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세사르 아이라의 대표작 『유령들』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가 고수하는 미학인 ‘앞을 향한 탈주’에 따라 쓰인 유령들.
앞을 향한 탈주란, 개연성과 미리 선정된 플롯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방식을 말한다.
『유령들』에서 눈에 띄는 방식은 ‘역설’이다. 관례적인 형식에 의해 줄거리를 구성하지 않고,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기존의 정형화된 의미를 무너뜨린다. 모든 것을 ‘무’로 만들어, 독자로 하여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혹은 전혀 맛보지 못한 영원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 같은 환상을 품게 한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한 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이하는 12월 31일, 공사 중인 한 아파트에 입주를 앞둔 가족이 방문한다. 아이들은 건물 사이를 요리조리 들뜬 마음으로 뛰어다니고, 모두가 개인적 소망이 담긴 앞으로의 미래를 그린다.
12월 31일,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축배하는 마음으로 저무는 한 해를 끝맺기 위해 분주할 때, 아파트 곳곳에서 유령들이 나타난다. 정형화된 외형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석회 가루를 뒤집어쓴 유령들.
하지만 건물의 층을 딛고 서 있는 그 누구도 그들의 존재에 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단 한 명, 그들의 파티에 참여하기를 절실히 원하는 소녀, 파트리를 제외하고. 파트리는 유령들의 과장된 너털웃음 속에서도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다.
경계를 허물다.
가장 주목하고 싶었던 점, 『유령들』에서는 흔히 철저하게 그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과 부유함의 경계도 매우 모호할뿐더러, 인간과 짐승의 경계 또한 흐릿해져 모든 것이 한 데 어우러져 뭉쳐진, 하나의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유령들 또한 그러하다. 그들은 건물 사이를 시공간을 초월하듯 오가며, 아무 맥락 없이 자태를 드러내기 바쁘다. 건물에 입주하며 미래를 그리는 가족들의 일상에 서서히 침투하며, 마치 기이한 환상을 바라보는 듯한 아리송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유령들의 몸짓을 통해, 작가 ‘세사르 아이라’는 존재와 부재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구획이 점차 옅어진다. 12월 31일이라는 숫자가 가르고 있는 연말과 새해라는 강력한 분기점도, 유령들의 존재 한에서는 멀끔히 사라진다. 현재 눈앞에 자신이 마주하는 것이 현실인지 허상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가난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 인간과 짐승의 경계는 임시로 그어놓은 선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이 얼마 지나면 저곳에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31일이라는 날짜는 그 자체가 지닌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을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유령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아이들을 둘러싼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부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서사는 경계와 환상이라는 강력한 축에서 조금 벗어날지 모르지만, 아이들의 발가벗겨진 순수함 탓에, 무너져 내린 경계가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파트리가 유령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결국 그들의 파티에 초대받기 위해 결심을 굳히는 근원은 아이들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기 때문은 아닐까. 끝을 헤아리지 못할 만큼, 그렇기에 악의적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는 순수함은 한 사람의 욕망을 훤히 드러낼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되니까.
세사르 아이라는 건축이라는 측면에서, ’아직-만들어지지-않은-것’을 언급하며 경계를 허무는 예술에 대해 고찰할 것을 권유한다. 건축에서 이미 지어진 것과 앞으로 지어질 것, 그 두 지점을 매개하는 것은 ‘아직-만들어지지-않은-것.’
결국 이 특별한 지점을 전체로 환원한다면, ‘실현된-것’과 ‘실현되지-않은-것‘이 된다. 그러나 특정한 두 부분이 연결되어 전체를 아울러 하나로 집약될 수 있다면, 세사르 아이라는 이를 예술이라 일컬었으며 이러한 예술은 결국 문학이라 명명했다.
그가 파트리를 둘러싼 상황을 통해서, 독자에게 ‘예술’에 관해 고찰하기를 권했던 것처럼 다층적인 문학성에 대해서 떠올리고 또 재현해 보았다. 문학이란 현실 세계를 근원에 두고, 비현실적인 세계를 그려낸다. 그 아래에는 자기의 성정과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수 있고, 감추어져 있던 자신의 소망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문학에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하다. 어쩌면 그 존재 자체를 인식할 수 없을 만큼 텅 비어 있는 새하얀 도화지와 같을지도 모른다.
세사르 아이라는 시공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문학이라는 예술에 큰 매력을 느껴 자신이 문학에 몸을 담그고 있으며, 따라서 이분법적인 구획을 적극적으로 허물고 있음을 표하고 있다.
“저물어가는 한 해를 위하여!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행복하게 한 해를 보냈다면, 올 한 해를 위해 마실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설령 행복한 한 해를 보내지 못했더라도 상관없었다. 건배사에 들어간 말은 더 고귀하고 더 높은 어떤 것, 즉 어느 해든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존중하는 경이로운 선물로서 한 해를 암시했으니까.”
세사르 아이라가 가리키는 ‘새해’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아마 지구촌 대다수 사람은, 12월 31일에 숫자를 카운트다운을 하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행복했다면 행복한 대로, 혹여나 자책으로 얼룩진 해였다고 하더라도 그 배움을 중요시하고, 다가오는 해를 위해 더 많은 행복을 빈다.
지난해를 기리고, 미래를 축복함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일 것이다. 세사르 아이라는 새해를 기묘한 표현이라 비유하며 밤 열두 시 정각, 사이렌이 울려 퍼지는 일 분이라는 짧은 순간을 가리킬 뿐이라 했다.
사실 새해라는 단어는 명확한 구분 선이 존재한다고 느껴졌다. 지난해와 올해, 그리고 다음 해.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시간 축. 이 선을 넘게 되면 24살이 되었든 혹은 25살이 되었든 당시의 나를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으며, 과거의 나는 기억 한 편에서 보관되어 연속적으로 탈바꿈하여 재생될 수밖에 없다. 의식을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저장된 기억과 당시의 자아를 제멋대로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유령들』에서는, 새해가 그저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해가 바뀌는,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아주 미세한 틈을 차지하는 그 1분. 그렇기에 경계가 더욱 희미해지고, 더 이상 가꾸어갈 수 없는 과거의 나와, 막연한 미래의 나를 매개한다는 의식 자체가 사라진다. 모든 것이 뭉뚱그려져 현재를 살아가는 ‘나’ 자신에 귀속된다.
존재를 넘어서, 꿈결 같은 세계로 뛰어들다.
“황혼은 일시적이고, 무심하며, 미묘했다. 그 빛의 구획들 안에 지금 당장은 아무도 없었지만, 누구라도 자신을 사진에서 오려내어 저 아름다운 쪽빛 천장에 붙여놓은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황혼은 파트리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파동이 점차 일렁이는 모습을 묘사한 단어처럼 느껴졌다. 황혼이란 낮과 밤 사이에 놓이며, 이처럼 찰나에 불과한 순간은 이분법적 구분이라는 세상을 지탱하는 축을 희미하게 만든다. 결코 완성되지 못한 순간, 그저 경계에 놓이며 바래가는 색채.
파트리는 유령들의 파티에 참석하고 싶었다. ‘공사 중인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며 맞닿아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닿지 않는 유령들을 욕망하고 바라보며 유령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가족 모두에게 속내를 탄로한 자신의 얼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유령들을 담고 있는 흐트러짐 없는 눈동자.
“멈춰요! 그녀의 영혼이 소리쳤다. 제발 가지 마요! 그녀는 영원토록 이런 모습으로 그들을 보고 싶었다. 비록 영원이 단 한 순간에 불과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단 한 순간이기에 더더욱. 그녀는 영원이란 것을 다른 어떤 식으로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라, 영원이여! 와서 내 삶의 순간이 되어다오!“
시간이 흐르며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보편적이게 되어, 주류에 편승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땅을 딛고 사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다양한 틀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규격화된 형식에 수백만 가지의 생각과 감정을 빈틈없이 차곡차곡 담는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결국 씁쓸한 권태라는 감각뿐이다.
“우리는 시간을 항상 시간 자체의 내부에서 보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렇다면 시간이 그 바깥에 있다면 어떨까? 삶 역시 마찬가지다.”
정상성에 ‘어긋남’과 ‘어긋나지 않음’이라는 뚜렷한 구분 선을 설정하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밀어 넣도록 하는 것은 무익한 행위라는 것을 마음 한편에 깊이 새길 필요성이 있다. 분명히 다른 잠재력이 많은데, 가능성을 애써 부정하며 정형화된 규범을 내세우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파트리가 유령들의 파티에 참석하려 하는 것은, ‘삶 안’ 그리고 ‘삶 바깥’과는 상관없이 절대적인 영원을 드러내는 단 한 번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네 마음속에서 진솔한 ‘영원’을 찾아라.
유령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간절히 느낀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결코 모든 존재가 완벽히 들어맞는 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완전투성이인 모든 사람은 마음속의 완성을 그리며 일상을 살아간다. 그것은 꿈이 될 수도 있고, 아주 소박한 희망이 될 수도 있다.
삶 속에는 수많은 환각이 섞여 들어가고 있고, 그 현실은 완전함과는 지나치게 거리가 먼 소용돌이가 된다. 완공되지 않은 아파트 내부에서 훤히 드러나는 유령들의 움직임과 파티에 참여하고자 하는 파트리의 욕망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문다. 파트리가 가족들의 곁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것을 명확한 ‘현실’이라 정의 내릴 수는 없다. 유령들을 단순히 비현실적인 존재라고 구분할 수 없으므로.
그렇기에 오직 자신의 마음만이 진실이 된다. 상상의 세계로 끊임없이 변모하는 현실이기에 마음을 의탁하기 힘겹다면, 스스로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 꿈과 환상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수없이 오가며, 과거를 재생하고 미래를 그리는 것은 자기 자신이니까.
"하얀 보름달은 달무리도 지지 않아, 아주 밝게 빛났다. 평생을 두고 바라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달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삶 속에서 달은 언제나 변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