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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누가 진짜 괴물인가 [영화]

영화 <호프>가 그리는 인간의 무지와 타자의 쓸쓸한 얼굴

by 문경란 에디터
2026.08.01 19:17

1. 왜 하필 호포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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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 생명체의 등장이라는, 어쩌면 인류사를 뒤흔들 만한 대사건의 무대로 나홍진 감독은 '호포항'이라는 가상의 마을을 선택하였다. 비무장지대 인근의 늙고, 낙후된, 세상의 관심에서 완전히 비껴 있는 어촌 마을, 그곳은 최전선이면서도 가장 방치된 곳이었다. '인류'라는 거대한 개념 아래, 실상 얼마나 불균등하고 무심한 분배로 생명을 영위해나가기에 급급한지, 결국 그 비극과 위기들을 온몸으로 관통하는 존재들은 언제나 중심보다는 주변부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이러한 의뭉스러운 공간적 배경에서 유추할 수 있었던 메시지는 영화의 주제를 예고하고 있었다.

 

 


2. 마을에서: '무지함'은 무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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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배제는 곧 인식론적 부재로 이어진다. 영화 초반부의 화면들과 서사들을 따라가다 보면,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불편한 지점은 우리가 '괴물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 범석에 의해 목격되는 극 초반의 서사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완연히 조립되지 못하고, 연쇄적으로 크리처의 존재와 위력이 예고되는 방식에 그치기 때문이다. 범석은 늘 한 발 늦게 도착해 크리처의 현상을 두 눈에 담을 기회를 놓치고, 주변 인물들에 의해 구전되는 불완전한 묘사들만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결국 관객들은 '가장 잘 알지 못하는 자'의 '무지'의 눈으로 사건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하지만, 이 점이 극중 긴장을 해체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지'와 '미지'라는 인식의 결핍 속에서 비롯되는 위압감은, 공포 그 너머의 경외의 감각을 체험하게 한다. 결국 가장 무력해지는 것, 무서운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극 전반부의 무대는 과거 삶의 본거지였던 마을에서 시작한다. 이 파트의 클라이맥스에 거의 도달하는 지점에서 범석과 낙연 듀오가 과실로 정육점 사장 경석을 살해하게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본래 인간이 동물과 같은 비인간적 존재를 도살하던 공간이 인간이 동일 인간을 살해한 공간으로 변질된다는 설정은 날카로운 아이러니를 남긴다. 이 장면은 차후 언급할 포스트인류중심주의적 관점에서도 강력한 근거로 작용한다. 동시에 인간의 '무지함'과 '무모함'이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이다. 당연스레 SF 영화에서 연상되는 '크리처를 죽이는 인간', '인간을 학살하는 크리처'의 모습과 다르게, 스스로의 공포에 압도된 인간들이 같은 인간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장면은 해학적으로 연출되었지만, 더 이상 무고하지 않은 인물들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증폭시킨다.

 

 


3. 산으로: 피식자로 전복되는 순간


 

인간의 질서와 법, 도덕이 __형식적으로나마__ 작동하는 마을과 다르게, 후반부의 '산'은 그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는 공간이다. 인외의 공간으로의 이동에서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의 위치에서 목숨을 갈구하는 피식자로 전복된다. 산 나뭇가지에 널려있는 사냥과 박피의 흔적들은 사건 이전 포식자로 군림하였던 인간의 역사를 비추는데, 이에 무색하게 크리처들의 반격에 무참히 학살되는 인간들을 보며 우리는 초조함을 느낀다.


동시에 크리처들의 디자인은 공간의 변화와 어느 정도 조응한다. 마을을 헤집어 놓은 '바미기르'는 비교적 거인의 형상에 가까워 보였지만, 산에서 등장하는 크리처들은 나뭇가지와 나무껍질 같은 자연물을 연상시키는 텍스처로 보였다. 또한 연속적으로 앞에 보이는 물체들을 집어던지며 공격하는 경향을 보인 '바미기르'보다, 산에서의 격투를 보인 '마베이요'의 일격은 이성을 잃고 돌격하는 짐승같은 전력으로 인물들을 압도했는데, 이는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닌 하나의 태도를 표명하는 것과 같이 느꼈다. 이러한 연출은 분개하는 자연 아래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허무한 존재인지에 대한 경외감을 가중시킨다.

 

 

 

4. 톱질과 총질: '진짜' 크리처는 누구인가


 

개인적으로 영화 속에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장면은 범석이 괴물의 해부를 요청한 박사가 죽은 크리처를 해부하는 부분이었다. "사람 손과 같은 형태네요.", "우리랑 똑같네.", "걔 아까 우는 것 같던데"와 같은 인간과의 동질감을 표방하는 대사들을 뱉으면서도, 그녀의 손에 들려진 톱은 멈추지 않는다. 광폭한 톱질이 질긴 외피를 가르고 결국 내장을 드러내는 순간에, 고조되는 듯한 불안한 배음이 깔리며 마치 슬래셔 무비를 관람하는 것 같은 꺼림직함이 동반된다. 그리고 그 광적인 행위의 끝에 얻어낸 결론은 고작 "이건 우리가 아는 쪽이 아닙니다."라는 무지의 재확인뿐이다. 알 수 없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살육'을 실행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은, 영화가 말하는 '진짜 괴물'의 실체가 외계 생명체를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이 모든 비극의 서막에는 목수 양배가 있다. 숲에서 아기 외계 생명체를 총으로 사냥해 집으로 데려온 그의 행동에서부터 재앙은 본격화된다. 이 지점에서 숲과 마을이 교차편집되며 양배의 집을 비추는데, 그의 집에 전시된 파손된 마네킹과 즐비한 박제동물 등의 가학적이고 불길한 오브제들이, 마치 호러무비 속 살인마의 집에 입장하는 것만 같은 긴장감을 조성한다. 크리처의 존재보다 더 공포스럽게 조성된 양배의 공간은, 인간의 내밀한 잔혹성이 외부 미지의 존재보다 더 근원적 공포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5. 포스트휴머니즘, 포스트인류중심주의의 시각에서



우리를 극 속으로 인도하는 주인공 범석은 단지 무지하지만은 않다. 무지함과 동시에 겁도 많고, 무능한 자의 전형이다. 바로 뒤에 괴물이 있음에도 알아채지 못하고, 경찰임에도 노쇠한 마을 주민들만큼도 총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극을 이끄는 범석의 캐릭터성이 인류 전반의 경향들과 공명하며, 그간 인간들이 오인해 온 지점이 처절하게 드러난다. 포스트휴머니즘 관점에서, 그동안 스스로를 고결하고 인도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우월감으로 자신을 고취해 온 인간들이 보이는 무지하고 무모한 행태들은 적나라한 만큼 인정하기 쉽지 않다. 해부학 박사의 손에 들린 톱, 정육점에서의 총질, 양배의 집에 전시된 물건들__ 이 모든 화면들이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해온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라는 이미지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포스트인류중심주의의 관점에서는 초점이 조금 다른 지점을 향한다. 인간이 비인간적 존재를 얼마나 가학적으로, 그리고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규정해 왔는지를, 이 영화는 집요하게 따라가며 포착한다. 양배의 소행을 인지한 후에야 '괴물'에서 '외계인'으로 전환되는 호칭, 신체를 해체해버리는 해부를 통해 대상을 규명하려는 잔혹성, 눈물을 보고서야 비로소 감정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뒤늦은 연민__ 이 모든 순간들이 인류의 기준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타자를 재단하는 인간의 경향성을 투영한다.

 


 

6. 희망은 어디까지 뻗어나가는가



제목을 장식한 'HOPE(희망)'라는 단어는 이 영화에서 결코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대사와 "운명을 바꿔라"라는 명령은, 우리가 이 디스토피아적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서로를 믿고 운명을 바꾸려는 시도와 노력뿐이지 않을까 사고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서로'의 범주는 인간, 그 너머까지를 포용한다.


이 영화가 제기하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__ 희망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뻗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인류인가, 국가인가, 세계인가, 아니면 우주 전체인가. 죽은 줄 알았던 성기가 살아있고, 아기 외계인 칼리를 되살릴 수 있다는 암시로 영화가 끝맺는 방식은, 이 희망이 결코 인간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7. 마무리하며: 누가 진짜 괴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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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서는 인간 중심적 휴머니즘의 비극을 코스믹 호러와 크리처물의 문법으로 풀어내는 영화의 계보 안에 자연스럽게 위치한다. 멀리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부터, 가까이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만들어내거나 마주한 비인간 범주 속에 위치한 '타자'들이, 실은 인간보다 더 순수하거나 더 상처받기 쉬운 존재였다는 인식은 반복되어 온 서사적 전통과 유사하다. <호프>가 풍기는 분위기는 이들과 사뭇 다르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질문 __누가 진짜 괴물인가__ 은 상당히 유사한 계보 위에 놓여 있다고 느꼈다.


<호프>는 결국 웅장한 스펙터클과 크리처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지극히 오래되고 근본적인 것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만났을 때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그 무지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파괴한 후에야 비로소 '이해'라는 이름의 뒤늦은 연민에 도달하는가. 그 일상적 오류들이 전우주적으로 확장된 순간에 희망을 부르짖는 영화의 공상이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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