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작가의 가장 내밀한 시선을 마주할 수 있어서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직업을 풀어낸 에세이를 좋아한다. 내가 미처 몰랐던,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데다 그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에세이는 산만한 나에게 부담이 적은 장르다. 중간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더라도 언제든 다시 이어 읽을 수 있다. 마치 한 사람의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를 여러 편 클릭해서 보는 듯한 기분이다.
책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은 서수연 작가가 음성해설 작가이자 성우 일을 처음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담은 에세이다. 하지만 책은 단순히 하나의 직업을 소개하는데에 그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일을 어떠한 태도로 마주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자주 떠올린 장면은 방송작가로 일했던 시절의 나였다. 가편을 마친 약 48분 분량의 편집본을 주말 이틀 내내 돌려보면서 초벌 자막을 썼다. 처음에는 프로그램마다 정해진 자막의 포맷을 익히느라 많은 시간을 썼고, 형식이 익숙해진 뒤에는 이 장면에는 어떤 자막이 적절할지 고민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화면 속 인물이 어떤 의도로 말을 했는지, 그 장면이 전체 흐름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했다. MC와 패널의 말을 고대로 옮기기보다는 맥락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간결한 한두 줄의 자막으로 정리하는 일. 3~5초에 남짓한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보며 어떤 단어와 표현이 이 순간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물론 모든 순간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긴 침묵이 이어질 것이다. 잘 쓰는 것도 중요했지만, 내가 쓴 자막 파일을 제때 전달하는 일 역시 중요했기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채 넘겨버린 장면이 참 많았다. 당시 내 마음 한편에는 늘 떼어지지 않는 찝찝함이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었다.
대사와 대사 사이, 찰나의 틈새에만 해설을 밀어 넣어야 하는 음성해설의 태생적 한계 탓에 나의 설명은 언제나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 완벽하게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보면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랬다. 세상에는 100퍼센트를 할 수 없다는 자기 한계를 알기에, 오히려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음성해설이라는 새로운 씨앗이 막 발화한 그 시점에 내가 나의 한계를 생각하는 건 불필요했다. 이 씨앗이 꽃이 될지, 나무가 될지, 혹은 시들어 버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책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p.37
그래서인지 책 속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완벽하게 해낼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감각,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려는 마음은 낯설지 않았다. 방송 일을 했던 지난날뿐만 아니라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지금 내 자리에서의 고민과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알아보지 못하고 놓친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잘못 알고 쓴 것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확신하며 적어 내려간 문장들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엉뚱하게 들리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그저 수치스럽고 속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 한편에서 깨달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흔쾌히 인정하는 것, 진짜 해설은 거기서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
(...)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글을 쓸 수는 없다. 모르면 찾아보고, 묻고, 직접 가서 배우면 된다. 해설 작가에게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무지 자체가 아니라, 내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좁은 방 안에 안주하려는 태도일 것이다.
책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p.121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7,800여 편의 작품에 음성해설 자막을 써온, 그야말로 베테랑 작가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최선을 찾는다.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장면을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 끝없이 고민하고, 배우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써 내려가는 일. 이는 비단 음성해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일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고민이자 끝내 갖추어야 할 태도일 것이다.
완벽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부족함을 마주한 뒤 내가 어떠한 태도를 선택하느냐다. 나 역시 그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어쩔 수 없었어', '시간이 없었다'라는 말로 덮어두지는 않았나. 부족함을 인정하는 일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처음에는 현재의 나와는 접점이 없는 타인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의 경험에 비추어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독자는 그 안에서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발견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에세이란 바로 이런 거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두 삶이 잠시 맞닿는 순간을 느끼게 하는 에세이.
앞으로도 나는 모두를 위한 접근성 콘텐츠 전문가로 여러분과 만날 것이다. 그것이 현장과 연구라는 두 갈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시간이 내게 준 소명이자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지금처럼 하다 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접근성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라고 믿는다.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날도 올 것이다. 우린 서로 다르지만, 서로에게 가닿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책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p.287
음성해설 작가가 쓴 책 답게 책의 표지에는 점자가 함께 병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앞쪽 책날개 하단에는 촉각만으로도 QR코드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정사각형의 표식이 있다. QR코드에 연결된 영상을 재생하면 서수연 작가가 직접 낭독한 표지해설을 들을 수 있다. 눈을 감고 2분 남짓한 음성해설을 따라 책 표지를 새로이 상상해 본다. 제목처럼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책인 셈이다.
낯선 타인의 이야기가 책을 덮을 즈음 어느새 내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달랐지만 책을 읽으며 서로에게 가닿은 이 순간처럼, 이 책을 통해 음성해설이라는 일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