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온 뒤, 길가의 풀숲을 들여다보면 가끔 달팽이를 발견할 수 있다. 꼬물꼬물 느린 움직임, 어딘가를 향해 조심스럽게 뻗어있는 더듬이.
어렸을 때 달팽이를 발견하면 뭣 모르고 달팽이의 더듬이를 손으로 톡 건드려보곤 했다. 그러면 달팽이는 껍질 속으로 몸을 피했다.
달팽이의 집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아마 달팽이가 주로 먹는 잎채소의 성분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부드러운 잎채소를 먹고 단단한 껍질을 만들어내는 것이 신기하다.
내가 만약 달팽이라면, 내 껍데기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껍데기
나는 네 번의 수능 끝에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수능 공부를 놓지 못했던 이유는 ‘좋은 대학교’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과 과목을 좋아했지만, 이과를 선택했다. 취업이 더 잘될 것 같아서였다. 지금의 전공을 선택한 이유 역시 취업률이 높다는 말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해 꾸준히 힘을 쏟아본 적이 없었다. 진로를 결정할 때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취업률과 연봉,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먼저 고려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대신, 남들이 단단하고 좋아 보인다고 말하는 껍데기를 만들려고 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정해진 시기에 결혼하는 삶을 따라가면 나 역시 안전하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내 껍데기의 재료는 질투심과 조급함, 열등감과 불안감, 그리고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었다.
껍데기에 균열이 생기다
나는 매년 생일마다 그다음 해의 내 생일에 읽을 편지를 쓴다. 3년 동안의 편지를 찬찬히 읽어보다가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전공이 너무 싫어”
학교생활을 하면서 입에 살고 달던 말이지만 자각하지 못했었다. 내년에 나에게, 그것도 생일에 맞춰 남긴 내용이 3년 연속으로 ‘전공이 싫다’라는 말이라니.
나의 대학 생활은 열정과 흥미 없이, 그저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는 시간으로 가득했다. 같은 활동을 해도 즐거움을 느끼고 성장해 나가는 학과 동기들을 보며 죄책감을 느끼곤 했었다. 더 공부하면 재미를 느끼겠지 싶어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비슷했다. 노력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이 희미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만든 단단한 껍데기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스로 집을 부순 달팽이
나는 누구보다 크고 멋진 껍질을 가지고 싶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것, 늦지 않게 결혼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위한 노력은 모두 나를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내가 만든 집은 나를 지켜주는 소중한 보호막이 아니라, 나를 짓누르는 짐이었다. 숨이 막혔다.
숱하게 고민한 밤을 지나온 뒤 대학교 3학년이 돼서야 깨달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크고 멋진 집이 아니라는 것을.
이젠 나에게 맞는 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내 안에서 답을 찾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선택했다.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앨범의 타이틀 곡만 듣기보다 전곡을 순서대로 감상하고, 앨범 표지 이미지와 수록된 노래의 관계를 생각하며 아티스트가 어떤 의미를 담고자 했는지 상상하곤 했다. 앨범을 감상한 뒤 블로그에 글을 올려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그림을 그릴 때 행복했다. 잘 그렸다고 생각해서 여기저기 자랑했던 그림은 다시 보니 솔직히 많이 엉성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고, 행복했다. 직접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감상하는 것도 좋아했다. 전시회나 일러스트 페어를 찾아가기도 했다. 장래 희망 칸을 채워야 할 때면 언제나 ‘화가’나 ‘만화가’를 적어냈었다.
특히 인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 늘 생각하고 관심을 가져왔었다. 그게 내가 그린 그림에도 나타났던 것 같다. 더 나아가 중학생 때는 심리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행동의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도 나는 사람과 마음을 관찰하는 일을 좋아한다. 외출할 때면 작은 메모 노트를 늘 챙긴다. 휴대폰 메모장에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길을 걷다가도 잠시 조용한 카페에서 쉬어가며, 걸으면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나에게 기록은 떠오른 생각을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아두는 일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도록 도와주는 단서가 되어준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서로 멀리 떨어진 것들이 아니었다. 나는 문화 예술을 향유하고, 인간과 내면에 관해 사색하며, 내가 느낀 바를 글로 남기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좋아서 해왔던 일들이었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에 지원하게 된 것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 좋아할 용기를 내본 일이었다. 취업이나 전공이라는 현실적인 기준만으로 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래 바라보고 사랑해 온 것들을 내 언어로 기록하며 스스로의 방향을 찾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나에게 맞는 집을 짓기
달팽이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집이 아닐 것이다. 자기 몸을 짓누르지 않으면서도 위험한 순간에 편안하게 몸을 숨길 수 있고, 자신이 성장하는 만큼 함께 자라나는 집일 것이다.
앞으로 내가 만들고 싶은 삶도 그렇다. 다른 사람에게 멋져 보이기 위한 집이 아니라 내가 편안하게 숨 쉬고 오래 머물 수 있는 집. 불안과 열등감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 직접 경험하며 얻은 확신으로 이루어진 집이다.
아직 그 집이 어떤 모습일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더 이상 남들이 좋다는 것을 따라가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내 집을 한 겹씩 쌓아가고 싶다.
달팽이는 느리지만 조금씩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사람이 단 몇 걸음만으로 갈 수 있는 거리가 달팽이에게는 몇 분,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겠지만, 그렇다고 달팽이의 이동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달팽이는 달팽이의 속도로 나아가면 된다.
나도 나만의 속도로 나아가고자 한다. 소중한 내 집을 등에 지고서.

(직접 그린 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