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생각해 본 적 있어?
그 사람을 구성하는 부분 중에 어디에 영혼이 담겨 있는지. 그 피조물을 보면 뭔가 불편한 기분이 들어. 일그러져 있는 게 왜곡된 거울에 비친 형상 같거든.
하지만 생명이 있지.
무엇에 생명이 깃든 걸까?
‘프랑켄슈타인’이라 함은 원작 소설과 동일하게 괴물을 상기시킨다. 인간이 과학적 동기로 창조하게 된 괴물은 창조한 인간뿐 아니라 주변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자멸로 이끈다.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프랑켄슈타인, 썸네일 속 이미지는 내가 평소 상상하던 과학 괴물을 일컬을만한 외형을 띄고 있었다. 낯선 얼굴, 공상과학 영화에서 주로 등장하는 비인간적인 모습. 당장이라도 선량한 주인공을 공격할 것 같은 악함에 가까운 외양.
그러나 실제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 나는 또 편견에 사로잡혔구나.’ 순간적으로 좌절하게 되었다. 같은 인종을 선호한다는 기질이 인간 무의식에 내재해 있듯이 동질성을 좇는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난 당연하게 이름조차 없는 버려진 창조물인 그를 인간과 다른 배척해야 할 존재라는 무의식적으로 편견 가득한 관념을 두둔하고 있었다.
델 토로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만연한 공상과학 그리고 ‘괴물 이야기’와는 달랐다. 주인공의 한낱 가벼운 책임감으로 던져진 창조, 버려진 생명체의 고통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둔다.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하나의 생명체를 창안하려는 사사로우며 거대한 집착에 빠져 그 끝에 시체를 연결하여 창조물을 창안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오직 ‘탄생’이라는 순간, 과학적 성취에만 몰두했을 뿐 그 존재를 거두고 인간적으로 품을 수 있을지에 대한 애정 어린 책임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빅터는 학대를 일삼게 되고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기는커녕 탑에 불을 질러 존재의 죽음을 이끈다. 자신이 고안한 창조물에 큰 두려움을 느껴 멀리 도주함으로써 그를 둘러싼 세상의 비극이 점차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빅터가 창조한 이름 없는 존재, 그는 본래부터 공격성이 내재한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에게 사랑받기를 원했다.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는 괴물, 언젠가 인간에게 해를 입히고 말 존중할 가치가 없는 괴물이라는 선입견을 스스로 강요하고 주입해 오던 빅터 프랑켄슈타인, 그와는 달랐다.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존재였다.
그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었지, 도움이 되고 싶었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뭘까?
그때부터 난 그들의 보이지 않는 수호자가 됐어. 숲의 정령, 때때로 그들도 내게 작은 친절을 베풀었지. 옷이나 빵으로. 그래서 잠시 짧고 짧은 시간 동안 세상과 나는 평화로웠어.
넷플릭스 썸네일과 타이틀 하나로 편견의 렌즈를 착용한 채 고정된 시선에 머물렀는데, 나조차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만일 내가 빅터의 창조물과 직접 마주했다면 분명 놀라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혹은 누군가가 그를 공격했을 때 마땅하다는 듯 방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의 행동이 경이로울 만큼 놀라웠다. 이름 없는 존재, 그를 빅터의 지하실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두려움보다는 그를 보듬어주고 싶다는 일종의 슬픔, 공감 인간을 어우르는 슬픔의 감정을 그의 눈에서, 눈동자에서 느낄 수 있었다는 그녀의 말.
그녀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를 따뜻하게 대우하고 대화하며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하나의 생각, 하나의 감각이 또렷해진 순간이었지. 사냥꾼은 늑대를 미워하지 않았고, 늑대는 양을 미워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들 사이의 폭력은 피할 수 없어 보였지.
이런 생각이 들더군. ‘이게 세상의 이치겠구나.’
어떤 존재하는 이유만으로 사냥당하고 죽임당할 수 있는 거야.
인간은 동질성을 선호하는 존재, 그러한 기질은 본능처럼 깊이 자리하고 있다. 만일 언젠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를 마주하게 된다면...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익숙함을 기준으로 타자를 쉽게 가르고 나누기 시작할 것인가.
편견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영화 속 창조물인 그는 감정을 파악하고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인간적인 생명체였다. 아니, 애초에 ‘인간적’이라 함은 무엇인가? 과연 인간이 그 논리를 두둔하고 그에게 ‘인간적’이라 평가할 권위와 자격이 존재하는가?
그의 인격을 예우하는 사람은 영화 속 엘리자베스를 제외하고 누구도 없었는데, 그의 인사와 호의는 묵살되었고 인간과 다른 외형은 공포로 치환되었다. 그를 향한 공격과 살인은 자연스러운 질서처럼 광범위하게 팽배해 있었다.
SF 영화에서 줄곧 출연하는 외계 생명체만을 기준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현세대는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무의식적 폭력이 만연하다. 익명성을 자유자재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SNS를 훑으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공익 광고와 형식적 교육에서는 차별을 금해야 한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세계시민주의를 지향하는 지구촌 사회를 꿈꾸자며 이상향을 빈번히 언급하지만 굳어져 온 지역 갈등, 인종 갈등, 국가 간 배척, 성별 갈등이 깊이 뿌리내려 있다.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조금은 반성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타인을 향해 쉽게 쏘아 올린 차별과 배척의 화살은 먼 훗날 결국 당신, 자신을 겨누게 된다.
"숨어 있었지? 방앗간 톱니바퀴 안에, 아니야? 그래, 숲의 정령이지? 자네 얼굴을 볼 순 없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 얼마나 선하고 다정한 사람인지.
함께 지내세. 내 음식과 불을 나누어 주지. 보잘것없지만 내가 가진 걸 나누는 기쁨도 있고 같이 있으면 내게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자네가 책도 읽어 주고 말이야. 여기는 집으로 삼고 나는 친구로 삼게. 우린 친구라네."
빅터의 집착으로 태어난 그는 떠돌이 신세로 인간 세상을 누비게 된다. 사냥꾼을 피해 도망치던 끝에 스며들 듯 들어가게 된 한 가족의 집, 그는 오두막 곁 헛간에 숨어 지내며 언어를 익히고 그들의 일원이 되기를 꿈꾼다.
나무를 모아 삶을 돕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노동을 대신하며 그들의 바람을 채워간다. 어느새 그는 소원을 들어주는 숲의 정령이 되었다.
생계를 위해 눈먼 노인을 제외한 가족이 모두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는 노인의 벗이 되었다. 자신을 무척이나 반기는 노인과 함께 그는 책을 읽고 지혜를 키운다. 애정을 배운다. 모든 걸 뒤덮고 정화하는 새하얀 눈에 대해서 배운다. 친구라는 이름의 온기를 배운다.
그는 세상사의 배움을 얻으며 문득 자신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자신은 왜 태어난 것인지, 인간과 극도로 다란 외형의 자신이 앞으로 가야 할 길.
"내가 뭔지 알았어요. 뭐로 만들어졌는지도. 난 시체 더미에서 태어났어요. 누더기죠. 쓰레기와 버려진 시체들을 이어 붙인... 난 괴물이에요."
"네가 뭔지는 내가 알지. 넌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넌 내 친구잖아."
노인이 늑대에게 습격당하고, 그는 울부짖으며 실토한다. 자신은 인간과 너무나 다른, 인간이 될 수조차 없는, 죽음이라는 안식이 절대 허용되지 않는, 존재 자체로 외면당해야 하는 괴물이라는 것을.
죽음에 가까워진 노인은 그의 눈을 찬찬히 살핀다. 당신은 내 친구, 좋은 사람, 벗이야.
날 데려온 밀물이 썰물이 되어 당신을 데려가네. 나만 덩그러니 남기고.
용서해 다오. 내 아들아, 그리고 마음이 내킨다면 스스로 용서하고 네 존재를 받아들여.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이걸 생각해라 아들아.
살아 있는 동안엔 네게 주어진 길은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걸.
내 이름을 불러 다오. 아버지가 주신 이름이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지.
네가 그 이름을 돌려주겠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처음 그 이름을 불렀을 때처럼. 그땐 네 세상의 전부였잖아.
빅터. 당신을 용서할게. 이제 쉬어.
아버지, 우리도 이제야 인간이 될 수 있는 걸까?
빅터를 향한 용서, 자신을 무참히 묵살하고 버렸던 아버지, 이 용서를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는 자신을 내치고 소외하는 인간을 증오하지 않았다. 그를 보고 공포심에 떨며 무지막지하게 총을 겨눴던 것은 그가 바라고 바랐던 사랑하는 ‘인간’이었다.
단순한 고전의 재해석이 아니다. 괴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타인을 향한 혐오와 배제, 그 모든 부정적 감정이 뒤엉켜 괴물이 탄생하고 인간사를 잠식한다. 우리는 과연 타자를 괴물이라 부를 수 있는가, 당신의 편견은 안전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