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불안하지 않은 인간도 없다. 그래서 연약한 우리는 감정 찌꺼기를 쏟아낼 대상을 찾아 헤맨다. 무언가에 불안을 토해내고, 매달리고, 엉겨 붙으며 자신이 아직 가치 있는 존재란 걸 확인받으려 발버둥 친다. 나약한 마음이 들러붙는 대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일을 하고 돈을 벌며 불안을 풀고, 어떤 이는 사람을 챙기며 자신의 쓸모를 증명한다. 운동을 하거나 외모를 가꿔 시선을 받으며 불안을 잠재우는 이도 있고, 술·담배·게임·여행에서 도파민을 뽑아먹으며 현실을 잊는 경우도 있다.
26세 여성 플리백(fleabag : 더러운 몰골, 지저분한 짐승, 싸구려 숙박업소)이 불안을 해결하는 방식은 섹스다. 집착하고 매달리는 대상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저지른 끔찍한 죄의 기원,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목적지도 섹스다. 그의 껍데기만 보면 관계만을 위해 살아가는 문란한 여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그의 전부는 아니다.
2026년 6월 19일에 개막해 9월 6일에 막을 내리는 연극 <플리백>은 여성 배우가 극장을 홀로 채우는 1인극이다. 또한 19세 이상만이 관람 가능한 작품이기도 하다.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시작해 상을 휩쓸며 2016년, 2019년 BBC 드라마로도 제작된 <플리백>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거머쥔 화제작이자 문제작이다.
한국 초연은 극단 산수유 대표이자 제47회 동아연극상 신인 연출상을 받은 류주연이 연출했다. 작품엔 김히어라, 김주연, 김규남 세 배우가 캐스팅됐다. 연극, 뮤지컬, 드라마, 영화, 유튜브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해 온 세 배우는 한 인물을 다른 해석으로 연기하며 관객에게 거침없이 말을 걸고 있다.
연극 <플리백>은 배우별로 무대와 연출이 전부 다른 것 또한 특징이다. 플리백의 불안과 강박, 죄책감과 성적 충동이 뒤엉킨 무대 세트와 오브제들은 그의 내면을 거울처럼 비춘다. 등장인물이 여럿 나오는 뮤지컬이나 연극이 주로 공연됐던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 올라오는 1인극 <플리백>은 무대 영상 또한 연출로 활용하며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세상을 떠난 친구 ‘부(Boo)’와 함께 운영하던 기니피그 카페를 혼자 도맡은 플리백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며칠 안에 5천 파운드를 구하지 못하면 카페를 폐업해야 하고, 남자 친구 해리는 그를 떠났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억, 어머니가 떠나자마자 자매의 대모와 살게 된 아버지, 동생을 믿어주지 않는 친언니 또한 마음을 괴롭힌다. 자신을 만졌던 형부, 시도 때도 없이 신체 노출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강요하던 전 애인, 원나잇을 하는 동안 가학적 행위를 강요하는 남자 또한 정신을 극단으로 몰아간다.
경제적 궁핍, 가정사, 형부의 부적절한 행동은 플리백이 인정한 명확한 아픔이다. 문제는 그 후다. 플리백은 남자들 또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단 걸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다. 남자들을 여럿 만나며 성생활을 하는 플리백의 모습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사귀었던 남자든, 잠만 잤던 남자든 모두 플리백을 불안과 강박, 자기혐오에 빠트렸다. 폭언하거나 신체 노출·가학 행위를 강요하는 남자들은 그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도구로서 존재하는 플리백 또한 남자들을 쾌락 추구용으로 이용한 것이라면 좋겠지만, 그는 상처받는다.
플리백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타인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를 아껴주던 이들은 있었다. 플리백이 선물한 기니피그 ‘힐러리’에 아이처럼 기뻐하고 기니피그 카페까지 운영했던 친구 부, 말 없는 친구처럼 곁에 있어 준 기니피그 힐러리, 할아버지 단골이자 플리백을 성적으로 소비하지 않은 유일한 남자 ‘조’까지.
플리백은 이들의 마음에 보답하지 않았다. 부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고작 하루 만난 남자 때문에 힐러리 또한 고통에 빠졌다. 목적도 없이 불안을 풀기 위해, 혹은 그 또한 뻔한 남자들 중 하나일 거라 판단하며 조를 유혹했다. 그렇게 플리백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친구, 죄 없고 연약한 존재, 모든 남자가 자신을 성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단 진실 또한 스스로 ‘fleabag’으로 만들어 버렸다.
플리백이 매달리는 건 쾌락 추구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신체 노출 사진을 강요하던 전 남자 친구에게 자발적으로 사진을 또 보내고, 남자들을 찾는 와중에도 세상에 없는 부에게 계속 전화한다. 주인 없는 전화에선 생전 부의 밝은 목소리만 반복되며 들려올 뿐이다.
그가 엉겨 붙는 것의 본질은 이처럼 ‘사랑받고 싶다는 감각’이다. 이엔 어리석은 착각과 무의식중에 외면하는 진실이 뒤엉켜 있다. 그의 패착은 섹스는 사랑이며, 생명력과 같단 잘못된 확신이다. 옳지 않은 사상, 순간적 충동, 도파민을 이기지 못해 자신을 진짜로 아껴주는 순수를 연이어 짓밟은 건 뼈아픈 진실이다. 플리백은 단순히 문란한 여자가 아니라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그의 가장 큰 잘못은 자신을 쓰레기 더미에 내놓은 것이다.
한국과 정서가 다른 영국에선 연극 <플리백>을 블랙코미디로 연출했다. 한국 버전 또한 배우마다 연출이 다르긴 하지만, 코미디적 요소가 있다. 그럼에도 작품을 지배하는 건 현실 도피성 웃음 뒤에 깔린 죄의식이다. 그는 남자들을 통해 자학하고, 스스로 가치를 깎아내렸으며,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는 몇 안 되는 이들마저 내팽개쳤다. 그래도 그는 좌절만 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카페를 접고 새 일을 구하는 플리백은, 직장에서 발생한 성적인 문제에 부적절한 조치를 한 일터의 면접관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추켜 올린다.
기니피그 힐러리는 플리백 자신이기도 하다. 힐러리가 부에게 갔을 땐 진심으로 사랑받았지만, 플리백을 성적으로 이용하던 남자에겐 학대받았다. 플리백, 즉 자기 자신에겐 고통 속에 버려졌다. 플리백의 충동적 섹스는 우리 밖으로 탈출하려는 기니피그의 몸짓과 비슷하다. 탈출은 달콤했을지라도 대가는 가혹했다. 쾌락과 도파민, 생명력을 향한 갈구는 죽음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던 것이다.
작품은 노골적으로 메시지를 주입하거나 감정을 강요하진 않는다. 플리백의 삶을 블랙코미디로 비틀어 묘사하며 스스로 판단하게 할 뿐이다. 그럼에도 극은 한 대사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는 실수를 지우기 위해 존재한단 부의 말이 그것이다.
플리백이 가진 ‘지우개’는 뭘까. 그의 죄와 실수들은 지우개 정도로 깨끗하게 없앨 수 있을까. 이처럼 <플리백>은 자조 속 자기혐오로 점철된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버리지 않았다. 부의 잔상이 남은 기니피그 카페는 폐업했고, 둘 사이를 단단하게 묶어준 힐러리도 떠났다. 남자들은 사라졌고, 친언니는 잔인하게 솔직했지만 희망 고문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남자가 자신을 성적으로 대하지만 않는단 진실도 확인했다. 이전의 실수들과 죄, 착각과 거짓에서 벗어난 플리백이 걸어갈 새로운 길은 어디일까. 정답은 과거라는 우리에서 벗어난 기니피그, 플리백만이 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