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우리 집 벽 한 귀퉁이에는 가족들의 키가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평소 어떤 거창한 가풍이나 규칙을 강조하지 않으셨던 부모님이었음에도, 우리가 자라나는 동안만큼은 늘 의무적으로 우리를 그 벽 앞에 세우셨다.
연필로, 볼펜으로, 때로는 투박한 사인펜으로.
그곳엔 이름과 날짜, 그리고 층층이 쌓여가는 숫자들이 마치 지질학적인 지층처럼 남았다.
이제 더 이상 집안에 자라나는 아이는 없지만, 문득 그 벽이 눈에 밟히는 날들이 있다. 우리가 언제 그곳에 서 있었는지, 우리의 존재와 보편을 확인하게 하는 매체로서의 '키 재는 벽'. 그것은 단순한 눈금의 나열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성장 궤도와 존재를 가장 내밀하게 발췌해 놓은, 누구보다도 깊은 정성이 들어간 장기간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가정 집의 귀퉁이에는 이런 지층이 있을까? 아이가 자라나는 것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집의 벽면이. 영화 센티멘탈 벨류 속 오프닝에서, 초등학생이었던 노라는 집의 시점에서 에세이를 서술한다. 집이 기억하는 삶과 존재에 대한 인식은 특정 문화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인류의 보편적인 습관일까? 이런 질문에서 시작되된 조사로 주변 지인들과 SNS를 통해 각자의 벽을 공유해달라 요청했을 때, 놀랍게도 거의 모든 가정에서 유사한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사를 가면서 이 벽면만 따로 떼어내어 보존할 방법이 없느냐는 어느 해외 페이스북 사이트의 질문 게시글은, 이 공간이 단순히 수치를 기록하는 곳을 넘어 인간에게 '사적인 경험의 완결'을 담고 있는 소중한 장소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본 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공간과 사람을 증명하는 지속적인 행위 예술로서, '키 재는 벽'이 지니는 예술적 가치를 미학적 텍스트들을 경유해 읽어보고자 한다.
신체라는 붓, 벽이라는 캔버스
키를 재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신체와 공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전제로 한다. 이는 현대 미술사에서 신체를 매개로 삼았던 선구적 시도들과 궤를 같이한다. 이브 클랭(Yves Klein)은 '인체 측정(Anthropométries)' 연작을 통해 모델의 몸을 붓 삼아 캔버스에 그 흔적을 각인시켰고, 오를랑(ORLAN)은 자신의 몸을 척도로 삼아 공간을 측정하는 퍼포먼스 'MesuRAGE' 를 선보였다.
아이의 정수리가 벽에 닿고, 그 지점에 가느다란 선 하나가 그어지는 찰나. 이 순간 신체는 공간을 재정의하는 주체가 된다. 클랭의 모델이 캔버스에 밀착되듯, 오를랑이 자신의 키로 세계의 크기를 가늠하듯, ‘키 재는 벽’은 신체라는 매체가 공간과 조우하며 남긴 물질적 증거다. 전시장의 관객과 거대한 자본은 없으나, 아이의 성장을 기록하는 부모의 손길과 그 과정을 온몸으로 수용하는 아이의 대치는 그 자체로 숭고한 퍼포먼스의 원형을 띠고 있다.
공간 속에 압축된 시간의 아우라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집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를 넘어, 추억이 공간화될 때 비로소 견고하게 뿌리 내리는 곳"이라 설명했다. 키 재는 벽은 바로 그 '시간의 압축'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존 듀이(John Dewey)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벽은 비록 좁은 면적에 불과할지라도 "오랫동안 축적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여기서 우리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주창한 ‘아우라(Aura)’의 현대적 발현을 목격한다. 벤야민의 아우라는 물리적 일회성인 ‘지금, 여기(Hic et Nunc)’의 현존성에서 발생한다. 벽면에 남겨진 연필 자국은 복제 불가능하다. 그것은 특정 시점, 그 자리에 존재했으나 이제는 성장을 통해 영원히 상실되어버린 아이의 '찰나'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말했듯, 이것은 "사물에 각인된 잊힌 인간적인 것의 흔적"이다. 이사를 가며 벽을 떼어갈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그 벽이 단순한 건축 자재가 아니라 가족의 생장(生長)과 호흡이 고착된 '유일무이한 원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디지털 데이터나 사진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신체와 벽면이 맞닿았던 그 물리적 접촉의 아우라가 그곳에 흐른다.
‘하나의 경험’이 완성되는 순간
존 듀이는 일상의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완결성을 갖출 때 이를 ‘하나의 경험(an experience)’이라 일컬었다. 키 재는 벽은 ‘기록하는 자’의 능동적 행위(Doing)와 ‘기록 당하는 자’의 수동적 체험(Undergoing)이 수년에 걸쳐 교차하며 완성된다. 만 2세의 선과 만 12세의 선 사이, 그 수 센티미터의 간격 안에는 무수한 계절과 성장통, 가족의 서사가 응축되어 있다. 듀이는 예술적 형식이란 "매체 안에 있는 관계들의 전체성"이라 정의했다. 아이와 집, 연필과 벽, 그리고 시간이라는 매체가 맺어온 관계들이 성장의 정지 혹은 이사라는 사건을 통해 멈추었을 때, 그 벽은 비로소 하나의 완결된 서사 구조를 갖춘 ‘작품’으로 거듭난다. 그 종국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라, 한 존재의 서사가 공간에 기재를 마친 '경험의 완성'이다.
벽 앞에 서는 예술
현대 예술이 일상과의 경계를 허물고 삶의 연속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해왔다면, ‘키 재는 벽’은 그 어떤 제도권 예술보다도 충실히 그 명제를 수행해 왔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집요하게 이어져 온 이 반복적인 기록은, 유기체로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정성스러운 몸짓이다.
지금도 어느 집 문틀 옆에는 페인트 아래 숨겨진, 혹은 노골적으로 드러난 선들이 존재할 것이다. 아무도 다시 재지 않아도, 그 선들은 그 자리에 머물며 말한다. 우리가 이곳에서 함께 자라났음을, 그리고 그 평범한 일상의 기록들이 모여 결국 하나의 거대한 예술이 되었음을.
우리 하나 하나가 하나의 예술의 지표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