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의 무더위는 생각만 해도 눈앞이 다홍이 되는데, 비올라가 군청을 노래하니 나는 까만 시원함을 느꼈다. 요즘은 오후 4시 무렵 퇴근해 건물 밖을 빠져나오는데, 그때마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기다렸다는 듯 눈앞을 가득 채웠다.
출입문을 빠져나오기 전에는 무척 바쁘다. 문 밖에서 방패가 되어줄 양산을 꺼내야 하니, 이어폰을 미리 귀에 꽂아 놔야 하고, 가방 속 텀블러에 물이 있다면 입안에 얼음물 한입을 들여놓기도 해야 한다. 그런다고 열기가 내 사방을 에워싸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도 모르게 '억' 하는 느낌이 덜하다.
언제 이 더위가 가시게 될지 예상조차 쉽게 되지 않으니, 나는 18일의 일을 먼저 떠올려 보기로 했다. 18일에는 무엇을 하기로 했더라.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보기로 했다. 음악당에 가기로 했었지. 그래, 국제음악제 공연 중 하나인 비올라와 피아노의 듀오 리사이틀이었다.
어떤 레퍼토리더라. 노래를 먼저 들어볼까, 연주가에 대해 먼저 알아볼까. 잠시잠깐 고민하다 핸드폰 화면 위에 그날의 비올리스트인 '티모시 리다우트'라는 이름을 먼저 띄웠다. 그의 이름을 가장 높은 곳에 놓아두니 'Sunset'이라는 곡이 나타났다.
18일의 레퍼토리는 아니었지만, 마침 그날의 피아니스트인 '프랑크 뒤프레'와 함께한 연주라 두 사람이 어떤 소리를 주고받는지 미리 들어보기에는 더없이 좋아 보였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고, 시작부터 드리워진 비올라의 온화함에 그만 이 글의 첫 문장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래, 새카맸다. 분명 아득한 열기둥 안에 있던 내 눈앞에 비올라의 첫 선으로 까만 밤이 들이닥쳤다. 한낮이 조금 지난 주홍빛에서 눈 깜짝하지도 못한 사이에 밤 11시의 세상이 내게 왔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 사이, 어떻게든 내가 만든 그늘 안에 숨어보려 웅크려져 있던 어깨 너머로, 높은 세상과 낮은 말에만 귀 기울여 보려던 내 세상 중간 사이로 못 보던 나무 한 그루가 건반과 함께 걸어오는 소리 하나 없이 다홍에서 군청 사이를 지나 나를 찾아내 인사를 건네더라.
모르는 이가 분명한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익숙함에 시선을 내려 오른손끝을 바라봤다. 언제 묻었는지 모를 4B 연필의 까만 그림자가 내 검지 끝에 묻어 있더라.
그래, 내게는 여전한 나무이기도, 연필이기도 한 약 450년 된 비올라가 이렇게 왔다. 내게 복잡하게 이리 오는 게 아니라...
이날의 프로그램 가운데 나흐레 솔의 'Shadow Walkers'는 아직 들어볼 수 없으니, 이 곡은 18일의 무대 위 비올라와 피아노에게 맡겨둔 채 그들이 남겨놓을 세 갈래의 그림자 모양만 미리 상상해보기로 했다.
에네스쿠, 콘서트 피스
이 곡의 작곡 배경을 살펴보니 파리 음악원의 비올라 경연 대회를 위해 쓰였다고 한다. 어라라,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어깨 양쪽의 무게가 덜어졌다. 거창한 서사를 미리 짊어지고 들어야 하는 곡은 아니구나. 애초에 비올리스트의 기량을 펼쳐 보이기 위한 경연곡이 아니던가?
음악제 첫날, 이 리사이틀의 문을 여는 재미난 곡이겠구나! 그리 가볍게 들어볼 수 있다. 이참에 그가 현재 사용하는 악기가 약 45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잊어버리자!
쉽게 음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선율들이 가득할 것이다. 오늘의 연주가가 현 위로 어떤 음색을 태워 올릴까?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들어가 보자. 무엇을 들고 있었던가? 비올라였지? 비올라가 어떤 악기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도 좋다.
그냥, 그들의 움직임과 노래를 한꺼번에 삼켜내보자! 왕!
브람스, 비올라 소나타 E♭ 장조 Op.120-2
비올라의 첫 숨에 나도 모르게 클라리넷의 길을 떠올렸고, 그의 너그러움에 피아노는 싱그럽게 엮어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상으로 미리 만나는 그들은 비올라가 브람스를 만나니 대각선 방향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일러준다. 고개를 살짝 뒤로 또 옆편으로 뉘일 수 있는 바람이 찾아드는 것이다.
한참 이어지는 불볕더위에 진이 다 빠지는데, 어떤 색의 바람이 우리의 뒷목 근처에 불어올까. 1악장에 반복적으로 찾아드는 노래가 있을 텐데, 18일에 만나는 그의 손끝에선 그 길을 어떤 발걸음으로 걸을까. 편안히 기대하게 된다.
2악장의 서두를 듣자마자, 비올라 품에서도 역시 브람스는 브람스구나, 싶었다. 그냥, 뭔가 아래위로 크게 너풀거리는 게 딱 '브람스'만 같다. 작은 물건 하나를 가지고 길게 놀기보다, 애초에 눈 안에 담겨 있는 게 경계선 밖 영역까지 포함되어 있는 사람.
나는 이날 그들을 통해 비올라가 어디까지 큰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가까이에서 응시해보고 싶어졌다. 기업은행챔버홀이라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연주가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고, 녹화된 영상으로 미리 만난 리다우트의 소리도 멀리까지 뻗어 나왔다.
둥근 노란 조명 안에서 불리는 요하네스라면...
찾아드는 3악장의 시작에 벌써 이 곡의 이별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이렇게 쉽게, 가만히 자리에 앉아 내 귓가로 '드넓은 세상'을 들여놔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포근하고 행복하기만 한 이 청감을 지금 내 나이에 느끼기엔 지나치게 이르게 만난 사치스러운 감각이 아닐까 싶다가도 아, 맞다. 지금 나 놀러 왔지. 즐기는 게 맞는 일이구나. 가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갖가지 장면은 다 제쳐두고 저 소리 품에 가장 깊숙이 안겨들 수 있는 사람이 이날을 가장 길게 기억할 수 있는 '청중'이겠다.
블로흐,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 곡의 작곡가 블로흐는 자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같은 지역을 향한 상상이 작품에 영감을 주었지만, 실제로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에게 그 장소들은 여행의 기억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바라본 풍경이었다.
블로흐는 네 개의 악장에 보다 구체적인 제목을 붙이는 것도 생각했지만, 결국 듣는 이의 상상을 특정한 장면에 묶어두지 않기 위해 거두었다고 한다. 그 말은 즉슨, 나는 작곡가의 머릿속에 담긴 상상적 풍경 위에 또 다른 영감을 덧붙이는 연주가를 목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정해진 바가 없다. 반드시 어떤 풍경을 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바라볼 색과 떠올릴 공간이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허공 안에 무엇이 놓이게 될까. 발 들여본 적 없는 섬. 신비로운 열대 정글. 군청색의 밤... 정말로 뭐든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미래의 나는 아마, '단어'를 떠올리기보다 비올리스트가 어떤 '자유' 안에서 어떤 '획'을 그어나갈지, 피아노가 무슨 '이정표'를 들고 있을지에 집중해보지 않을까 싶다. 그의 표정 변화나 피아노와 어느 순간에 눈 맞춤을 나누게 될지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지 않을까.
관객에게 주어진 자율도가 이만큼 높으니, 그려낼 수 있는 그림도 네 가지나 된다. 네 가지? 사실 이것 또한 정해져 있지 않다. 네 번의 기회 안에서 색이 입혀질 도화지의 여분도 얼마든지 남아 있다.
이런 상상도 할 수 있겠다. 이 곡은 왜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을까. 비올라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다채로움을 이만한 백색의 자유도 안에서 보여주고 싶어서일까. 악장 사이를 미리 걸어보고 있는 지금, 사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모든 게 공상 안에 자라난 광경의 일이 아니던가. 미리 들어보지 못한, 그날 처음 인사하게 될 한 곡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곡을 지나오니 어둑한 저녁 시간이 되었다. 아마 18일에도 그럴 것이다. 조금 더 검은색이기도 하겠다.
복잡함 하나 없이, 비올라가 노래하며 피아노와 함께 찬찬히 너와 내게 걸어올 것이다.
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
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는 오는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6일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IBK기업은행챔버홀, 리사이틀홀에서 열린다. 2021년 ‘여름음악축제’로 출발한 이 음악제는 국내 음악가의 발굴과 국제 교류를 아우르는 여름 클래식 축제로 영역을 넓혀왔다.
올해는 ‘Pack Your Summer with Classics’를 슬로건으로 국내외 연주자와 실내악 단체들의 무대를 선보인다. 라벨의 작품으로 꾸려진 개막 공연에서 쇼스타코비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폐막 공연까지 여섯 날의 음악제가 이어진다.
8월 18일, 티모시 리다우트 & 프랑크 뒤프레 듀오 리사이틀
음악제 첫날인 8월 18일 오후 7시 30분 IBK기업은행챔버홀에서는 비올리스트 티모시 리다우트와 피아니스트 프랑크 뒤프레의 듀오 리사이틀이 열린다. 두 사람은 에네스쿠의 '콘서트 피스'를 시작으로 브람스의 '비올라 소나타 내림마장조 작품번호 120 제2번', 나흐레 솔의 '쉐도우 워커스', 블로흐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을 차례로 연주한다.
올여름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프로그램을 국내 관객들에게도 소개하는 무대로, 후기 낭만주의와 현대를 잇는 레퍼토리를 통해 비올라 특유의 깊고 풍부한 음색을 들려줄 예정이다.
[프로그램]
에네스쿠, 콘서트 피스
Enescu, Concertstück
브람스, 비올라 소나타 내림마장조 작품번호 120 제2번
Brahms, Viola Sonata in E-flat Major, Op. 120 No. 2
Intermission
나흐레 솔, 쉐도우 워커스
Nahre Sol, Shadow Walkers
블로흐,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Bloch, Suite for Viola and 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