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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파친코', 턱, 배, 팔, 그리고 수술 [드라마/예능]

'파친코' 속 여성의 몸과 힘의 이름

by 서지민 에디터
2026.11.0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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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한 신체성은 젠더 수행에 있어 보여지는 강한 기호로 작용한다. 여성의 몸은 역사적, 픽션 다방면의 창작물 안에서 피침략의 대상, 고통을 겪는 객체이자 전쟁에 나간 남성의 부재를 견디는 자의 은유로 쓰여왔다. 식민의 서사에서 빼앗긴 땅은 자주 여성의 몸으로 그려지고, 땅에 가해지는 폭력은 강간으로 묘사된다. 여성은 민족의 생산자인 어머니로 세워지지만,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로서는 지워진다. 원작 소설에서 선자의 어머니 양진이 말하는 "고생" 또한 개인의 고생이자 식민지 국가의 고난으로, 식민화된 국가가 여성의 몸으로 은유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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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ple TV+의 드라마  '파친코' 또한 이 계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동명 소설을 한국계 미국인 수 휴가 각색한 이 시리즈에서, 선자의 몸은 모국인 조선을 떠나 일본에서 버틴다. 시리즈는 그 버팀을 '강인한 어머니'라는 익숙한 표지로 재현한다. 여성 서사의 가장 큰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여성으로서의 고통을 이야기하려면 이전의 폐습 또한 재현해야 한다. 역사는 지울 수 없고, 억압을 지우거나 이상화하면서 여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폐습을 다시 보여주는 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떤 시선으로 보여주느냐다. 견디는 몸을 그 몸의 주체가, 혹은 그 몸에서 태어난 딸이 직접 이야기하는 서사는 최근 여성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새로운 양상이다. 파친코 또한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각색자가 옮긴 여성 서사다. 몸에 가해지는 고통은 그 고통을 겪는 자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고통을 느끼는 몸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woman의 고생은 women의 고생으로 이어지고 연대를 낳는 자리가 된다. 사람은 여성의 몸에서 태어나고, 몸에 새겨진 습관과 질환은 피와 교육을 통해 전이된다. 신체성은 우리를 가두는 가장 큰 한계인 동시에 서로를 엮는 sisterhood의 연결고리인 셈이다.

       

      나는 이 질문을 내 몸에서 시작해,  파친코 속 여성의 몸을 턱, 배, 팔, 그리고 수술이라는 네 개의 자리에서 읽으려 한다. 대물림의 선 위에서 나의 외할머니는 양진의 자리에, 나의 엄마는 선자의 자리에, 나는 솔로몬과 피비 사이에 놓아 파친코와 나의 이야기를 잇는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시작하는 소설 파친코는 시대가 제시한 폐습과 억압을 재현함과 동시에 그 안에서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의 힘에 이름과 주체성을 돌려준다. 그렇게 과거를 다시 돌아보는 일이 지금의 우리가 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

       

       

       

      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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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턱관절 때문에 보톡스를 맞았다. 나는 긴장하거나 무언가에 집중할 때 턱을 꽉 다무는 습관이 있다. 입을 세게 다물고 어금니 끝에 힘을 주면 뭔가 강인해지는 느낌. 그건 악다구니스럽기도, 고집스럽기도 한 표정을 낳는다. 우리 엄마도, 우리 할머니도 같은 질환으로 고통받았다.

       

      강한 턱선은 흔히 남성성의 요소로 여겨진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그 턱은 모계로 이어져 왔다. 남성이 부재한 자리에서 가정의 돌봄과 유지는 여성의 몫이었다. 의무를 수행하듯 턱을 꽉 깨물고 눈물을 참으며 주어진 일과를 묵묵히 해내던 힘, 버티는 힘은 여자들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 힘의 이름은 역사의 어느 자리에도 써져 있지 않다.

       

      이민진이 파친코를 쓰게 된 것도 이런 기록되지 않은 힘 때문이었다. 이민진은 원래 손자 솔로몬을 주인공으로 초고를 썼다. 그러다 재일조선인들을 인터뷰하며 "살기 위해 억척스러워야 했고 그렇게 살아낸 인생이 자이니치들의 진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주인공을 선자로 바꿨다. 자꾸 되뇌게 되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파친코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이들을 비추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선자로 시작해 선자로 끝난다. 그리고 선자의 이야기는 그녀의 몸의 변화를 따라 이어진다.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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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이어짐은 여성의 배에서 시작된다. 명절에 외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면, 나와 동생은 자연스럽게 '할머니 집'에 간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그 집은 늘 할머니의 집이다. 우리가 모두 할머니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배는 아이를 품을 수는 있어도 이름을 줄 수는 없다. 우리가 '할머니 집'이라고 부르는 그 집은 서류상으로는 할아버지 명의다.

       

      유부남인 한수의 아이를 가진 선자에게 이삭은 아이를 포기하라고 권한다. 선자는 거절한다. "다들 우리 아부지 평생 장가도 못 가고 자식도 없을끼라 캤는데 지가 요래 있잖아예. 없어야 할 아가 요 있다 아입니까. 야도, 있으면 안 되는 아지만, 요 뱃속에 잘 있습니더." 그러나 소설에서 선자의 어머니 양진은 "성도 없는 아이가 어떻게 되겠십니꺼? 호적 신고도 못하지 아닙니꺼"라며 운다. 이름은 남자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그래서 선자는 목사인 이삭과 결혼해 아이를 교회와 가부장제의 제도 안으로 들여보낸다.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아이가 존재하려면 아버지라는 명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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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자의 배에는 여러 낙인이 겹쳐 있다. 혼외 임신이라는 낙인, 그리고 언청이였던 아버지 훈이 때문에 장애아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낙인이다. 한수는 아이의 성별을 알기도 전에 "아들을 낳아준다니"라며 기뻐하고, 선자는 "딸이면 실망할 텐데 그래도 이뻐해 줄 거죠?"라고 묻는다. 선자 역시 시대의 가치관을 몸으로 익혔고, 그 가치관으로 자기 배 속의 아이를 바라본다. 젠더와 장애에 대한 편견, 남아선호가 선자의 배 위에서 교차한다.

       

      그리고 이 낙인들은 결국 선자를 나고 자란 집 밖으로 밀어낸다. 혼외 임신한 여성을 받아주지 않는 영도에서 선자에게 남은 길은 자신을 받아준 이삭을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선자가 제도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면 서구에서 들어온 기독교의 목사와 혼인하고, 그를 따라 식민 본국인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다. 비혼모라는 이유로 고향에서 자리를 잃은 선자는 곧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다시 밀려날 처지에 놓이고, 여성으로서, 그리고 식민 지배를 받는 국민으로서 동시에 억압받는다. 그래서 선자의 배에서 이어지는 임신과 출산과 육아는 빼앗긴 조선을 대신하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그 모든 층위를 한 몸으로 살아내는 살아 있는 존재의 몸으로 그려진다. 이 지점에서 파친코는 앞서 말한 계보에서 빗겨 나간다.


      양진은 세상이 장가도 자식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남자와 결혼했고, 네 번의 출산 끝에 선자만이 살아남았다. 그런 양진이 소설에서 딸에게 "여자의 인생은 고생"이라고 말하고, 말년에는 손자 노아가 "나쁜 씨를 물려받았다"고 말한다. 한때 자기 남편과 딸을 향했던 낙인을 자기 입으로 되풀이하는 셈이다. 시대를 살아남은 사람이 딸에게 건넨 현실은 이렇게 또 하나의 억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양진은 일본으로 쫓겨나듯 떠나는 딸을 위해, 당시 조선 사람은 살 수 없던 귀한 흰쌀을 구해 마지막 밥을 짓는다. 그리고 훗날 일본으로 건너와 딸의 곁에서 아이들을 함께 돌본다. 고생을 받아들이라는 말과 흰쌀밥은 같은 인물에게서 나온다. 양진의 입은 폐습을 되풀이하지만, 그것이 폐습에 대한 동의는 아니다. 선택지가 없던 자리에서 딸을 살게 할 방법을 골라낸, 양진 나름의 주체적인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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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할머니도 그랬다. 엄마가 일하며 우리를 키우는 동안 할머니는 우리 집에 와서 아이들을 돌봤다. 그러나 어릴 적 엄마가 울면 할머니는 사치스럽게 운다고 다그쳤다. 엄마는 할머니가 불쌍해서 입을 다물었다. 엄마는 어린 내가 울 때마다 할머니를 인용하며 같은 훈육을 물려주었고, 나도 엄마가 불쌍해서 입을 다물었다. 모계를 따라 대물림된 것은 감정의 억압이었으나, 그것을 가능하게 한 건 서로를 향한 연민이었다. 억압의 연계와 연대는 따로 있지 않고 같은 행위 안에 겹쳐 있다. 선자는 그 선 위에서 다른 생각을 한다. 노아가 나쁜 씨를 타고났다는 어머니의 말에 선자는 "씨, 핏줄, 이런 한심한 생각에 어떻게 맞설 수 있단 말인가?"라며 속으로 반발한다. 물려받은 경험은 바꿀 수 없으나 다음 세대에 전해질 말을 바꾸는 것, 그것이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사소하지만 가장 큰 변화다.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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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세대의 이름을 받기 위해서 남자가 필요했지만, 그들은 정작 가족을 지탱하는 자리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빠는, 강한 팔을 가진 그들은 그때 어디에 있었을까. 공식적인 기록에는 없지만 생계를 위한 노동은 특정 계층을 제외한 여성들의 삶에 늘 있어왔다. 할머니는 홀로 장사를 해서 엄마와 외삼촌을 먹여 살렸다. 엄마는 아빠가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동안 교사 일을 하며 우리를 키웠다.

       

      파친코의 남자들도 자리를 비운다. 이삭은 사상범으로 몰려 감옥에 가고, 시숙 요셉은 여자들이 돈을 벌러 나가는 것을 반대하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지는 못한다. 원작의 남자들 역시 가장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남자들이 이상을 좇거나 말로만 기존의 질서를 지키는 동안, 살아남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는 건 여자들이다. 양반 집안에서 자란 형님 경희는 사채 빚을 직접 갚으러 가는 길에 멈춰 선다. "이런 험한 일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하는 거잖아. (…) 돈을 쥐어본 적도 없어." 그런 경희에게 선자가 말한다. "무서운거 같이 무서워하십시더. 그러면 힘이 나지 않것습니까."

       

      계층이 다른 두 여자가 같은 바닥에서 같은 공포를 나눠 가지며 함께 나아간다. 나는 이 장면이 파친코가 보여주는 sisterhood의 가장 정확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억압을 함께 겪는 자들은 서로의 공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며, 그 이해가 변화를 함께 만들고자 하는 연대의 시작점이 된다.


      시즌 1의 마지막 장면에서 선자는 시장 바닥에 자리를 잡고 김치를 판다. 공부하지 못한 조선 여자가 일본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김치는 조선인의 음식이고, 냄새 때문에 시장에서조차 밀려나는 물건이다. 그러나 선자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팔을 걷어붙이고 김치를 외치며 경희와 함께 생계를 꾸려간다. 원작은 그 외침에 어린 시절 장터에서 물건을 팔던 여자들의 목소리가 겹쳐 있다고 쓴다. 선자의 팔은 앞선 여자들의 팔에서 이어진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정해져 있던 자리에서도 그 일을 자기 손으로 해낸다는 것, 파친코가 선자의 주체성을 보여주는 곳은 바로 이 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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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에서 대물림된 것도 이 팔이다. 홀로 장사를 하던 할머니의 팔은, 교사로 일하며 우리를 키운 엄마의 팔로 이어졌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 자기 일을 해내는 것이 우리 집 여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공부할 기회가 없었지만 엄마가 공부하는 데에는 모든 것을 지원했다. 여자니까 아이를 낳고 키우려면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하다며 교대를 권한 것도 할머니였다. 그 말에도 시대의 억압이 묻어 있었지만, 공부할 기회조차 없었던 할머니에게서 교대에 간 엄마까지는 분명 한 걸음이었다. 엄마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교대가 아니라 내가 고른 대학에 갈 수 있게 했다. 팔이 닿을 수 있는 곳은 한 세대마다 조금씩 넓어졌다.

       

       

       

      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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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톡스의 작동원리는 그 근육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앙 다무는 습관으로 이어진 턱관절의 통증을,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내게 이어진 이 고통을 나는 현대의 미용 기술로 마비시켰다. 할머니는 마비시킬 수 없었던 근육을 나는 돈을 내고 잊을 수 있다. 몸은 통제가 작동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습관을 고치는 데는 너무 오래 걸리니 대신 의료 기술을 택한다는 것, 그 선택 자체가 내 위치의 복합적인 요소를 보여준다.

       

      수술은 현대 기술의 손이 과거로부터 이어진 몸에 개입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기술의 손은 대개 서구 의학이 만든 것이다. 미국에서 개발된 보톡스가 한국의 미용 시장에서 일상이 되었듯, 몸을 고치는 기준 역시 서구에서 건너온다. 드라마 파친코도 그렇다. 드라마는 원작에 없던 한금자를 새로 넣어 솔로몬의 비중을 키웠고, 소설에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치관에서 나왔던 선자의 선택은 드라마에서 "일반적인 미혼모의 선택"으로 일반화되는 경향이 있다. 제작진이 겨냥한 것은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디아스포라'였다. 김현아는 이 드라마가 역사적 진정성을 드러내고, 젠더화된 역경에 휘둘리기만 하던 아시아 여성의 이미지를 새롭게 세웠다는 성과를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해외의 제작진과 평단이 재일조선인의 특수성과 강인함을 칭송하면서도 그것을 '보편성'과 '휴머니즘'이라는 기준으로만 칭찬한다고 지적한다. 그렇게 될 때 이 역사는 할리우드와 애플 고객의 입맛에 맞춘, 신기하고 감동적인 '구경거리'에 머물 위험이 있다. 강인한 어머니라는 표지가 문제인 건 그 강함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 표지가 강함이 생긴 조건을 지우고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얼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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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피비다. 소설에서 피비는 미국 유학 중 솔로몬을 만나 일본으로 온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 작가 이민진과 같은 1968년생이다. 요리를 못 하는 피비를 보며 선자는 생각한다. "어머니는 고생이 여자의 일생이라고 했지만, 똑똑하고 모두에게 따뜻한 웃음을 짓는 이 상냥한 아가씨는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했다. 음식을 못하면 어떤가?" 선자가 어머니의 말을 품으면서도 다음 세대 여성에게는 그 말을 넘기지 않기로 하는 장면이다. 나는 이 문장이 할머니와 엄마가 나를 보며 하는 생각과 닮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피비는 사라지고 일본인 동료 나오미가 그 자리를 대신하며, 선자는 손자가 일본인 여자를 만난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보인다. 대물림이 끊기는 순간이 각색에서 지워지면서, 선자 개인의 서사는 조선인 손자가 일본인 여자를 만나는 데 당혹스러워하는 민족사의 한 장면이 된다. 이건 1910년대의 한계가 아니라 2020년대의 선택이다.

       

      이 레이어가 흥미로운 것은 피비가 곧 작가의 자리이자 현 세대 독자들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자란 이민진은 대학 시절 일본에서 괴롭힘을 당하다 세상을 떠난 자이니치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주류 사회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는 '사이에 낀' 존재로서의 동질감으로 이 작품을 구상했다. 서구의 시선을 배운 사람이 그 시선의 바깥에 놓인 이들에게서 자신을 본 것이다. 피비는 그 겹침이 소설 안에 남긴 흔적이고, 드라마는 그 흔적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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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그 자리에 있다. 나는 솔로몬처럼 할머니와 엄마의 노동 위에서 공부하는 손주다. 나는 할머니와 다르게 중매로 결혼할 필요도 없고, 엄마와 다르게 안정적인 직업을 위해 교대에 갈 필요도 없었다. 공부로 고생을 갚아야 한다는 압박은 나에게도 내려왔지만, 나는 내가 고른 대학에 갔고 지금은 혼자 스웨덴에 와서 내 명의로 된 카드로 결제하며 'Are we sisters after all? '이라는 젠더 수업을 듣는다. 이민진은 서구의 시선을 배운 채 경계에 서 있었기에 '디아스포라'라는 공감의 언어로 그 시대를 불러올 수 있었고, 그래서 한국의 독자들까지 건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초국적 기업의 각색과 자본을 거치며 그 이야기는 다시 매끄럽게 다듬어졌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일반화 아래 구경거리가 되어간다. 그 과정에서 서구 페미니즘이 제3세계 여성을 하나의 얼굴로 묶어온 방식이 되풀이된다. 그런데 그것이 나와 크게 다른가. 나 역시 서구의 교실에서 그 시선을 비판하는 법을 배우면서, 동시에 그 시선을 바탕으로 할머니와 엄마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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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턱은 버텼고, 배는 이름 없이 대물림했고, 팔은 남자의 자리로 함께 나아갔다. 파친코는 이 몸들이 겪은 폐습을 재현하지만, 선자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모아 기록되지 않은 힘에 이름과 주체성을 돌려준다.

       

      나는 요즘 반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진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페미니즘이 나아가는 만큼, 이미 얻었다고 생각한 개념들이 다시 뒤로 밀리고 보수화되는 장면을 더 자주 보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폐습을 다른 시각에서 다시 보는 일이 필요하다. 파친코는 식민지 조선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우리 세대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서구의 시선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인가. 서구 사회가 시작한 식민 지배는 땅만이 아니라 젠더의 질서까지 함께 이식했고, 일본은 서구 근대의 질서를 받아들여 한국에게 강요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서구의 기준을 좇도록 오랫동안 강요받았기에 결국 지금 서구와 비슷한 맥락의 문제를 겪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서구 페미니즘의 의의는 앞으로의 방향 제시보다는 "우리는 이런 부작용을 겪었다"는 경험에서 나온 배움일 것이다. 서구의 시선을 배운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자이니치에게서 자신을 보았듯, 우리는 서로의 부작용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시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무엇을 지우는지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하다. 김현아는 파친코의 이야기가 애초에 보편성이 아니라 특수성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해외의 칭송 속에서 "한 틈새에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서구의 교실과 할머니의 집 사이, 나 역시 그 틈새에 서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할머니의 턱에서 시작해야 했다. 역사를 다시 보는 의의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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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자는 윗세대로서 아랫세대인 피비가 고생하며 살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 말을 거꾸로 건넬 수 있는 자리에 있다. 나는 보톡스로 턱을 잠시 잊기로 했지만, 지금 그 턱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쓰고 있다. 엄마와 할머니에게 이제 그 습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 말을 꺼낼 수 있다는 것이 이런 이야기의 존재 의의다. 할머니와 양진, 엄마와 선자, 그리고 나는 모두 다른 몸을 가졌지만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 몸들이 왜 굳었는지까지 들을 때 우리는 자매가 되고, 그때 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참고문헌

      김미정, 「드라마 ‘파친코’에 재현된 재일조선인(1세대)의 여성상」, 『역사와 담론』 109, 2024, 291–327쪽.

      김현아, 「드라마 〈파친코〉에서 나타난 여성과 사라진 여성」, 『문학과 영상』 25(3), 2024, 635–663쪽.

      이정민·최정인,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드라마 〈파친코〉」, 『예술교육연구』 22(4), 2024, 15–30쪽.

      장희동, 「젠더 수행성과 신체 은유: 이민진 『파친코』에 나타난 한국 여성의 정체성 구성과 남성 인물의 곤경」, 제56회한중인문학회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2025, 125–135쪽.

      이민진, 『파친코』 1·2, 신승미 옮김, 인플루엔셜, 2022.

      Lugones, María. “Toward a Decolonial Feminism.” Hypatia 25(4), 2010, pp. 742–759.

      Mohanty, Chandra Talpade. “Under Western Eyes: Feminist Scholarship and Colonial Discourses.” boundary 2 12(3)/13(1), 1984, pp. 333–358.

      Pachinko. Created by Soo Hugh. Apple TV+, 202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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