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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 상자 속의 양 [도서]

대본집 '상자 속의 양'에 대한 개인적 단상

by 문경란 에디터
2026.08.0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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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인간의 '애도'에서 비롯되며, 오직 '애도'를 위해 시작된다. 건축가 오토네와 목수 켄스케 부부는 2년 전 불의의 사고로 7살 아들 카케루를 잃었다. 그리고 어느 날, 죽은 사람의 외모와 목소리, 기억을 재현한 휴머노이드를 렌털해 주는 업체 '리버스'의 광고를 접하고, 고민 끝에 아들과 똑닮은 로봇 카케루를 집으로 받아들인다. 2026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위해 쓰인 이 대본집은 가족적이고 인류애적인 이야기로 상처를 보듬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의 이면을 은밀하게 꼬집어낸다. 인물들의 말과 행동 속에서 그 부분들을 발견해 나가며 이 이야기의 세계를 확장시켜 보고자 한다.

 

 


#1. '카케루'는 누구인가


 

이 이야기 속의 '카케루'는 두 명이 존재한다. 부부가 마음속으로 절절히 애도하는 그들의 아들 '카케루'와, 애도를 위해 집으로 들인 휴머노이드 '카케루'이다. 이들 부부의 간절한 염원과 욕망은 결국 그 대상을 대체할 존재를 집으로 들이는 방식으로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시도로 나타난다. 휴머노이드 '카케루'는 아들 '카케루'를 둔 부부가 선별하여 보낸 일부 기억과 추억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그 기억들과 중첩될 수 있는 일부 상황에서는 아들과 유사하게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 이외의 부분에서는 마치 제3자같이 멀게 느껴진다. 이미 알게 모르게 존재하였던 균열은 이러한 간극으로 인해 더 크게 벌어진다. 이를 통해 '카케루'를 대하는 부부의 생각과 태도 또한 변화함을 엿볼 수 있다.


'카케루'를 대하는 부부의 태도와 방식은 인물별로, 그리고 시점과 상황별로 모두 상이하다. 초반, 오토네는 '카케루'의 존재를 2년 전 죽은 아들의 '부활'로 겹쳐 본다. 더 이상 손으로 만져볼 수 없고, 목소리를 들어볼 수 없는 아들의 부재로 인한 염원이 너무나 강렬하였고, 그로 인해 당장 똑닮은 모습으로 눈앞에 있고, 안아볼 수 있는 존재였기에 다시 품으로 돌아온 아들이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한편, 켄스케는 '카케루'가 아들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한다. 카케루에게 아빠가 아닌 아저씨라고 부르게 하며, 오토네 몰래 휴머노이드 카케루가 알지 못하는 아들 '카케루'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지점은 부부가 동일하게 휴머노이드 '카케루'를 인간이 아닌 명백한 비인간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토네가 '카케루'를 자신의 아들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가 먹을 수 없고 씻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것은, 그 존재의 본질을 무의식적으로 명확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켄스케가 자신의 아들로서 '카케루'를 부정하는 근본적 이유와 일치한다.


 

...괴로움이나 슬픔 같은 건 없나요?

 

마음이 없으니까요. 만약 그런 식으로 보였다면 그건 당신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카케루'를 비인간적 존재로 내적으로 규정하는 인식은 서사가 전개될수록 짙어지며,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근거들이 드러난다. 부부는 카케루를 감정이 존재하지 않고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로 무의식적으로 간주한다. '카케루'가 인간의 기계적 산물로서 자신들에 대한 복종을 저버릴 것이라고 상상하지도 못한다. 이러한 독단적 착각으로 인해, 그들은 카케루가 마침내 집을 나와 휴머노이드 무리와 함께 숲으로 떠날 때까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자신들이 계약을 해지할지 말지에 대해서 갈등하였다. 그들은 카케루를 하나의 주체가 아닌, 그들의 감정적 결핍을 메워 줄 객체로 여겼던 것이다. 결말에 다다라 아들의 부재와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카케루를 숲으로 보내고 나서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존재의 분리를 인정한다.

 

 


#2. 나무, 인간 그리고 휴머노이드


 

작품 내에서 휴머노이드들은 반복적으로 나무에 자신들의 존재를 비유하고 대응시킨다.


 
카케루: 나무가 죽으면 균류가 분해해서 흙으로 돌아가게 해. 그리고 다시 거기서 새 나무가 자라지. 그런 순환 시스템은 우리들과 닮아 있어.
 

 

인간인 부부와 휴머노이드 카케루 사이의 '나무'는 그들이 공유하는 추억이자 관심사로 지속적으로 서사 속에 등장한다. 나무의 존재는 인간과 휴머노이드 사이, 즉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장치로 작용한다. 나무는 인간에게도 타자이고, 휴머노이드에게도 동일하게 타자이다. 동시에 '호흡'과 '순환'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과도 유사하고, 휴머노이드와도 유사한 특성을 지닌다. 휴머노이드들은 나무에 대한 동질감을 느끼며 그들과 공존해야 할 타자로 바라본다.

 

한편, 인간이 타자를 인식하고 대하는 방식은 휴머노이드가 타자를 대하는 방식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인간에게 나무와 휴머노이드, 즉 자연과 기계는 타자인 동시에 '비인간'적 존재들이다. 인간들이 공유하는 '인간적'인 특징들이 상당 부분 결여된 존재들인 것이다. 나무와 휴머노이드는 인간에 의해 존재가 지속적으로 재정의된다. 나무는 일상 속에서 쉬이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그리고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애도와 욕망을 채우는 존재로, 각각은 인간이 붙인 명칭과 의미에 따라 규정된다. 중요한 점은 인간이 이러한 재정의 과정에서 나무와 휴머노이드 각각이 지닌 '생명'과 '자아'라는 존재론적 본질을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무가 인간과 유사한 생물학적 특성을 지닌 '생명'이라는 것, 휴머노이드들이 스스로 자유를 갈망할 수 있는 '자아'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정의하는 범주 내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러한 차이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그저 '타자'로 인식하는가, 아니면 '비인간'적 존재로 인식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휴머노이드들이 나무를 그저 '타자'로 인지하였기에 그들과의 동질감을 느끼는 데 있어서 거부감이 적었지만, 인간들은 나무를 인간중심적 측면에서 '비인간적 존재'로 명백히 간주하였기에 그 본질을 왜곡되게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나무뿐 아니라 휴머노이드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유사하게 작용한다. 그들이 휴머노이드의 존재를 소화하는 방식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아닌, '비인간적 존재'에 대한 배제와 차별에서 기인하였기에 휴머노이드들이 하나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쉬이 망각한 것이다.

 

 


#3. 집과 숲, 공간의 대비


 

집과 숲은 각각 인간과 비인간의 '삶의 터'라는 공통점을 공유하는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대비된다. 집은 인간의 영역으로, 끝없는 애도의 공간이다. 건축가 오토네는 수많은 나무를 재료 삼아 오로지 의뢰인을 위한 집을 설계하고, 목수 켄스케는 그 나무를 직접 다듬고 짜 맞추며 살아간다. 그리고 부부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카케루를 품에 안고, 다시는 안아 볼 수 없는 '진짜' 카케루를 위한 눈물을 흘린다. 이것은 존재의 상실을 진정 인정한다기보다, 애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주술적 행위에 더 가까워 보인다. 돌아올 수 없는 존재를 다른 존재를 통해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염원하기 때문이다. 한편, 숲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비인간의 공간이자 부재와 죽음에 순응하는 공간이다. 주인공 부부는 카케루를 포함한 휴머노이드들이 숲으로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것을 돕는다.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휴머노이드 카케루의 자유에 대한 욕망을 직접 눈으로 보자, 결국 두 존재를 분리해 내고 죽음을 인정한다.


 

카케루: 나무랑 우리라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소재를 조화롭게 연결시키고 싶거든.

 

 

눈에 띄는 부분은 주인공 부부가 휴머노이드를 위한 숲을 조성하는 것을 돕는 결말이다. 인간만을 위한 삶의 터전을 짓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과 기계라는 비인간적 존재로 간주되던 '타자'들을 위한 건축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들과의 화합과 조화를 상징한다. 이것이 이야기에 '건축'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는 이유와도 공명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건축'은 인간과 비인간의 공간을 분리할 수 있는 행위임과 동시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들을 한 공간에 공존시킬 수 있는 행위이기도 하다. 인간과 비인간으로 규정될 수 없는 '모두'를 위한 공간을 쌓아 올리는 행위는 범우주적 존재들을 위로하며 인간 또한 위로받는다. 그 위로 속에서 오토네와 켄스케는 그들의 마음속에 떠나보내지 못하고 묻어두었던 아들의 존재를 진정 애도하게 된다.

 

 


#4. '상자 속'의 양, 그리고 상자 속의 '양'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에게 어린 왕자가 양을 그려 달라고 보챈다. 하지만 조종사가 그려 준 양들은 어린 왕자에게는 너무 아파 보였고, 너무 늙어 보여 오래 살 수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가 계속 거절하자, 지친 조종사는 구멍이 뚫린 상자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양이 들어 있다고 건네준다.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는 양은 그 상자 안에 들어 있어."


'상자 속'에 숨겨져 있는 양은 두 눈으로 그 존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단, 그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도, 양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어린 왕자가 어떤 모습의 양을 원하든 그 양은 상자 속에 틀림없이 들어 있을 것이다. 어린 왕자가 양의 존재를 변치 않고 믿는다면,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양이라는 본질은 변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토네: 상자 속에 있는 건 엄마였구나, 카케루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 본질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오토네가 보는 아들 '카케루'와 휴머노이드 '카케루'는 육안으로 보기에는 똑닮았지만, 결국 다른 존재였다. 또한 육안으로 보기에는 전혀 달라 보이는 나무와 휴머노이드, 그리고 인간은 모두 제 자신의 현존을 위해 나름대로의 '호흡'을 하고, '순환'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같은 본질을 공유한다. 눈으로 보는 것들은 쉽게 우리를 만족시키고 속인다. 시각적으로 재현된 존재에 대한 정의는, 그 본질에 진정으로 닿기 쉽지 않다.

 

어린 왕자에게 '양'은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이자 교감의 매개체이며, 그가 책임감을 느끼는 대상이기도 하다. 어린 왕자는 바오밥나무의 싹을 솎아내기 위해 양을 길렀지만, 자신이 아끼는 장미를 먹을 수도 있기에 그 양을 돌보는 데 있어 책임감을 느낀다. '양'들은 휴머노이드들과 다르면서도 비슷해 보인다. 인간들의 외로움을 달래고 상실을 부인하려는 마음을 잠시나마 달래기 위해 탄생시켰지만,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계약이 해지되고 버려진다.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발생하는 책임감의 부재는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양들이 장미를 먹어버릴 수 있듯, 인지하지 못한 채 책임을 방치하는 사이 우리는 '진정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다. 그 존재가 무엇이 되었든, 우리의 욕망으로 빚어낸 존재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현시대의 인류가 마주해야 할 AI와 인간형 로봇에 대한 윤리적 논제들과 맞닿아 있음이 분명하다.


 
카케루: 걱정하지 마. 보이지 않아도 곁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계약은 종료하는 거로 해요.
 

 

 

#5. 마무리하며: 앞으로 우리는…


 

결국, <상자 속의 양>은 인간의 '애도'에 대해 '범우주적 위로'로 답한다. 우리는 작품을 읽으며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진정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스스로의 욕망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존재들에 대해 고민해 나가야 한다. 고도로 발전한 기술화 시대의 AI와 기계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저 '비인간적 존재'에 그쳐선 안 된다. 카케루가 나무들을 이해하려 했던 것처럼, 타자를 이해하려는 시도와 노력은 이제 우리가 배워 나가야 할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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