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네마의 모든 것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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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다면 기실 그림자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영화산업도 그렇다. 아니 오히려 영화산업은 그 경계가, 명암이 더 뚜렷할 수밖에 없다. 스포트라이트가 종일 내리쬐는 세계이니 말이다.
스포트라이트는 때로 관객의 눈을 가리고, 뒤켠에 그늘을 남긴다. 극 초반 영화사 주최 파티 시퀀스에서 생명이 위급한 미성년자를 몰래 운반하기 위해 코끼리를 끌어들여 참석자들을 현혹시키는 것이라거나, 로케이션 촬영 도중 엑스트라 한 명이 창에 찔려 사망하는 돌발 사고가 발생해도 개의치 않고 촬영을 재개하는 것이 그렇다.
이렇듯 인간이 소비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치환되는 영화 시장에서는 한때 인기의 절정에 있었던 스타라 할지라도 그러한 숙명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무성영화(정확히는 무언 영화)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잭과 섹슈얼한 이미지의 라이징 스타 넬리는 유성영화기에 접어들어 발성 연기에 적응하는 데 부진해 시장으로부터, 대중으로부터 잊힌다. 그들의 부고는 짤막한 기사로만 언급될 뿐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해도 그 조명에 의해 소외되는 인간(시드니 팔머)도 있다.
그렇다고 <바빌론>을 할리우드의 추악한 실상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단정하기엔 매끄럽지 않은 것이 또 그만큼 영화에 대한 헌사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애정이 물씬 느껴지는 대목과 장면들이 곳곳에 틈입한다는 것이다. 극중 주요 인물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영화의 덕목에 대한 감독의 믿음은 ‘확장’이라는 키워드로 압축될 수 있다. 극의 초반 넬리와 마약을 즐기던 매니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의미 있는 그런 일을 하고싶어”라 한다. 이에 보태 매니는 영화가 지긋지긋하고 별 볼일 없는 자신의 인생의 돌파구가 되어줄 것이라 확신한다. 영화 속에서는 총을 맞아도 몇 번이든 살아나고, 우주로도 떠날 수 있는,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한 동경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이다.
잭과의 대화에서 비평가가 상심해 있는 그에게 건네는 의미심장한 조언 “언제라도 당신 영화를 다시 트는 순간 당신은 다시 살아날 거야”도 결국은 인간의 시간성을 영원성으로 확장하는 영화의 성질과 맞닿아 있다.
그런가 하면 영화의 통속성을 폄하하는 엘리트주의 예술가의 편협함을 일갈하는 잭의 대사 “내가 하는 일은 의미가 있어. (...) 거기엔 아름다움이 있어. 저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의미가 있어. 상아탑에 있는 너희한테는 아닐 수 있어.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건 의미가 있어.”, “우리는 혁신적이어야 해. 우리는 영감을 줘야 해. 우리는 필름 위에 꿈을 가지고 오늘이 내일이 되는 장면을 아로새겨야지. 그걸 본 미래의 외로운 남자가 깜빡이는 화면을 올려다보며 외치겠지. 유레카! 난 혼자가 아니야.”는 창작자와 수용자의 연결, 시대를 초월한 연결, 예술 영역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다른 층위의 확장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시대사적으로 인간에게 상당히 숭고하고 유의미한 산물이다.
그럼 명과 암이 혼재한 이 텍스트를, 태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빛을 강조한 것이라기엔 그림자가 거슬리고, 그림자를 들춘 것이라기엔 종반 몽타주에서 영화에 대한 애정과 나르시시즘이 너무 노골적이다. 이러한 모호함 혹은 모순 때문에 호오가 갈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호'다. 굳이 정의해야 할까라는 의문에서부터 애초에 영화라는 산물이 하나의 속성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던가 하는 회의론적 물음을 던져봤을 때 그 지점을 잘 건드리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모호하고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자본과 인본, 상업과 예술 반대 급부의 것이 뒤섞인 복합물인데 이를 단일 명제로 정의하는 것은 편의적일지는 몰라도 얄팍한 접근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텍스트의 양가적인 스탠스, 달라붙지 않고 부유하는 시퀀스들이 오히려 영화라는 매체를 적확하게 이해시키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김민서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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