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불편하다. 모든 무대 예술은 극장에 가서 봐야 한다. 극장과의 물리적 거리와 환경, 표를 구하는 과정, 시간을 내서 극장에 오가며 체력과 정신을 쓰는 것까지. 공연 한 번을 보는 건 이처럼 어렵다. 연극은 더더욱 그렇다. 비교적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공연 예술인 뮤지컬에 비해 연극은 심리적 진입 장벽이 높다. 노래가 없는 만큼 텍스트의 밀도가 빽빽하기에 더 집중해야 한다. 또한 연극은 ‘불편함’을 감추지 않기 때문에 쉽지 않은 장르다.
8월 9일까지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및 8~9월엔 대구·울산·이천에서 공연되는 연극 <베니스의 상인>은 불편함을 감추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셰익스피어와 고전을 어렵지 않게, 연극을 모르는 관객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도록 대중적이고 화려하게 연출한 극이기도 하다. 파크컴퍼니가 제작한 <베니스의 상인>은 재미와 대중성도 갖췄지만, 현실과 동시대성을 외면하면 안 된단 연극의 날카로운 본질을 놓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거의 따르는 <베니스의 상인>은 오프닝과 엔딩을 카니발 파티로 열고 닫았다. 오프닝엔 노래가 삽입됐으며, 배우들이 객석으로 등장한다. 아름다운 의상과 춤, 장면을 채운 밝은 에너지 또한 시선을 사로잡는다. 오프닝이 탁월한 건 신나서만은 아니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이자 작품 메시지를 상징하는 인물, ‘샤일록’을 베니스 사람들이 둘러싸고 멸시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카니발 축제는 주로 가톨릭 국가에서 열린다. 샤일록은 자신의 종교도 아닌 축제에서 집단 린치를 당하는 것이다.
가면을 쓴 베니스 사람들의 밝음은 추함과 어둠으로 변한다. 오프닝 말미에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상인 ‘안토니오’는 샤일록을 향해 침을 뱉는다. 폭력성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이다. 원작엔 없는 오프닝은 연극 <베니스의 상인> 각색·연출 방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창작된 장면이다. 애틋한 친구 바사니오에겐 몸까지 담보 잡히는 기독교 상인 안토니오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같은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는다.
1막에선 안토니오의 폭력성과 오만, 그러면서도 바사니오를 위해 터무니없는 계약을 체결하는 어리석음을 그렸다. 이 또한 ‘당연히’ 배가 무사히 제날짜에 돌아올 것이라 믿는 오만이기도 하다. 날씨도, 바다도, 숨죽인 채 칼을 가는 샤일록도, 한 치 앞을 모르는 미래까지도 우습게 본 안토니오는 오만을 잔인하게 되돌려 받는다. 샤일록에게 뱉은 침이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 심장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바사니오 구혼 자금 마련을 위해 살 1파운드를 담보로 샤일록에게 3천 더컷을 빌린 안토니오는 2막에서 무너진다. 바다에 뜬 배가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 닥쳤기 때문이다. 1막에서 안토니오에게 모멸당한 샤일록은 2막에선 그를 향한 해묵은 증오심을 근거로 그의 살과 영혼, 존엄성마저 베어내려 한다. 1막과 2막에서 뒤집히는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처지, 그에 따라 달라지는 배우들의 연기는 작품의 백미다.
안토니오와 샤일록의 관계는 서로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과 같다. 온전한 선인도, 악인도 아닌 두 사람은 서로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모멸감과 멸시는 복수의 칼날로 돌아왔고, 칼끝은 자비와 정의란 이름으로 심판받으며 부러졌다. 유대인 샤일록은 베니스에서 소수자로 살며 인간 취급 못 받았고, 재판에서 패배한 대가로 기독교로 개종하란 판결을 받는다.
안토니오는 겉으론 덕망 높고 안정적인 상인이며, 인간관계도 좋아 보이지만 그 또한 소수자다. 바사니오를 향한 헌신이 순수한 우정 때문만은 아니란 해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작품 안에서도 바사니오를 향한 안토니오의 특별한 감정은 은연중에 계속 드러난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은 바사니오를 향한 안토니오의 묘한 마음을 더 드러내는 연출을 택했다. 또한 엔딩에선 카니발 파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남는 안토니오를 배치하며 오프닝과 수미상관 구조를 만들었다. 결말에서 베니스를 떠나는 샤일록,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안토니오의 고독은 닮았다.
샤일록 딸 제시카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고, 샤일록의 기독교 개종 장면을 보여준 것 또한 각색 포인트다. 제시카는 단순히 야반도주한 딸이 아닌 정체성을 고민하는 여성·유대인·개종자로 거듭났다. 작품은 포셔와 더불어 제시카를 여성 캐릭터의 중요한 축으로 격상시켰다.
유대인의 딸이자 기독교인의 아내,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는 경계인으로서의 미래까지. 연극 <베니스의 상인> 제시카는 셰익스피어 비극 남자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 정체성의 혼란과 고뇌는 남성만의 몫이 아니란 걸 그려냈기에, 여성 서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연출임이 분명하다.
딸 제시카, 사위 로렌조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개종당하는 샤일록의 표정 또한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슬픔인지, 괴로움인지, 고통인지 모를 샤일록을 보며 폭력·자비·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장면 자체엔 성스러운 음악과 조명이 흐르지만, 샤일록을 연기하는 배우 박근형의 표정엔 수많은 생각과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베니스의 밤은 끝나지 않으리
원 캐스트로 샤일록을 연기하는 배우 박근형의 들끓는 에너지와 끝없이 도전하고 꿈꾸는 모습은 여전히 그를 경외하게 한다. 대학 시절 샤일록을 연기한 후 수십 년 만에 다시 샤일록이 된 박근형은, 연극계와 후배들을 향한 애정으로 무대 안팎에서 귀감이 되고 있다. 공작 역의 신구 또한 최근 몇 년간 계속 새로운 무대에 오르며 뜨거운 감동을 주고 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이어 두 배우를 한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단 것 자체가 관객에겐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신구와 박근형은 <베니스의 상인>을 통해서도 연극내일 프로젝트 기부 공연을 주도하며(7월 11일) 청년·신진 연극인을 지원했다.
안토니오 역엔 이승주와 카이가 더블 캐스팅됐다. 뮤지컬 <엘리자벳>에 토드 역으로 출연을 앞둔 배우 카이는, <레드>·<라스트 세션>·<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로 연극에도 꾸준히 도전해 왔다. 그가 출연했던 연극 세 편은 모두 2인극 또는 3인극으로, 인물 수가 많은 대극장 연극 무대에 오른 건 <베니스의 상인>이 처음이다.
전작인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에서 조선 세종대왕과 대한민국 PD 박진석을 오가며 위엄·고독·인자함·집념·열정 등의 얼굴을 선보인 카이는 <베니스의 상인>에선 새로운 얼굴을 꺼내 들었다. 카이가 연기하는 안토니오는 귀족적인 우아함이란 외피를 입었지만, 내면엔 오만·위선·폭력·그릇된 신념과 헌신을 품은 인물이다. 카이는 1막의 차갑게 뒤틀린 오만과 2막의 내면 붕괴, 죽음 앞에 나약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박근형의 샤일록과 팽팽한 대립각을 형성했다.
샤일록에게 침을 뱉고 그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는 것. 샤일록을 만진 손을 더럽다는 듯 닦아내는 것. 생살을 베일 뻔한 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숨넘어갈 듯 가련하게 호소하던 모습은 싹 지우고 몇 초 만에 의기양양해지는 것. 그러면서도 반성이나 깨달음은 거의 없는 모습은 카이가 주로 서 온 대극장 뮤지컬에선 보기 힘든 연기다.
대극장 뮤지컬 인물들도 결함이 많지만, 노래가 그 결함을 강렬하고 아름답게 포장하기 때문이다. 뮤지컬 인물들의 잘못된 선택은 넘버와 퍼포먼스로 재탄생되며 기억에 남지만, 연극 인물의 성격적 문제는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날것이라 불편하다. 그래서 연극은 관객도, 배우도 어렵다. 카이는 안토니오의 불편한 면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무대 위 인물로선 입체적으로 묘사하며 연극에서만 볼 수 있는 야누스적 얼굴과 연기적 미학을 설득력 있게 구현했다.
포셔는 샤일록과 더불어 무대를 강렬하게 장악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유언에 따라 남편 후보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초반 포셔는 성안에 갇힌 수동적인 공주 같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선 포셔 첫 장면을 옷 입는 모습으로 연출했다. 숨쉬기도 힘든 코르셋을 꽉 조이며, 하녀 세 명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는 모습은 당시를 살던 수동적 여성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포셔는 비상한 두뇌와 뛰어난 언변, 빠른 눈치와 사회성, 인생을 개척할 줄 아는 적극성과 대범함까지 가졌다. 우스꽝스러울지라도 혼자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선택한 것과 다름없는 남편 바사니오와 친구 안토니오를 살리기 위해 법정을 누비는 모습에선 통쾌함과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포셔를 연기하는 최수영과 원진아 모두 <베니스의 상인>이 두 번째 연극 작품이다. 최수영은 <와이프> 후 약 2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올랐고, 원진아는 <파우스트> 후 3년 만에 연극에 도전했다.
포셔에게 구혼하는 바사니오가 금·은·납 상자 중 납 상자를 택하는 장면은 <베니스의 상인> 핵심 장면이다. 시를 읊는 척 정답을 알려주는 네리사와 하인들, 각자 다른 대사를 강조하며 웃음 포인트를 살리는 두 포셔의 천연덕스러움은 객석을 쉴 새 없이 웃게 만든다. 개그 감각과 순발력이 뛰어난 최수영, 포셔일 때와 법정에서의 목소리 대비가 돋보이는 원진아 모두 무대를 건강하고 밝은 에너지로 채우고 있다.
<세일즈맨의 죽음>,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에 이어 또다시 박근형과 무대에 오른 이상윤은 바사니오를 원 캐스트로 연기한다. 바사니오는 친구의 몸을 담보로 돈을 빌려 청혼하러 갈 정도로 대책 없고 무모하지만 용감하고 솔직한 청춘이다. 포셔가 바로 사랑에 빠질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계산적이면 안 되는 순수한 인물이다. 안토니오에겐 절절하면서도, 포셔에겐 남성적 매력 및 놀리고 싶은 재미와 귀여움까지 유발해야 하는 캐릭터다. 이상윤은 순수·열정·엉뚱함과 법정에서의 패기까지 다양하게 연기하며 자신만의 바사니오를 만들어가고 있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 제시카와 로렌조는 원작보다 진화한 캐릭터성을 지녔다. 둘은 그저 철없는 야반도주 커플이 아니다. 용기 내 사랑을 택했고, 그 사랑을 위해 가진 것을 내어주며 약자가 됐다.
베니스 사람이자 기독교인 로렌조는 유대인이자 평판 안 좋은 샤일록 딸 제시카의 남편이 됐다. 그 선택엔 책임과 감당해야 할 미래가 따른다. 로렌조는 끝까지 아내와 장인어른의 곁을 지키며, 자신 또한 제시카처럼 경계인의 삶으로 넘어갔다. 로렌조 역의 최정헌은 셰익스피어 특유 시적인 대사의 말맛과 리듬감을 살리면서도, 사랑에 빠진 청년과 아내를 지키는 남편의 모습까지 소화하며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원작과는 달리 제시카는 샤일록이 비참하게 패배한 법정에서 ‘아버지’를 외치며 그를 끌어안는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나’라며 절규하는 샤일록이 눈앞에 다가온 딸의 이름을 읊조리는 모습에선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로렌조의 낭만적 대사들과 다르게, 제시카의 말들은 강단 있고 현실적이며 정체성 고민이 담겼다. 작품은 이처럼 샤일록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동시에 제시카에겐 고뇌하는 인간성과 여성 서사의 가능성까지 부여했다.
제시카는 김슬기와 김아영이 연기한다. <꽃의 비밀>, <불란서 금고> 등으로 최근까지 연극 무대에 선 김슬기, <베니스의 상인>이 연극 데뷔인 김아영의 밝은 대중적 이미지와 제시카 캐릭터는 얼핏 보면 상반된다. 김슬기는 이전 연극들의 대사톤과는 달리 한층 차분한 톤으로 제시카를 연기한다. 제시카는 스스로 삶을 선택하는 강단과 용기가 있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슬기와 김아영은 제시카의 복잡한 내면을 개연성 있고 공감 가게 묘사하고 있다.
원작의 광대와 그라티아노를 합친 랜슬럿 역의 박명훈과 조달환, 네리사 역의 한세라 또한 탄탄하고 안정적인 연기는 물론 유쾌함까지 확실히 책임지고 있다. 포셔와 바사니오 커플을 복사한 듯한 네리사와 랜슬럿의 연애, 포셔의 하녀이지만 친구나 자매처럼 따뜻하고 친근한 네리사의 모습은 작품에 활력과 사랑스러움을 불어넣는다.
안토니오와 바사니오 친구 살레리오는 박민관이, 솔라니오는 조한준이 연기한다. 안토니오와 바사니오의 아군인 이들은 유쾌한 씬 스틸러이면서도 무심하게 잔인한 내면을 가졌다. 자신도 인간이라 울부짖는 샤일록을 바라볼 때, 법정에서 노예 해방을 말하는 샤일록의 말을 듣는 이들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다. 이처럼 양면적 캐릭터를 연기하는 두 배우는 법정에서의 맛깔나는 리액션으로 장면의 몰입감을 높여준다.
유일한 샤일록 편인 유대인 투발을 연기하는 이원승, 포셔에게 구혼하지만 실패하는 모로코 왕자 이지수·아라공 왕자 이종영 모두 등장 장면은 적지만 엄청난 임팩트로 무대를 압도한다. 연극내일 프로젝트로 선발된 신인 배우들인 박승재·엄현수·김윤지·이준일·주홍 또한 여러 장면에 다양한 역할로 등장하며 무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빛난다고 다 금은 아니다
‘정의도, 자비도 그대들의 것. 신마저 그대들의 것.’
연극 <베니스의 상인>은 재판에서 패배한 샤일록에게 원작엔 없는 새 대사를 줬다. 해당 대사는 <베니스의 상인>이 오늘날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 드러낸다. 살의가 담긴 샤일록의 살 1파운드 계약은 잘못된 계약이다. 하지만 작품은 샤일록이란 유대인, 이방인, 소수자가 왜 괴물이 됐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드러내며 생각할 여지와 불편함을 남겼다.
오프닝 카니발 파티 장면 가사처럼, 베니스의 밤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밤은 베니스 사람, 기독교인, 사회 주류들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닐 것이다. 지금도 어딜 가나 수많은 샤일록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기 좋은 사과가 속은 썩었을 수도 있고, 빛난다고 다 금은 아니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은 화려한 연출과 캐스팅으로 연일 전석 매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썩은 부분’을 일부러 남기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연극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불편함은 좋은 연극이 안고 가야 할 숙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