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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눈 부신 태양만이 내리쬐는 곳 [도서/문학]

본연의 색을 잃지 않고, 초라함을 드러내도 상관없으니.

by 정예진 에디터
2026.05.1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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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여름이라 일컬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강렬하게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을 모두 품어내는 듯한 모래사장과 그와 대비되게 푸르게 넘실거리는 바다를 이렇게나 절묘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분명히 텍스트를 읽어 내려간 것뿐인데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고 있고 나는 바다를 향해 손을 뻗으며 모래사장을 걷고 있다.

 

’이방인‘을 읽은 것은 이번이 2번째이다. 고전은 본연의 색이 충실하고 모든 학문적 고찰의 뿌리가 되므로 몇 번이든 꺼내볼 수 있는 귀금속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읽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 몇 회독이나 반복적으로 읽었을 때 느끼는 차별점을 마음속 깊이 실감하는 것도 이 땅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유일무이한 ‘나’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태양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탑승하여 느낀 점, 깨달은 점도 달라지고 주인공에 대한 공감 또한 달라진다. 사실 카뮈의 ’이방인‘ 속 주인공에 대한 평가나 전반적 느낌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초반 부분을 읽어 내려갔을 때는 무언가 크게 귀감이 되거나 울림을 주지는 않았다, 냉소적인 표현이 나열되어 있어 조금의 불편감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입 부분 내가 언급했던 대로 ’이방인‘의 묘사는 내 뇌리를 꽂았다. 아직 천천히 흐르는 듯하지만 강렬하고 신속하게 전개되는 그 사건의 배경, 새하얀 모래사장과 아름다운 푸른 바다.

 

그 모든 섬세한 묘사가 주인공 옆에서 스스로를 사건의 방관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세월이 흘러도 이 고전에서 느꼈던 충격은 내 마음속에서 큰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오랫동안 해변을 걸었다. 이제 태양은 찍어 누르는 듯했다. 햇빛이 모래와 바다 위에서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햇빛과 바다의 먼지 같은 수증기가 만들어 내는 눈부신 후광에 둘러싸인 조그만 바윗덩어리가 멀리 거무스름하게 보였다. 나는 그 바위 뒤의 서늘한 샘을 생각했다. 졸졸 흐르는 그 샘물 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고, 태양과 힘겨운 노력과 여자의 울음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며, 그늘과 휴식을 되찾고 싶었다.“

 

“불로 지지는 태양의 열기가 내 두 땀으로 확 번졌고 땀방울들이 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엄마의 장례를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 이었고, 그날처럼 특히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줄들이 한꺼번에 다 피부밑에서 펄떡거렸다.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그 뜨거움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게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단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완벽한 묘사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감탄하며 읽었다. 해가 지나면 조금씩 흐려지는 책의 한 구절 한 구절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응당한 이치인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자연에 대한 비유와 간결하지만 짙은 문체는 내 두뇌에서 ‘이방인’이라는 고전을 흐리게 하지 못했다.

 

정말 솔직하게 여태까지 내가 언급한 주제와 묘사에 대한 극찬은 이방인의 주제를 관통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괜히 뜬구름 잡는 행동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깊은 사유보다도, 문장 하나하나의 결을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는 이름에서 결국 눈부시게 뜨거운 해변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정상이 아닌 범주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첫 문장부터 어떤 묘한 허망함이 밀려온다. 자신의 어머니, 그것도 친모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마치 그 일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담담한 말을 내뱉는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이른바 사회 통념 속 ‘정상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방인’의 지나치게 간결하고 짧은 문체가 주는, 무감정하고 세상만사에 해탈한 듯한 기이하면서 공허한 느낌은 독자에게 나름의 불편감과 정신적 피로를 느끼게 한다.

 

주인공은 앞서 길게 묘사된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마치 그 열기가 이마를 꿰뚫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 속에 해변가에서 친구 레몽과 적대하던 아랍인을 끝내 우발적으로 살해하게 된다.

 

그렇게 열리게 된 그의 재판 과정에서 재판장은, 살해에 초점을 두며 사람을 죽인 이유보다 ‘왜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마땅하게 슬퍼하지 않았는지’, ‘왜 어머니의 죽음 이후 충분한 애도 기간을 겪지 않고 연애를 시작한 건지’, ’어째서 모든 일 앞에서 세상이 무가치하기라도 한 듯 무감각한 태도를 보이는지’ 끊임없이 심문을 당한다.

 

이른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친모의 죽음 앞에서 깊이 슬퍼하고 긴 애도의 시간을 견디며, 자신을 짓누르는 슬픔 속에서 홀로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관념이 존재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끝내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못한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믿는 감정의 궤도에서 지나치리만치 멀어져 있었다.

 

사회가 기대하는 방식, 모두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필연적인 방식은 대체 무엇일까. 전 세계적으로 문화가 다를지라도 사회 통념이 조금씩 다를지라도 인간의 ‘감정’이라는 부문에서는 대부분이 비슷한 공감대를 공유한다고 느낀다.

 

어느샌가 그 공감대를 벗어난 사람은 사회에서 질타를 당하며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일명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일쑤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드는 의문일지도 모르는데, 과연 그들이 정말 사회성이 부족하며 질타를 당해도 될만한 ‘그런 사람’일까? 우리가 그들을 비인간적이라 평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사회생활을 할 때 ‘페르소나(Persona)'를 의당하게 부착하고 행동하지 않나?

 

그들은 진실로 비인간적인 걸까. 다른 관점에서, 정반대로 생각해 보면 ‘가장 솔직한 사람’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상당히 복잡한 생각이 든다.

 

최근의 현대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지나친 솔직함이 곧 무례함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주인공 뫼르소는 사회적으로 널리 용인되는 감정의 방식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슬픔을 꾸며내지도, 스스로의 감정을 억지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누구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나는 특정 감정을 정상성이라 판단하는가, 이방인을 읽을 때 그의 메마른 감정과 태도에 놀랐다. 솔직히 조금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읽는 내내 머리가 시원하게 정리되기보다는, 오히려 복잡하고 뒤얽힌 생각들만 자꾸 떠오르게 만드는 문체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생각하는 사회가 기대하는 방식이 무엇일지, 사람들이 생산하는 비난의 화살과 질타의 끝에는 대체 무엇이 존재하는지. 결국은 나도 주인공에 대하여 다른 사람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이 느꼈기 때문에, 끝끝내 사회적 가면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철없는, 이상한 상상일지는 모르지만 나도 주인공처럼, 나 역시 주인공처럼 어떤 감정에도 쉽사리 휘둘리지 않은 채, 무언가에 온전히 집중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꿈꾸는 삶, 감정으로 방해받지 않는 삶.

 

매 순간 모든 관계에 진심을 쏟고, 또 그만큼 상처받지 않으며 살아가기에는 나는 아직 너무 많은 풍파를 견뎌보지 못한 사람 같아 문득 그가 조금은 부러웠다.

 

감정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은 채, 이 세계의 중심에 오롯이 자신을 세워둘 수만 있다면 삶은 지금보다 조금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 적어도 불행이라는 감정이 천천히 나를 깊은 우물 아래로 잠식해 들어가는 비운의 일만큼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또 진심이 없기 때문에, 불행해질까? 어쩌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모든 삶이 허무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눈을 감게 될까? 지금의 내 마음과 타고난 성향으로는 평생을 그렇게 살지는 못할 듯하여 조금은 궁금해지는 것 같아 솔직하고 담담하게 마음을 공유해본다.

 

 

“사장은 내게 삶의 변화에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삶이란 결코 달라지는 게 아니며, 어쨌건 모든 삶이 다 그게 그거고,

또 나로서는 이곳에서의 삶에 전혀 불만이 없다고 대답했다.”

 

 

"대학생 시절에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았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해야 했을 때,

나는 곧 그런 모든 것이 사실상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나는 내가 대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었던 어느 바닷가의 그 특별한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옥에 있으면 시간 개념을 잃게 된다는 것을 나도 분명히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얘기가 별로 의미가 없었다. 하루하루의 날들이 얼마나 길면서도 짧을 수 있는지 나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하루하루는 지내기에는 물론 길지만, 하도 길게 늘어져서 결국 하루가 다른 하루로 넘쳐 나고 말았다. 하루하루는 그리하여 제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어제 혹은 내일이라는 말만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책을 끝까지 따라 읽다 보면, 허무주의에 가까운 정서가 작품 전반에 짙게 스며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세상만사에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하는 주인공과 이러한 그를 새롭고 재밌다는 듯 바라보는 주변인들, 그리고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인물들. 제법 다양한 인간군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방인을 읽을수록 뫼르소가 비인간적이라는 인상은 흐려졌다. 오히려 주인공은 삶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독자의 각색 요청에 대해 카뮈가 실제로 언급한 바에 따르면, 뫼르소는 겉보기와는 달리 삶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에게 관례대로 사회 공식에 따라 저지른 죄를 뉘우친다고 말하기 요구하지만, 그에게는 그저 귀찮은 일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러한 뉘앙스로 재판 과정을 거쳐 유죄 선고를 받는다.

 

카뮈는 주인공을 가난하지만, 가식이 없는 인간으로 한 군데도 어두운 구석을 남겨 놓지 않는 태양을 사랑하는 존재로 표현한다. 재판장이 살인을 저지른 명확한 이유를 집요하게 추궁하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태양 때문이었다고 답하였다.

 

사회적으로 틀린 사람은 무엇일까, 옳지 못하다는 악평을 받아야만 하는 정해진 오답의 군상이 있는 것일까. 앞서 길게 언급한 사회적 가면에 대한 성찰이 마지막쯤 되어서야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것 같다.

 

이방인에 대한 간단명료한 줄거리를 접했을 때 허무주의에 가까운, 그래서 오히려 냉소적으로 읽힐 만큼 현대 사회의 감각과는 다소 어긋난 주인공의 모습은 작품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드는 듯했다.

 

주인공을 토대로 삶이라는 건 어렵지 않다는 것, 삶은 매번 고민이라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거치며 그만큼 매사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 굳이 삶에 거창하고 특별한 유일무이한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는 게 아니라는 점.

 

우리는 언제나 마음속에 ‘목표’라는 지향점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교육과 권고를 끊임없이 받아 왔지만, 사실 진심으로 중요한 것은 목표 그 자체가 아닐 것이다.

 

뜨거운 태양을 한 몸으로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 푸른 바다를 볼 수 있고 파도 소리를 귀로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자연을 느끼는 다채로운 감각 속에서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 그것만으로 허무주의와 비관주의를 달아나게 할 수 있고 지금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뫼르소를 보고 느낀 점은 그러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했다. 본연 그대로, 물 흐르듯이.

 

삶은 성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우리는 늘 자각하지 못한다.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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