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글을 다시 읽는 걸 매우 민망해하는 성격이다. 게다가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어제 했던 말이나 행동도 금방 잊는데, 신기하게도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하기 위한 글을 썼을 때에는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가 모두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이번에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기억이 유독 선명한 네 편을 시간 순서대로 골라보았다.
관념을 모아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기억
[Review] 나 자신의 분신을 찾는 여정 - 데미안 [도서]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6968
내가 쓴 리뷰 중 처음으로 헤드라인을 달았던 글이다. 어렸을 때 분명히 ‘데미안’을 읽었던 기억은 나지만 매우 희미했다. 성인이 되고 다시 읽어보니 관념적인 내용을 붙잡고 있는 게 쉽지는 않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책을 읽었다고? 아니, 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많은 초등학생이 이런 걸 읽었단 말이야? 라는 생각도 들었다.
글의 마지막에는 우리가 선과 악의 공존을 감각할 줄 알아야 자신이 갇혀있던 알을 깨고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이 탄생한다는 내용을 적었다.
“선과 악의 공존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 아닌가. 둘은 물과 기름과 같이 섞이는 게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존재한다. 나와 가까운 인간을 떠올려보자. 친구, 가족, 애인 등 여러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이들은 온전한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편안함과 따뜻한 안락함을 제공해 주더라도 '다른 세계'가 공존한 어린 시절 싱클레어의 집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선과 악의 공존을 얼마나 더 온전히 감각하느냐, 혹은 감각하지 못하느냐, 혹은 외면하느냐 셋으로 나뉠 뿐이다. 나는 우리가 이 공존을 더욱 온전히 감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것으로부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이 탄생할 것이다. 자신이 갇혀있던 알을 깨면서 말이다.”
결국 이 글은 선과 악의 공존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다루면서도 결국 싱클레어가 알을 깨고 나오기까지의 여정, 그리고 그 여정이 '나 자신의 분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결론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이 글은 손에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 생각들을 모으고 모아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기억이 난다.
공연을 준비하던 3개월의 기억
[Opinion] 피고인을 삶의 형에 처합니다 [도서/문학]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7151
개인적으로 마음에 쏙 드는 글은 아니다. 하지만 특별한 경험이 녹아있어서 이번 큐레이션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 2학기, 연극동아리 공연으로 이 희곡을 무대에 올렸었다. 원래 소설가였던 작가의 희곡을 공연으로 옮기는 과정이라 유독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무사히 마무리했던 다사다난한 학기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은 죽어서도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 재판은 피고인이 갈 곳을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가르는 게 아니라 ‘피고인이 충분히 영적인 삶을 살았는가'를 묻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판결로 '삶의 형', 즉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완성되지 않은 존재에게 주어지는 건 또 한 번의 기회이자 형벌이라는 이 아이러니가 지금 생각해도 이 희곡을 무대에 올릴 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글의 마지막에는 삶이 운명이면서도 동시에 자유의지의 몸부림이라는 결론을 적었다.
"반드시 태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삶은 운명이고,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설계하려는 몸부림은 자유의지인 것이다. 따라서 아나톨의 심판은 곧 우리의 심판이다. 우리는 충분히 성숙했는가, 우리의 다음 삶을 준비할 수 있을 만큼 충실히 살았는가. […] 당신은 과연 천상의 재판에서 다음 생의 형에 처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지금 다시 읽으면, 이 희곡을 직접 무대에 올렸던 경험 때문인지 이 질문이 유독 크게 다가온다. 완성되지 않은 존재에게 주어지는 형벌이자 기회라는 아이러니를, 그때는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으로만 썼는데, 지금은 그게 결국 나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었다는 게 보인다.
영화론을 배운 한 학기의 기억
[Opinion] 당신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영화]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7877
전공 수업으로 영화론을 한창 배우던 학기에 쓴 글이다. 수업 내용을 토대로 매주 다른 영화를 분석했는데, '헤어질 결심'도 그 중 하나였다. 이 오피니언을 쓰면서 동시에 수업 내용을 정리했고, 덕분인지 그 학기 그 수업에서 A+를 받았다.
글의 도입부에서는 '미결'이라는 단어 하나를 이렇게 풀어냈다.
"미결(未決), '아직 결정되지 않음', 혹은 '결말이 나지 않음'. 한자로 '아닐 미(未)'와 '결단할 결(決)'의 만남이니, 어떤 결말도 허락되지 않은 채 영원히 미뤄진 상태를 의미한다. 누군가의 미결 사건이 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그 문제를 영원히 풀 수 없다는 절망을 안겨주는 동시에 […] 그를 영원히 붙잡아두며 그의 기억 속에 절대 잊히지 않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선명한 의지이다."
이 단어 하나를 붙잡고 송서래라는 인물을 분석하고자 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미결 사건이 되기로 결심한 게 아니라, 세 개의 목적을 차례로 이뤄가는 과정에서 결국 그 자리에 도달했다는 것.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결말이, 쓰는 내내 나를 붙잡았던 기억이 난다.
강렬했던 두 시간의 기억
[Review] 이제는 New Media 독재의 시대 - 연극 '맵핑히틀러' [공연]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80413
'맵핑히틀러'는 정말 재밌게 관람한, 아주 혼이 쏙 빠지는 연극이었다.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는 연출이 '이래도 지루할 수 있겠어?'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이렇게 역동적인 연극을 어떻게 글로 옮겨야 생동적일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래서 나온 게 이런 도입이었다.
“청자켓과 청반바지를 입은 배우 세 명이 나란히 선다. 한 명은 대통령, 한 명은 국방부장관, 나머지 하나는… 음, 조금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아무튼 셋은 대한민국의 주축이다. 말 한마디한마디에 욕설이 난무하고, 취임식 두 시간 전 맞춰둔 알람조차 기억 못한다. 소꿉놀이처럼 보일 지경이다. 통상적으로 떠올리는 권력자와 사뭇 다른 그들의 행태에, 관객들은 하나둘 "어떻게 이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주축이 된 걸까?"라는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들호는 무대의 시공간을 자신의 고시생 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정신없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짧은 암전 사이 순식간에 소품 배치가 바뀐다. '대', '댓', '글' 역 배우들의 춤사위에 정신이 팔릴 즈음 조명이 켜진다.”
연극의 시작 장면을 최대한 눈에 보이게, 그리고 내가 무대를 보며 했던 생각을 장면화하여 글에 담고 싶었다.
글의 중반부에서는 히틀러 시대의 미디어와 지금의 미디어가 어떻게 다르게,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이렇게 짚었다.
"유튜브는 자본주의와 가장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플랫폼이고, 그렇기에 강력한 권력을 가진다. 한들호의 천만 구독자는 곧 팬덤이 되고, 팬덤은 '공격개시당'의 비리를 덮어버리는 힘이 된다. […] 히틀러는 더 이상 먼 역사 속의 괴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출몰할 수 있는, 너무나 익숙한 어떤 얼굴이 된다."
역사를 단순히 알레고리로 빌려오는 게 아니라 그 구조 자체를 해부한다는 점, 그리고 미디어 권력이 일방향에서 양방향으로 옮겨가면서도 파시즘의 문법은 그대로 반복된다는 점이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이었다. 풍자의 칼날이 결국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우리 모두를 향한다는 결말까지 오면, 이 작품이 왜 지금 시점에 유효한지가 분명해진다.
글을 쓴다는 건, 글을 다시 읽는다는 건
나에게 글쓰기의 매력은 여러 가지로 작동하지만, 이번 셀프 큐레이션을 진행하며 느낀 새로운 점이 또 하나 생겼다. 글을 쓰던 당시의 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제법 분명하게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며칠 전 일도 다 잊는데,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오피니언과 리뷰뿐만 아니라 여러 습작들, 과제로 제출한 비평문과 단막극을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전부 기억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글을 쓴다는 건 그 순간의 생각을 문장이라는 형태로 붙잡아두는 일이니까. 말은 흘러가고 행동은 스쳐 지나가지만, 문장은 한번 쓰이고 나면 그 자리에 남아서 내가 그때 무엇을 붙잡고 씨름했는지를 알려준다. 결국 글을 다시 읽는다는 건 그 문장을 쓰던 순간의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었다.
아마 이건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일기를 오래 써온 사람이든, 어쩌다 남긴 메모 한 줄이든, 자기 글을 다시 읽어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경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기억은 다 흐려져도, 무언가를 붙잡고 애써 문장으로 옮겼던 순간만큼은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있는 경험 말이다. 그렇게 보면 글쓰기란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붙잡아두는 나름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나는 좋았던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 한 줄이라도 글로 남겨두는 중이다. 부디 효과가 있길 바라며, 셀프 큐레이션을 마무리한다.
역시 나는 나에게서 글을 떼어놓을 수 없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