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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당일 아침에 구매한 비행기 티켓, 제주 동쪽 여행 [여행]

돌아오는 티켓은 사지 않았다

by 방지수 에디터
2026.07.17 14:05

 

 

도망치듯 시작된 여행


   

작년 11월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시험도 과제도 다 끝나지 않았던 학기 중이었지만 지금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대책도 없이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티켓을 구매한 뒤 침대에서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을 얼마나 챙겨야 할지 고민했다. 돌아오는 티켓은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어렴풋이 느꼈지만, 돌아보니 당시의 나는 번아웃이 왔던 것 같다. 일을 벌이다가 제 한계를 넘어버리고 소진되고야 마는 패턴은 나의 고질적인 나쁜 습관이었다. 종강 후에 후련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끊임없이 열이 가해진 주전자는 물이 끓다 못해 넘치려 하고 있었다. 이번엔 타이밍이 좀 좋지 않았다.




비행기 이륙 - 여행의 세계로 가는 첫 번째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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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찍은 사진, 필름 카메라)


 

비행기를 타는 일은 항상 설렌다. 특히 이륙할 때가 가장 설렌다. 사실은 설레는 건지 아니면 비행기가 무사히 이륙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마음에서 오는 긴장감인 건지 모르겠다. 둘 중에 과연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두 가지 가정을 세웠다. 


첫 번째, 비행기가 뜨며 신체적으로 긴장하게 되고, 그때 비로소 여행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확 실감하게 되어 설레는 것이다. 혹은 두 번째, 비행기가 무사히 뜰지 걱정하고 긴장하는 것을 설렘과 혼동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으면 놀이공원에 같이 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 이유는 놀이기구를 탈 때의 떨리고 긴장되는 느낌을 마치 상대에 대한 설렘인 양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나저러나 설렘과 긴장감을 모두 느낀다는 말이다. 그리고 두 가정이 결국엔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안전히 이륙했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면 이제 노래를 들을 차례이다. 비행기가 상공에 있을 때는 실시간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으므로 미리 저장해 둔 플레이리스트를 내려받아 둔다. 꼭 듣는 노래는 Sunset Rollercoaster의 Let There Be Light Again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밤 비행기를 탈 때 이 노래를 듣는 걸 좋아한다. 부드럽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배경 음악으로 삼으며, 비행기 창 밖으로 멀어지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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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찍은 사진, 필름 카메라)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온 터라 첫째 날은 숙소도 예약하지 않아서 제주 공항 근처의 찜질방에서 잤다. 도착한 날은 이미 어두워진 후여서 잘 안 보였었는데 다음 날 아침이 되어 탁 트인 바다를 보니 비로소 제주도에 온 게 실감이 났다. 알록달록 무지갯빛 구조물이 세워져 있는 것이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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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찍은 사진, 디지털카메라)

 

 

지난 제주 여행에서 주로 서쪽에 머물렀었기 때문에 이번엔 동쪽에 머무르기로 했다. 동쪽에 있는 마을 중에서도 함덕으로 결정했다. 함덕에 유명한 독립 서점, ‘만춘서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여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여행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일기장에 적는 것’이다. 이때 책과 함께 여행한다면 더욱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책 한 권을 골라 여행 내내 들고 다닌다. 이번엔 만춘서점에서 나에게 의미를 남겨줄 책과의 만남을 기대했다.

 

 


만춘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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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찍은 사진, 디지털카메라)

 

 

서점은 조용하고 따스한 분위기였다. 마지막까지 살지 말지 고민하던 책이 있었는데 결국 구매하지 않았다. 책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소개 글과 함께 다양한 책들이 잘 정리되어 꽂혀있었지만, 구매까지 할 정도로 내 마음에 와닿는 책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의 내 마음은 닫힌 상태라 무엇도 새롭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제주도의 풍경 - 걷고 또 바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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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찍은 사진, 디지털카메라)

 

 

이번 여행에서는 주로 버스를 탔다. 버스를 운행하지 않는 구간은 그냥 걸었다. 운전면허가 없는 뚜벅이기에 걷고 또 걸었다. 그것마저도 즐거웠다. 육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시야 안에 들어왔다. 풍경을 감상하는 데에 푹 빠져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있었다. 나는 제주의 바다도 좋아하지만, 산과 숲을 거니는 건 더 좋아한다. 초록빛 나무와 풀이 가득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또 제주도는 화산섬이기 때문에 육지의 산과는 좀 다른 기운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 필름 카메라도 챙겨오긴 했는데 무거워서 그냥 숙소에 두고 다녔다. 카메라 기종은 ‘Konica Minolta DiMAGE G600’. 삼촌께서 사용하시던 카메라를 물려받은 것이었다. 가지고 있는 카메라 중에 빛의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드는 기종이었는데 지금은 망가져서 서랍장에 고이 잠들어있다. 고칠 수 있다면 고치고 싶지만, 옛날 모델이라 부품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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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앞의 갈대 무리. ‘밭’ 정도로 광활하지는 않았고 ‘무리’라는 표현이 적당한 것 같다. 햇빛을 반사하며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갈대 무리를 바라보니 마음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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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하면 귤을 빼놓을 수 없다. 길을 걷다 우연히 귤나무를 발견해서 기분이 좋았다. 아마 귤 농장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열심히 귤을 따서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북카페 [아이러브 눅]



지도 앱에서 숙소와 가까운 카페를 찾다가 발견한 곳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위한 완벽한 공간’이라는 소개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곳에서는 대화할 수 없다. 벨소리는 무음 모드로, 전화 통화는 카페 밖에서 해야 한다. 이런 규칙 덕분에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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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찍은 사진, 디지털카메라)

 

 

이날 [아이러브 눅]의 첫 번째 손님은 나였다. 오픈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하여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었는데, 사장님께서 환한 미소로 문을 직접 열어주셨다. 


북카페답게 안에는 빌려서 읽어 볼 수 있는 책도 많았고, 판매하는 책의 종류도 다양했다. 


나는 이곳에서 일기도 쓰고 뜨개질도 했다. 겨울만 되면 뜨개질이 하고 싶어진다. (그러다 날이 따뜻한 계절이 오면 흥미가 식는다) 이때도 11월이라 날씨가 쌀쌀해서 뜨개질 거리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목도리를 뜨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기에 부피가 작아서 들고 다니기 수월했다. 다행이었다. 무릎에 올려놓은 털실이 따뜻했다.

 

 

 

산을 바라보며 LP를 감상할 수 있는 [로미뮤직하우스]


 

앞에서도 말했지만 바다보다 산을 더 좋아한다. 바다를 보면 처음에는 탁 트인 시야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다 보면 조금씩 막연하고 허무한 감정이 올라온다. 가끔은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숙소 근처에 산을 바라보며 LP를 감상할 수 있는 카페가 있다고 해서 신나는 마음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산속에 있어서 조금 당황했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지치지도 않고 올라간 버스는 인적이 드문 곳에 나를 내려주었다. 내리고 나서도 꽤 걸어야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인도가 없어 차도의 가장자리를 걸어야 하는 건 좀 무섭긴 했지만 어차피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은 아니었다. 그래도 산길을 걷는 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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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접 찍은 사진, 디지털카메라)

 

 

어렵게 도착한 [로미뮤직하우스]의 건물 외관. 이곳의 통유리창으로 보이는 산의 경치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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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접 찍은 사진, 디지털카메라)

 

 

실제로 보면 이것보다 훨씬 더 멋있는데 사진에 잘 담아내지 못했다.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괜찮은 게 많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에 iCloud 용량이 부족해 사진이 저장되지 않는다는 경고를 무시하며 백업해 두지 않았었다. 그러다 여행 이후에 폰이 망가져 수리를 맡기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클라우드에 저장되지 않은 사진은 복구할 수 없었다. 디지털카메라로도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녀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클라우드에 사진을 백업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지.


음식도 제철 음식이 있듯이 음악도 제철 음악이 있는 법. 늦가을 황량한 날씨에 제법 어울리는 LP를 골라 들었다. 자리에 앉아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실 음악을 들으면서 꽤 많이 울었다. 우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이날 들었던 앨범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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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하(로미뮤직하우스)에서 들은 LP

 

김광석 - 서른 즈음에

김뜻돌 - 꿈에서 걸려온 전화

The Volunteers - The Volunteers (Nicer*)

자우림 - 자우림

자우림 - 戀人

 


LP를 들은 순서대로 노트에 기록해 두었다. 음악을 듣는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어서 감상은 일부러 적지 않았다. 비록 그날 찍었던 카페 내부 사진은 다시 볼 수 없지만, 기록된 트랙 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좌석마다 방명록이 비치되어 있어 자유롭게 글을 쓰고 읽어볼 수 있었다. 저마다의 각기 다른 사연이 적혀 있었다. 방명록 속에서 사람들은 같은 좌석에 머물렀었던, 그리고 머무를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다. 나도 이름 모를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건네받았다.

 

 

 

음악이 흐르는 바, [김녕음악사]



여행 셋째 날 방문했던 [김녕음악사]. 음악이 흐르는 곳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기 좋은 곳이다. 일행과 같이 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처럼 혼자 오는 손님도 있었다. 맥주를 시켰는데 자꾸만 안주를 서비스로 주셨다. 제주도의 정, 귤도 받았다. 가게에서 내가 신청한 노래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신청한 노래는 '자우림 - 있지'와 '오석준 - 우리들이 함께 있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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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접 찍은 사진, 디지털카메라)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만, [로미뮤직하우스]에서도 자우림의 LP를 두 장이나 들었었다. 이때 당시에 자우림의 노래에 흠뻑 빠져있었다. '우리들이 함께 있는 밤'은 내 앞에 앉아 계시던 중년 부부의 대화 배경 음악이 되었으면 좋겠기에 신청한 노래다, 오지랖이지만.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데 카운터에 놓인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사장님께 조심스럽게 파는 책이냐고 여쭤보았는데 조금 신이 나 보이는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책의 표지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사 왔어요. 언젠가 누군가는 이 책에 관해 물어보지 않을까 하며 카운터 옆에 놓아두었어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이런 느낌으로 말씀하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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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책 뒷면에 적혀 있는 글) 

"오늘날 사람들은 음악이라는 비물질적 세계에서 무엇을 누리고 싶어 할까?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거의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현재, 

플레이리스트는 음악 감상에 최적화된 '도구'가 된 듯 하다.

이 책을 플레이리스트라는 소리 세계, 나아가 하나의 음악 작품과 

그것을 향유하는 청자의 능동성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음악 감상에 주목한다."


저자: 김호경, 출판사: 작업실 유령

 

 

이번 여행 내내 나를 위로해 준 '음악'에 관련된 책이라니! 여행에 의미를 더해 줄 책을 발견한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당연히 책도 함께 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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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1. 22.

 

김녕음악사

 

♡감사합니다♡

 

 

 

돌아갈 티켓을 살 용기가 생겼다


 

[김녕음악사]를 나서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로 올라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이제 더 이상 제주도에 머무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갈 티켓을 살 용기가 생겼다. 이젠 돌아가도 괜찮아. 다시 우리 집으로, 학교로, 가족과 친구들 곁으로 돌아가자. 

 

서울로 다시 돌아온 나는 마치 책 「해변의 카프카」에서 비현실에 머물다가 현실로 돌아오게 된 다무라군이 된 것 같았다. 힘듦이 전부 가시지는 않았지만, 이전만큼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그 이후 학기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 여행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단 몇 줄의 문장만으로는 정리할 수 없을 것 같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했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있었다. 하지만 영영 머물렀다면 그곳은 낙원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왔기에 그곳은 낙원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그때보다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더 잘 알게 되었다. 조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힘든 순간이 올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씩씩하게 잘 이겨낼 것이다. 

 

다시 돌아온 집에서 나는 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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