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지브리 스튜디오 영화가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늘 다른 답을 말해왔다. 어렸을 때는 멋쟁이 고양이 '바론'이 나오는 <고양이의 보은>이 제일 좋았고, 그 뒤로도 <이웃집 토토로>, <천공의 성 라퓨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최애 지브리 작품은 계속 바뀌었다.
그중 <마녀 배달부 키키>는 사실 한 번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된 적은 없었다. 사랑스러운 키키와 지지가 등장하는 예쁜 색감의 영화이지만, 다른 지브리 스튜디오 영화들에 비하면 다소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가오는 <마녀 배달부 키키>의 4K 리마스터링 재개봉을 맞이하여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키키의 이야기는 어른이 된 지금 나에게 예상치 못하게 와닿았다. 키키도 우리와 같은 사회 초년생이었던 것이다!
키키는 전통적인 마녀의 관습에 따라 13살에 독립하여 마녀 수련을 떠난다. 마녀 수련생들은 자신이 살 마을을 직접 고르고 각자의 특기를 활용하여 생계를 꾸려나가며 마을에 정착해야 한다. 키키는 바다가 보이는 남쪽 마을에 살고 싶다는 목표 하나를 가지고 고양이 지지와 함께 가족, 친구들과의 작별 인사를 한다. 맑을 것이라는 일기예보와 다르게 폭우가 내려 급하게 정차해있는 기차에서 노숙을 해야 했지만, 전화위복으로 기차는 키키가 원하던 바다가 보이는 대도시를 향해 간다. 그렇게 키키가 도착한 도시는 마치 서울 같았다. 도로를 메운 자동차와 세련된 옷을 입고 바쁘게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낯선 도시라는 점이 말이다.
도시에서는 마녀의 문법이 통하지 않았다. 마녀를 아주 오랜만에 본다고 하는 사람들, 차도에서 위험하게 날자 쫓아오는 경찰관, 마녀의 수련이 무엇이든 미성년자는 보호자 없이 투숙이 어렵다는 호텔 등 13살의 어린 소녀가 도시에서 제 한 몸 누일 자리를 찾기란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다행히 키키는 좋은 어른들을 만났다. 초면의 소녀에게 방 한 칸을 내어주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빵집의 오소노 아주머니, 그리고 미성년자인데다가 처음 일을 시작하는 키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손님들이라니, 마녀보다도 판타지 같은 존재들이지 않을까?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는 키키도 상처받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손녀의 파티에 청어 파이를 배달해달라는 할머니의 의뢰에 따라 고장 난 오븐 대신 화덕에 정성껏 파이를 구워 드리고, 친구가 초대한 파티 참가를 포기할 각오로 폭우를 뚫고 배달을 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난 청어 파이 안 좋아해.'라는 손녀의 차가운 말이었다. 배달은 성공적으로 완료했지만, 키키가 이 의뢰에 들인 시간과 마음, 보람까지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 한 마디가 키키는 많이 허탈했을 것 같다. 폭우로 흠뻑 젖은 데다가 마음의 상처까지 더해져 키키는 심한 감기에 걸리고 말지만 다행히 오소노 아주머니의 보살핌으로 건강을 되찾는다.
키키가 아픈 장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다들 한 번쯤 중요하고 긴장되는 일을 마친 뒤 휴일에 앓아누운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도 신입사원 시절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업무에 적응하느라 많이 긴장했었는지 입사 후 첫 연휴에 크게 아팠던 경험이 있다. 알고 보니 연휴 동안 아팠던 동기들이 많았고, 휴일이 끝난 뒤 출근을 한 날에 다 같이 죽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프고 나서야 내가 많이 긴장했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키키 또한 겉으로는 다 괜찮은 상황처럼 보였지만 사실 새로운 도시와 사람들 속에서 고군분투한 것이 아니었을지 많이 공감이 되었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키키는 일시적으로 마법 능력을 잃는다. 정확한 원인은 설명되지 않지만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의심, 톰보의 친구들을 마주치며 느꼈을지도 모르는 평범한 삶과의 괴리감, 정체성 혼란 등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마법을 사라지게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자신의 가장 큰 능력을 잃어 배달 일을 멈추고 의기소침해하던 키키는 인생 선배 격의 친구인 우르슐라를 만나 슬럼프에 대한 조언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비행선 사고로 위기에 처한 친구 톰보를 구하며 마법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능력을 되찾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믿을 수 없는 때, 얼마 전까지 잘 해내던 일이 어려워지는 때가 있다. 우르슐라는 키키에게 슬럼프에 대하여 이렇게 조언한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때는 미친 듯이 그릴 수밖에 없어. 계속 그리고 또 그려야지!"
"그래도 안된다면 그만 둬야지. 산책이나 경치 구경, 낮잠 자거나 아무것도 하지 마. 그러다가 갑자기 그림이 그리고 싶어지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쉬는 것을 계속 일하는 것보다 어려워한다. 뒤처질까 봐, 내 자리를 잃어버릴까 봐, 휴식이 아닌 무의미한 시간이 될까 봐 걱정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많이 지쳤을 때는 쉬는 것이 당연하다. 슬럼프 역시 성장의 과정이기에 이 시간을 억지로 견디려 하기보다 자신에게 시간을 주면 더 나은 길을 찾아내는 스스로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키키의 마법 능력이 돌아온 뒤에 키키의 능력이 이전보다 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믿고 성장한 키키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겪는 성장통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성장통의 끝에 오는 것은 드라마틱한 능력의 성장이라기보다는 부족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단단함과 더 나아지고자 하는 의지, 조금 더 성숙해진 자신인 것이다. 그러니 잠시 마법이 사라진 것 같은 오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더 높이 날아오를 날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재원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입사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 한번은 회사 선배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제가 너무 아마추어 같아요.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은데, 모든 기쁨과 슬픔에 일일이 마음을 쓰면서 감정에 휘둘리는 제 자신이 너무 후져서 슬퍼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처럼 보이고 싶은데요." 그때 선배님은 말해주셨어요. 그건 너만의 장점이야. 사람들이 널 왜 좋아하는지 생각해봐. 네가 모든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라서 사람들은 널 좋아하는거야. 그때의 그 다정한 위로가, 아주 오래 남아있습니다.
제가 슬펐던 것도, 키키가 아팠던 것도, 재원님이 앓았던 것도 결국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변수 앞에서 침착하거나 실수에 초연하지도 못하지만,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어찌할바를 모르는 사람은 귀엽고요.
매사에 쩔쩔매는 내 자신이 너무 어른스럽지 못해서 아이처럼 울음이 터질 것 같아도, 울음을 삼켜내고 방법을 찾으려는 사람은 기특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귀엽고 기특한 존재였습니다! (서프라이즈!)
그래서 슬럼프가 와도 괜찮다는, 슬럼프가 오면 초조하기 보다는 쉬어가자는, 성장통 끝에 엄청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분명히 변화된 자신이 있을 것이라는, 재원님의 위로도 누군가의 하루를, 누군가의 1년을, 5년을 다정하게 보듬고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게 해줄 것 같습니다. 제가 사회초년생일 때 읽었다면 분명 눈물이 또르륵 흘렀을 거에요. 7년차 직장인이 된 저는 막 그렇게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습니다? (눈물을 닦으며)
키키는 이제 19년차 베테랑 배달부가 되었네요. 저도 7년차 직장인이 되었고요.
키키(부장님이라고 해야할 것 같...) 자신이 받았던 애정과 응원, 다정한 기억들을 또 누군가에게 나누고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요즘은 누군가의 선배로, 선생님으로 제가 받았던 다정함들을 다시 나누고 있어요.
나누는 마음이 결국은 서로를 키워내는 자양분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이 그렇게 각박하지만은 않다는 희망을 갖게 해요. 마법처럼요.
위로란, 대부분 고백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랬다, 라는.
휴식도 어쩌면 마찬가지입니다. 무의미한 시간이 될 것이라는 걱정이, 휴식을 방해합니다. 제아무리 전문가의 휴식법 따위를 찾아본다 한들 와닿지 않습니다. 이때도 위로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랬다, 가 필요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가 그런 맥락에서,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맥락에서, 이 글이 지친 이들에 sender가 될 수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휴식을 갖는 걸 두려워해요. 쉰다는 건 결국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거니까 그 시간만큼 자신의 실력이 퇴보하고 자신이 뒤처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심한 근육통이 와도 더 많은 운동으로 이겨내려고만 하기도 하죠. 하지만 몸을 쉬게 해주는 그 시간이 오히려 몸이 완성되는 핵심 기간이라는 걸 놓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주7일 365일 죽어라 운동을 해봤자 몸만 축날 뿐이죠. 런닝이라면 완주도 못 할 거예요.
적당한 휴식은 이토록 중요한 부분인데, '왜 쉬었어'를 따지는 요즘 사회를 보면 눈물이 나기도 해요. 재원님 말씀대로 지쳤다면 쉬는 것이 당연한 건데 '왜' 쉬었냐는 질문이 대체 무슨 질문인가 싶기도 하고요. 저 역시 사회 초년생의 입장으로서 키키의 여정을 재원님의 글을 통해 다시 훑어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무려 13살에 낯선 사회로 던져진 키키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왜 갑자기 마법을 잃었는지 알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스스로를 다시 이겨낸 강인하고 당찬 키키를 볼 때면 닮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나요. 저도 오랜만에 다시 키키를 틀어봐야겠어요. 재원님의 좋은 글 감사했습니다! (p.s. 저는 하울과 모노노케 히메도 좋아합니다! :D)
평소 지브리 영화를 애호하는 사람으로서 소재도, 글도 마냥 즐겁습니다. 아마 제가 지금 사회초년생(에서 취업준비생을 오가는)이기 때문이겠죠. 사회라는 곳이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나'라는 존재는 많이 깎고 다듬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슬플 때도 있었습니다. 마녀가 사람들과 공존하는 건 만큼의 고통이라고 말한다면 다들 믿을지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좋은 사람과 함께여도 힘든 날이 있다는 건 위로가 됩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에서 부담과 책임을 잠시 내려놓고 쉬어가는 기분입니다!
키키를 새로운 시선으로 다뤄주심에 감사합니다. 적어도 10번 이상은 본 것 같은데, 또 새로운 마음으로 이 영화를 꺼낼 볼 생각에 벌써 설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