의 다른 이름이 된다.
무대 밖의 여자들: 발렌시아와 몬태나 와일드핵
반영웅적 태도, 위안과 책임 사이의 어긋남은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발렌시아는 처음부터 신체로 환원된다. "발렌시아는 일리엄 검안학교 소유주의 딸이었다. 부자였다. 먹는 것을 멈추지 못했기 때문에 몸도 집만큼 컸다. 지금도 먹고 있었다."(138) 빌리는 청혼하며 "미치는 줄 알았다"(139)고 고백하는데, 이 결혼은 애정이 아니라 정신적 파탄의 증상으로 서술된다. 발렌시아가 "당신을 위해서 살을 뺄 거야"(154)라고 하면 빌리는 "나는 그냥 지금 그대로의 당신이 좋아"라고 답한다. 그러나 곧 화자는 그가 "시간 여행 덕분에 그들의 결혼생활을 이미 여러 번 보았고, 내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54)고 덧붙인다. 다정해 보이는 대사가 실은 무관심이라는 것이 이 문장으로 드러난다.
발렌시아의 죽음이 그 무관심의 정점이다. 비행기 사고로 의식을 잃은 남편을 보러 가다가, 배기 장치가 떨어진 차를 몰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된다. "한 시간 뒤 그녀는 죽었다. 뭐 그런 거지"(228). 장면 직전 화자는 "다행, 또 다행이었다"(228)라며 사고를 거의 희극으로 처리한다. 이 냉담한 톤은 "So it goes"의 정직함과 같은 계열이면서도 결이 다르다. 남성 인물의 죽음이 전쟁이라는 구조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쪽으로 쓰이는 데 비해, 발렌시아의 죽음은 서사적 존재 이유였던 '빌리를 향한 헌신'이 소진되는 방식으로 처리된다. 그녀에게는 트랄파마도어적 초연함도, 화자의 애도도 주어지지 않는다.
몬태나 와일드핵은 더 노골적이다. 트랄파마도어의 동물원에 "빌리의 짝"으로 끌려와 알몸으로 전시된다. "동물원의 관객 동원 기록이 깨졌다. 이 행성의 모두가 지구인이 짝짓기하는 것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167~168) 그녀가 빌리를 신뢰하고 스스로 관계를 원하게 되는 과정은 표면적으로 다정하게 그려지지만, 관계가 성립하는 조건 자체가—번식을 위한 전시—동의를 형식으로 만든다. 목에 건 로켓 안에 "알코올 중독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을 넣고 다니고, 겉면에 평온의 기도문을 새겨두었다는 설정(257~258)은 그녀에게도 고유한 상처의 서사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상처는 빌리의 회복을 완성하는 배경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전쟁이 남성 개인에게 가한 폭력에는 집요하게 형식을 부여하면서 여성에게는 신체와 헌신, 혹은 신체와 전시 두 역할만 허락한다. 이 작품의 반전(反戰)이 누구의 고통을 중심에 두는지 묻게 되는 지점이다.
결말, 그리고 남는 것
소설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새 울음소리 하나로 끝난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다음날, 빌리와 나머지 사람들은 문이 잠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걸어 나온다. "새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새 한 마리가 빌리 필그림에게 말했다. '지지배배뱃?'"(265) 학살을 다 지나온 자리에 남는 것은 설명도 애도도 아닌, 뜻을 알 수 없는 그 소리뿐이다. "So it goes"가 죽음마다 따라붙던 체념의 언어였다면, 마지막 새소리는 그 체념조차 더는 붙일 말이 없어진 자리의 침묵이다.
그런 점에서 《제5도살장》을 전쟁을 이야기하는 데 실패한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이 이야기를 어떻게 실패하게 만드는지 정확히 보여준 소설이라고 해야 한다. 다만 그 성공은 완전하지 않다. 소설이 봉합하지 않고 열어둔 것이 트랄파마도어 철학의 양면성이라면, 열어두지 못한 채 닫아버린 것은 발렌시아와 몬태나의 자리다. 도살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누구에게는 시간 속에 흩어지는 일이었고, 누구에게는 애초에 서사의 주어가 되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 사실까지 함께 읽어야 이 소설을 온전히 읽은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