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오후, 동네 도서관에나 가려던 발걸음을 갑자기 틀어 결정한 파주행. 엄마와 이따금씩 들렀던 ‘헤이리시네마’에는 볼 수 있는 영화가 총 세 편 상영 중이었다. 너무 서둘러 가기는 싫고, 그렇다고 너무 늦게 귀가하기도 싫어 딱 중간 시간대의 영화를 택했다.
영화 ⟪빈집의 연인들⟫을 보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영화의 예고편을 다시 틀어보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고 나서 예고편을 봤는데, 태양빛에 그을려 까무잡잡하고 거칠한 얼굴의 시골 노인 둘이 꼭 그들만큼 촌스러운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그래서인지 예고편에 흐르는 현악기 소리가 괴리감 있게 느껴지기도, 두 노인네를 따라 배로 경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음악이 한 번 변주될 무렵, 귀에 콕 박히는 대사.
“나랑 같이 가겠소? 크게 할 짓은 못 돼도, 나름 할 만하오.”
크하하. 이토록 신사적인 도둑을 보았나. 하지만 물 한 번 안 만져본 왕자의 부드러운 손보다는 따뜻하고 거친 도둑의 손을 잡고 싶은 건 왜일까.
조건부 연애
“오해하지 마쇼! 난 부끄럼을 모르는 도둑놈은 아니요!”
노쇠한 당나귀를 타고도 등은 꼿꼿한 돈키호테마냥, 그는 자신만의 신조가 있는 도둑이다.
은자와 팔복의 연애는 사실 꽤나 많은 ‘조건’ 위에 존재한다. 첫 번째 조건은 좀도둑으로 살기. 영화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잘렸다던 대사에서 은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잘 들어. 나는 말이오. 내 똥구멍으로 다시 나오는 것만 가져온단 말이오.”
과연, 처음 도둑질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남의 식탁 위에 놓인 옥수수를 집어 들어 우걱우걱 씹는 은자지만, 노인들이 옷장 깊숙이 모아둔 쌈짓돈은 건드리지 않는다. 이는 반쪽짜리 정의처럼 느껴지는 동시에 이들의 ‘지속적인 범법 행위’를 위한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은자와 팔복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도둑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아무도 낡은 트럭을 타고 전국을 다니는 노인 둘을 추적하진 않는다. 그들이 터는 ‘빈집’ 역시 시골의 노인들이 문도 잠그지 않고 밭일을 나가 비어 있는 집들이다. 애초에 삼엄한 경계도, 훔칠 만한 대단한 재산도 없는 집들. 식탁에 놓인 옥수수 하나, 돼지저금통에 담긴 케케묵은 동전들 따위가 사라졌다고 눈치채지 못하는, 또는 한참 뒤에야 눈치챌 집들.
두 번째 조건은 바로 뿌리내리지 않기. 팔복이 ‘움직이는 집’을 가진 이유다. 팔복의 트럭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못지 않은 훌륭한 집이다. 그만의 세계가 있는 곳. 잠잘 것, 입을 것, 먹을 것, 그리고 담배와 카세트테이프들. 영화 ⟪소공녀⟫ 속 미소가 생각나기도 한다. 친구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할지언정 담배와 위스키만은 포기하지 못하던. 하지만 팔복이나 미소나, 포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그저 남들과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위의 두 조건은 그저 ‘잡히지 않기’ 위한 조건 같은데, 왜 조건부 ‘연애’가 되는 걸까. 이는 은자와 팔복의 생존을 위한 조건인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큰돈을 원하면, ‘한탕 크게’ 쳐서 자리 잡길 원하면 종식되는 그들의 도둑질처럼, 둘의 연애 또한 ‘적당함’ 속에서만 유지 가능하다. 서로를 더 원한다면, 그리하여 서로가 상대를 바꾸려 한다면, 가정을 꾸리고 집을 얻고자 한다면, 그들의 사랑 또한 망가진다.
팔복의 작은 트럭은, 비어 있는 집들은, 적당한 크기의 사람들을 적당한 시간 동안만 수용할 수 있다. 얼마일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혼자였던 팔복. 항상 술에 만취해 잠들고,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들고서야 잠에서 깨던 은자. 그들이 지켜오던 삶과 나름의 아픔은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정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운 도피이고, 도피 속에서 진실한 위로가 된다. 굳이 알 필요 없다. 굳이 파고들 필요 없다. 그저 옆에서 잠시 같이 킬킬대고, 한밤중 바다를 찾아 떠나고, 모래사장을, 또는 코스모스 흐드러지게 핀 초원을,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손잡고 걸으면 된다. 이동형 사랑이고 조건부 사랑이고, 진짜 사랑이다.
은자의 입꼬리
은자를 연기한 '정애화' 배우님을 이번 영화로 처음 알게 됐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각종 인터뷰와 기사를 찾아보던 중, 정애화 배우에 대해 한 감독이 이렇게 표현한 것을 보았다.
"애화 선배님이 발이 빠르고 기동성이 좋으시다."
아, 배우에 대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처음 듣는 말이지만 정말 맞는 말이다, 하고 한 번에 납득이 되었다. 은자 역시 그러한 정애화 배우 특유의 '기동성'이 반영된 것인지, '움직이는' 사람같이 느껴진다.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까.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 백 번 말하고도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몸부터 돌리는 사람.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 몸과 마음이 일치해야 하는 사람.
그렇게 술로 연명하는 위태로운 생활을 하는 은자에게서 어떠한 '곧음'이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곧은 은자에게서 입꼬리만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더욱 눈에 띄는 걸까.
영원히 내려가 있는 은자의 입꼬리. 어딘가 항상 최악을 예상하는 듯한, 지금 마음껏 웃어버리면 반드시 나중에 더 크게 울게 될 거라는 걸 학습한 듯한 사람의 입꼬리.
그러니 은자는 웃고 싶을 때 입꼬리를 내리고 목소리를 키운다. 처음엔 그저 성질 나쁜 노인네처럼 보이던 은자가 점점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은 비단 팔복뿐이 아닐 것이다. 괜히 툴툴대고 목소리를 키울 땐 맞서 핏대를 세울 것이 아니라 꽃다발을 건네면 된다는 걸 아는 팔복에겐 한참 못 미치겠지만 말이다(역시 세월이 빚은 로맨티스트일까, 아니면 그저 타고난 걸까?).
하지만 팔복은 결국 함께 떠나기로 한 은자를 기차역에 두고 사라진다. 기차가 지나간 뒤 은자가 있던 자리 또한 비어있다. 화면은 전환되고, 처음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은자가 혼자이던 시골 마을로, 은자가 팔복을 만나기 전으로. 은자는 툴툴대는 트럭에 타 있지만 이번엔 팔복과 함께가 아니다. 시골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밭일을 하러 가는 출근 트럭의 뒷자리. 은자의 손가락에 있던 반지마저 없으니, 팔복과의 시간이 정말 꿈이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은자는 비어 있는 넷째 손가락을 보고도 환하게 웃는다. 이번에는 입꼬리를 한껏 올린 채로. 눈은 반달처럼 접히고 고개도 뒤로 젖혀진다. 감히 예상하건대, 끝을 보았고, 끝이 별 게 아니란 걸 아는 사람의 웃음 같다.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보다도, 돌아오는 사랑이 더 믿을 만하다. 그래, 끝난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이제 더는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니. 어쩌면 집을 비운 사이, 빈집의 연인이 잠시 다녀 갈지도 모르니.
"나랑 같이 가겠소?" 하며 내미는 손을, 언제라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