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데코(art deco)의 여왕’으로 불린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Tamara de Lempicka, 1898~1980)의 생애를 다룬 뮤지컬 <렘피카(Lempicka)>의 라이선스 초연(서울 코엑스 아티움 우리은행홀)이 6월 21일에 막이 내렸다. 뮤지컬 <렘피카>는 <하데스타운>의 연출로 토니상을 수상한 연출가 레이첼 채브킨과 작곡가 멧 굴드(Мatt Gould), 대본을 맡은 칼슨 크라이저(Carson Kreitzer)의 합작으로 2024년 브로드웨이 초연을 올렸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을 피해 파리로 망명한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의 실화를 기반으로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생계를 위해 취미였던 미술을 다시 시작하고, 파리에서 만난 라파엘라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면서 사랑을 나누며 욕망과 생존, 혼란과 갈등, 협상과 경합을 이어가는 이야기다. 타마라 드 렘피카와 사랑을 나누는 라파엘라를 포함하여,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렘피카의 남편이자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남성상인 ‘타데우스 렘피키’, 렘피카의 그림 스승이자 이탈리아 미래주의 화가인 마리네티, 클럽의 사장이 되는 레즈비언 수지 솔리도르, 렘피카의 그림을 후원하는 남작 부부, 그리고 타마라와 타데우스의 딸 키제트 등 독특한 캐릭터성을 가진 매력적인 조연들이 조형되어 서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지랄맞은’ 역사의 생존자‘

1차 세계대전의 세계 정세 속에서 발생한 러시아 혁명과, 전간기의 혼란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의 전조로 향하는 격동의 역사는 이 작품에서 마치 심층 구조처럼 배태되어 있다. 동시에 이러한 역사는 막이 오르고 등장하는 노년의 렘피카가 ‘지랄맞다’는 단어로 표현할 정도로 진보와 퇴보가 공존했던 모순의 역사이면서, 굉장히 동시대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한 세기 이전 ‘과거’의 배경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동시성은 다시 반복되고 있는 전쟁과 이로 인한 이민과 망명/들, 극우에 포섭된 예술, 정치적 혼란과 경제의 변화가 야기한 젠더 체계의 변화라는 현시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전간기 유럽에서 경제의 위태로움(대공황의 여파)과 정치적 불안이 소수자 혐오로 전이 및 투사되고, 몇몇 나라는 민족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블록 경제’가 형성되는 모습은 신자유주의와 패권주의적 국가주의가 동시에 심화되며 역설적이면서 혼종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2026년 현재의 세계 정세와 닮아 있다. 2막을 여는 넘버 ‘Pari will always be pari’에서 파시즘의 ‘스펙터클’ 미학을 보여주는 당시의 영상이 투영된 스크린을 통해 시간이 흐르는 모습과 ‘나레이터’의 역할을 겸한 마리네티의 서술을 통해 표현되는 당시 파리의 상황이 병치되면서 느껴지는 기묘한 긴장은 등장인물들에게 다가오는 시대를 함의한다.
시대의 변화와 충격은 의도했던 결과만을 불러오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당시 러시아 내부의 정치경제적 모순이 터져 나오는 계기가 되어 왕정과 귀족이 몰락하게 되는 러시아 혁명을 촉발시켰고, 정권이 바뀌면서 투옥당한 귀족 출신의 타데우스를 구하기 위해 렘피카는 자신의 보석을 혁명군에게 건네며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오직 타데우스를 위해 ‘선택’이라는 이름의 성폭력을 감수한 그는 자신을 어떻게 꺼냈냐는 말을 반복하는 타데우스와, 아기인 키제트와 함께 간신히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다. 렘피카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다 자신의 취미였던 미술을 다시 시작하며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팔기 시작한다. 정치적 변화가 의도치 않게 젠더 구조를 이리저리 변형시키는 와중 렘피카와 달리 타데우스는 이러한 신분의 추락과 시대의 변화, 그리고 헤게모니 남성성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체화되어 있는 귀족적인 남성성이 지배적이었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렘피카와 갈등을 빚는다. 타마라가 ‘렘피카’로서 살아남은 이유는 러시아에서 파리로 망명한 뒤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 격동의 생애 과정에서 귀족의 ‘매너’를 버리고 역사의 모순을 견딜 만큼 세속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렘피카가 위기를 감각할수록 자신의 그림을 돈으로, 돈을 (화폐 가치가 붕괴하거나 급히 떠나야 할 당시에도 여전히 경제적 가치를 유지하는) 보석으로 바꾸며 물질을 통해 위험에 대비한다*.
이러한 시대의 배경을 보여주는 또 다른 소재는 렘피카의 미술 스승 역할을 하기도 했던 마리네티가 추구했던 예술인 (모더니즘의 한 분파로서의) 미래주의(Futurism)다. 마리네티가 쓴 「미래주의 선언문(Manifesto del Futurismo)」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의 ‘미래주의’는 기존의 미술 사조의 미학적 코드를 부정하고 문명의 이기인 기계와 기술을 찬양하며 이를 유일한 아름다움으로 정의한다. 나치의 파리 점령 당시 망명을 시도하다가 스페인 국경에서 거절당한 뒤 음독자살한 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생전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미래주의가 파시즘에 의해 ‘정치의 미학화(Aestheticization of Politics)’를 구현할 수단이 되었다는 점을 비판하는데, 이러한 벤야민의 분석처럼 1막의 ‘Perfection’에서 마리네티가 일관되게 천명했던 속도와 기계의 아름다움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과 폭력의 아름다움으로 전치되어 파시즘 미학의 선전 도구이자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유럽을 휩쓸었던 파시즘에 포섭된 20세기 이탈리아의 미래주의는 2막 중반부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에 입당했음을 선언하는 마리네티의 모습에서 직접적으로 재현되며, 예술이 정치와 맺는 복잡한 관계를 상기시킨다. 마리네티가 언급하는 속도는 특정한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미래’라는 기표 속에 내재된 문명의 발전과 진보에 대한 믿음은 파괴와 폭력으로 향하는 경로의 갈림길이 되었다. 벤야민이 또 다른 저작에서 ‘기차’라는 비유를 통해서 말한 것처럼, 근대 문명이라는 열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당기는 행위의 중요성을 되새길 시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림’에 대한 마리네티의 가르침이 렘피카의 작품 속에 녹아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미술적 관습이 ‘따분하다’고 여기는 마리네티가 강조하는 기계 문명에 대한 신뢰와 ‘빠른 속도’의 미학을 배운 렘피카는 이러한 관습을 활용해 마리네티가 무시했던 여성의 모습을 그런 식으로 그려냈다. 렘피카는 ‘속도’와 폭력의 잔해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는 독창적인 작업을 해내며 이탈리아식의 미래주의 화풍과 결별하고, 그가 ‘몰락’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암시하는 시점에서 둘은 분기한다. 처음에는 남편인 타데우스 렘피키처럼 러시아어의 남성형 성인 ‘렘피키’를 활용해 미술계에 데뷔했지만 성공 후 ‘렘피카’로 자신을 드러내며 렘피카는 예술을 통해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이러한 일시적 해방감이 구체화된 것이 렘피카의 그림 <녹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의 ‘신여성(‘The New Woman’)의 이미지다. 마리네티 식의 미래주의가 찬미했던 자동차라는 기계 문명과 산업화의 상징은 렘피카에 의해 새롭게 변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수단이 된다. 하지만 양면적이며 다층적인 역사 속에서 전진의 방향은 선형적인 직선에서의 한 걸음이 아니며, 이로 인해 2막의 렘피카는 세계사적 풍랑을 겪으며 삶 속에서 예술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의 어려움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파시즘이 득세하며 자신의 미술이 ‘퇴폐 미술’로 낙인 찍히고, 수지가 연 레즈비언 클럽이 강제로 제압당하고, 나치의 점령이 예상되는 파리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공연이 시작된 후 등장하는 노년의 렘피카는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의 삶은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네모난 캔버스뿐’이라는 대사를 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첫 장면의 렘피카는 누구도 존경할만한, 업적을 남긴 위인이 아니라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공원에서 괴팍하게 늙어가는 시대착오적인 존재로 자조하는 노인으로 등장한다. (실제 한국 라이선스 공연에서는 암시되지만, 렘피카는 남작부인이 죽은 뒤 남작과 재혼해 미국으로 망명한다.) <아담과 이브>를 그릴 당시 ‘뱀’을 상징하기도 했던 딸 키제트와의 관계는 존경과 유대감보다는 애착과 불안이 뒤섞인 애증의 관계로 이어졌다. 1막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노년의 렘피카의 모습이 2막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지는 수미상관 구조 속에서 우리는 ‘야망’을 통해 성공한 승리의 서사 속 ‘주체적’ 롤모델이 아니라 격변의 역사를 관통하며 오염되고 깨진 채로 생존한 타마라 드 렘피카를 본다.
* 유럽에서의 반유대주의가 형성된 역사 속 유대인 혐오를 정당화했던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등장하는 수전노 ‘샤일록’ 같은) ‘물질을 밝히거나 탐욕적인 유대인의 이미지’는 당시 유대인 차별 정책으로 인해 금융업 같은 특정 직업에만 종사해야 했기에, 그리고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했던 것이다. 부유한 유대인 상인 집안 출신인 타마라의 모습은 당시 유럽에서 (문자 그대로 혹은 상징적 의미 모두) ‘게토화’되어 있던 유대인의 역사를 투영한 것 같아서 흥미롭다. 또한, 당시 유대인이 주로 선택했던 직업 중 하나가 보석세공이라는 점 역시 유대적인 비정주성을 반영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의 욕망, 그리고 실패
<렘피카>의 또 다른 축은 렘피카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라파엘라’라는 캐릭터이며, 렘피카는 파리의 거리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오던 라파엘라에게 매혹당한다. 화가인 렘피카와 뮤즈인 라파엘라의 관계는 성애적 친밀성으로, 그리고 예술적 영감으로 ‘번역’되며 서로에게 추억과 상흔을 동시에 남겼다. 렘피카는 라파엘라에게 자신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그림을 통해 서로 매혹된다. 그들의 사랑은 감정이 교류된다는 점에서 낭만적이며 몸이 맞붙는다는 점에서 에로틱하다. 렘피카의 욕망은 ‘공적 삶’을 위해 필요한 정상성을 표상하는 존재인 타데우스와 가족(키제트), 그리고 자신의 내밀한 자아와 진실된 욕망, 그리고 예술적 자아를 반영하는 존재로서의 라파엘라로 분화된다. 렘피카가 라파엘라를 모델로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상황을 담은 넘버 ‘stillness’처럼, 매혹과 욕망이 양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이렇게 처절하게 보여주는 텍스트가 있을까? 렘피카의 그림 속에서 존재하는 라파엘라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감각이 주는 역능성을 느끼고, 동시에 그림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영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stay’). (‘Don’t bet your heart’에서 나타났듯) 누구보다 사랑과 욕망이라는 감각을 이용할 수 있었던 라파엘라는 이내 이러한 ‘계산’의 논리를 허물고 렘피카에게 자신의 마음을 준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가 이어질수록 서로의 흔적은 상흔이 된다. 그들은 젠더화된 취약성이라는 공통적 기억으로 가까워지지만 차이로 인해 헤어진다. ‘창녀의 딸’로 태어나 어머니의 운명을 물려받은 라파엘라와 살기 위해 몸(성)을 거래한 경험이 있는 렘피카는 서로를 위로하며 급격히 가까워지고, 이내 연인이 된다. 하지만 렘피카는 자신의 ‘사적 자아’이자 ‘내면’인 라파엘라와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라파엘라의 존재를 철저히 숨긴다. 렘피카가 라파엘라를 전시회에 오지 못하도록 하면서 그를 숨기기 위해 활용하는 것은 '보호'의 언어인데, 라파엘라는 렘피카의 논리가 남자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과 똑같다고 정확하게 짚는다. 라파엘라는 사교계에서는 환대받지만, 동시에 명예와 존엄을 인정받지 못하고 사적인 공간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이중적인 위치에 있어야만 했던 경계(liminality) 상태의 존재다. 라파엘라는 그림의 모델이 될 수는 있지만 그 그림이 걸릴 전시회장에서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하지만 라파엘라는 자기 자신의 존엄에 대한 감각이 있고, 이는 연극 <프라이드>에서 ‘남자’ 배역이 맡은 멀티 캐릭터 중 첫번째 캐릭터(게이 성노동자)가 말하는 대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라파엘라가 ‘자유로운 영혼’이자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로 소개되는 이유는 젠더화된 규범과 계급적 위치에서 무관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지배 질서의 논리와 도덕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자신을 모델로 한 그림이 걸린) 전시회장에 잠입한 라파엘라와 타데우스를 대면하게 하는 키제트의 ‘순수한’, 어쩌면 의도적인 시도가 무서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하는 렘피카와 자기 자신의 자존감에 대한 신념이 뚜렷한 라파엘라의 파국은 어쩌면 쉽게 예상되는 것이다. ‘안전’을 위해서 숨어야 한다? 그 ‘안전 담론’이 가진 한계는 무엇일까? 내면과 함께(자신으로서) 죽는 것과 내면을 포기한 채(자신을 숨긴 채) 사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존엄한가? 욕망과 안전 그 둘 중에 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둘을 모두 쥔 채 놓지 않으려고 했던 렘피카는 세상의 논리를 ‘전유’하려다 본인이 그 회로에 끌려들어간다. 라파엘라는 과거 렘피카가 위험에 대비하라는 목적으로 주었던 보석이 박힌 팔찌의 의미를 둘 사이의 역사와 사랑을 (즉 ‘나’의 값을) 물질적인 가치로 환산한 것처럼 받아들이며 갈등을 지속한다. 물질과 보석을 통해 삶의 굴곡을 넘겨 왔던 렘피카가 말하는 사랑의 언어와 세속적 가치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라파엘라가 말하는 사랑의 언어는 엇갈린다. 렘피카와 라파엘라의 갈등 속에서 렘피카는 라파엘라를 끝까지 붙잡지 못하고, 이는 렘피카의 패착이 된다. 라파엘라가 떠난 이후 렘피카는 타데우스에게 가지만 이혼을 원하는 타데우스는 폴란드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렘피카는 ‘모든 것’을 다 얻으려다가 라파엘라를 상처주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두 사랑이자 두 자아를 다 잃는다. 자해 시도를 했다는 것이 암시되는 타마라를 살린 존재는 곧 질병으로 죽음이 예정된 남작부인이다. 남작부인이 말했던 것처럼, 역사에서 타마라는 남작과 재혼하고 미국으로 망명해서 나치의 파리 점령기를 피해 생존할 수 있었다. 대신 그 생존의 대가로 타마라는 생동감 넘치던 과거를 그리워한 채 씁쓸함을 곱씹으며 늙어 간다. 후반부 타마라의 그림들이 ‘재발견’되었을 때 그가 단순히 행복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닌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시대의 생존은 곧 위선이라는 이름의 양면성을 기꺼이 감수하는 분열적인 상태를 통해 가능하며, 포기한 관계를 마음에 묻고 견딤으로써 가능하다. 그 시대의 아픔은 (완벽하게 계산하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선택'이 강요된다는 것, 그리고 선택에 따른 결과가 그것의 기회비용보다 훨씬 파괴적이라는 사실을 사후에 알게 된다는 것, 무엇보다 그 선택이 항상 예상한 방향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을 비롯해 인생에서 완전히 합리적인 선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인생의 아이러니이며, 이러한 아이러니가 흔하게 발생하는 국면이 곧 전쟁과 같은 비극적 위기의 상황이다. 아무도 나를 해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을 꿈꾸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나약해지는 역설, 이를 알면서도 사랑이라는 이름의 욕망에 이끌린다는 것, <렘피카>가 두 여자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삶의 진실이 씁쓸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형식적 ‘난잡함’이 주는 기묘한 매력
뮤지컬 <하데스타운(Hadestown)>으로 토니 어워즈 연출상을 수상한 브로드웨이의 주목받는 연출가 레이첼 차브킨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고 다양한 매체와 텍스트를 혼합시켜 표현하는 ‘현대예술가’이며,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작품에 투영해 비판적 시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특징이 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트럼프 시대의 장벽과 연관시켜 파시즘과 분열의 정치를 비판한 뮤지컬 <하데스타운>이 기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형식에서 어느 정도 이탈하면서 실험성과 대중성을 조화시킨 작품이라면, <그레이트 코멧(Natasha, Pierre & The Great Comet of 1812)>에서 이러한 실험성은 정점에 달한다. 서사의 ‘산만함(Messy)’ 혹은 '난잡함(promiscuity)’**은 이머시브 뮤지컬인 <그레이트 코멧>에서 나타났던 연출의 연장선으로서, 의도적으로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실험하는 차브킨 특유의 독특한 연출이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2권의 내용을 그대로 차용하면서 원본의 텍스트를 나열하듯 제시한 <그레이트 코멧>의 연출적 감각이 미래주의의 화풍에 대해 설명하는 마리네티의 넘버나 자신의 캔버스에 담길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해서 노래하는 렘피카의 넘버 ‘Woman is’에서 그대로 활용된다거나 하는 방식이 그렇다. 또한 렘피카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정서와 색채를 무대 위에서 추상적으로 형상화하거나, 아르데코 화풍 특유의 기하학적 대칭성이나 형태를 구현하며 화려한 무대 세트를 활용하지 않아 ‘미니멀리즘’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음에도 오히려 의미론적으로는 풍부해지는 역설이 담긴 무대 공간을 완성한다.
<그레이트 코멧> 한국 라이선스 공연의 아쉬움이 있다면, 기존 영미권 공연에서는 뚜렷하게 존재했던 다양한 조연 캐릭터의 (‘퀴어 리딩’(queer reading)이 가능하게 하는 여러 장치들이나 요소와 연관지을 수 있는) 퀴어성(queerness)이 삭제되며 ‘예정된 규범적 미래를 유예시키는’ 작품의 가능성이자 행위 능력을 제한했다는 점이다. 반면 <렘피카>의 경우는 타마라와 라파엘라의 ‘성애’를 포함하여 주된 캐릭터들의 퀴어성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퀴어 당사자들은 자조적 의미가 담긴 ‘엽기 인생’이라는 조어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는 하는데, <렘피카>의 타마라를 포함해 다양한 인물들의 인생과 운명은 이러한 수식어와 굉장히 잘 호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식적인 기록이 제한되어 비공식적 아카이브에 의존해야 하는 퀴어의 존재론적 특성 속에서 몇몇 캐릭터의 경우 특정 시점 이후의 행보가 알려지지 않았고, 이 작품은 ‘의문스러운’ 기록에 의존하면서 허구적 상상력을 교묘하게 섞어 열린 이야기를 구성한다. 교차 검증이 불가능한 기록들이나 실제 역사 속 렘피카의 발언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남아 있어, <렘피카>의 서사에서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불분명함이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하는 식으로 환류된다. 특히 라파엘라는 렘피카의 작품 속 모델이었다는 정보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는 여지 외에는 역사적 기록물에서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작품 내에서도 렘피카와 이별한 이후 명확하게 처리되지 않는다.
배우 역시 자신만의 해석으로 이 작품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타마라 드 렘피카 역의 정선아와 라파엘라 역의 차지연은 <위키드> 이후 상대역으로서 다시 재회한다. 최근 <물랑루즈>, <이프덴>, <멤피스> 등 대극장 뮤지컬의 주역을 맡아 온 정선아는 현실주의적인 태도와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인간형의 캐릭터성이 연속되고 있는데, 이러한 캐릭터성이 <렘피카>에서 나타나는 굴곡진 역사의 역동을 맞이하며 발생하는 파장과 파열, 그리고 ‘깨짐 이후’의 시간에서 남은 파편을 붙잡고 살아나는 모습까지 이어지며 감동을 선사한다. 아름다운 예술에는 종종 비극적 스토리와 미스터리함이 따라붙는데, 차지연의 라파엘라는 예술 작품의 ‘모델’이 되기에 적합한 자질인 신비스러움이 존재한다. 어느 시점에서는 렘피카보다 더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렘피카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감각을 지키기 위해 이별을 고한다. 라파엘라의 몇몇 대사는 마치 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예언처럼 느껴진다. 렘피카의 캔버스에 남아 기억되고 싶다는 라파엘라의 욕망은 그대로 실현되고, 마음만은 주면 안 된다는(Don’t bet your heart) 노래가 라파엘라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기도 한다. 렘피카와 라파엘라의 결말을 결정하는 것도 라파엘라의 대사다. 이별 직전, 앞으로도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라파엘라의 말대로 라파엘라와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한 노년의 렘피카는 캔버스 위에 라파엘라를 연상시키는 그림을 그리며 과거의 추억을 그리워한다. 차지연의 라파엘라는 둘의 이별 이후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듯한 여운을 남기며 매혹을 더하는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비극이 렘피카의 예술과 라파엘라의 ‘포섭될 수 없는 삶’을 완성하는 것 아닐까?
또한 2막에서 비밀스러운 레즈비언 클럽 ‘모노클(Le Monocle’)’을 열고 클럽의 주인이 되는 수지 솔리도르 역의 최정원은 타고난 에너자이저의 기질과 연륜이 담긴 연기를 통해 무대에서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맘마미아>의 도나, <하데스타운>의 헤르메스, <시카고>의 벨마 켈리, <멤피스>의 글래디스 등 많은 배역에서 그랬듯이, 최정원 배우 특유의 대사 하나하나를 통해 관객을 웃게 하고 울게 만들며 관객을 장악하는 힘은 여전히 놀랍다. 또한 경찰의 감시와 추적 속에서 수지의 클럽이 폐쇄되는 일이 묘사되는데, 이는 스톤월 항쟁처럼 비규범적 존재를 관리함으로써 규율하는 공권력과 충돌했던 퀴어 민권 운동의 역사를 상징하는 장치로 읽히기도 한다. 마리네티는 예술에 대한 맹목적 광기와 함께, 자신의 취약성을 부인(denial)함으로써 공격성을 발산하는 입체적이고 복잡한 악역인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로이 콘’이 연상되는 캐릭터다. ‘인생캐’로 꼽히는 <렌트>의 엔젤을 비롯해 그동안 주로 맡아 왔던 유쾌한 캐릭터와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는 김호영의 마리네티는 끝내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관심을 잃고 초라하고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한 실제 인물의 생애와는 달리 이탈리아 파시즘의 수장이자 측근들과 함께 총살당한 뒤 시체가 전시된 무솔리니와 운명을 함께 했을 것 같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전통적이고 귀족적인 남성상을 보여주는 타데우스 드 렘피키(김우형)는 ‘남성성의 위기’에 대처하지 못한다. 타데우스는 일관되게 생존력과 육감이 부족한데, 렘피카와 이혼 후 폴란드 바르샤바에 가겠다는 그의 결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바르샤바에 있던 수용소를 연상시키면서 2막의 하이라이트인 ‘speed’에 담긴 시대적 배경을 환기시킨다. 아역 배우가 맡는 키제트는 렘피카 특유의 독특한 비규범적인 ‘모성’의 실천 속에서 안정과 불안정이 공존하는 복잡한 모녀 관계를 드러내고, 남작(김남수)과 남작부인(윤사봉)은 렘피카의 조력자 캐릭터로서 작품의 배경을 드러내고 서사의 전개에 필요한 세부적인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 일반적으로 ‘문란한’, ‘무질서한’ 등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의 ‘난잡한 돌봄(Promiscuous Care)’ 같은 개념처럼 퀴어 이론에서 저항적 의미에 주목하여 확장과 전유가 이루어지고 있는 단어이다. 이러한 단어의 복잡한 의미가 차브킨 특유의 실험적인 연출과 친연성을 가진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 단어를 활용했다.
시대와 무대라는 층위에서 <렘피카>가 가지는 의미
<렘피카>에서 '임파워링'이 흔히 사용되는 방식의 맥락을 읽어내면 그것은 이 작품을 오독한 것이다. (‘힘’을 다른 뜻으로 정의하거나 의미를 전유하려 한다면 아니겠지만) 이건 세계에서 ‘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삶과 세계를 황폐하게 했고 그게 개인들에게 어떠한 위기로 다가왔는지, 그럼에도 그 욕망과 경합하면서 그 파편 속에서 살아난 자의 이야기다. (즉, 욕망과 힘의 이중적인 속성이 드러난다.) 따라서 대중적 여성 서사에 흔히 따라붙는 ‘임파워링’,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주체화’라는 조어에 함축되거나 생략된 지점을 짚을 필요가 있다. 미셸 푸코가 말했듯 주체화(subjection)는 곧 복종(sub-)을 수반하며 통치성의 메커니즘에 귀속되지만, 맥락이 삭제된 주권적 행위 주체성에 대한 관점은 서구 근대의 젠더화된 이항 대립의 한계를 답습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해방과 자유의 수사와 연동되는 경향이 있다. 소수자성에 대한 배제 혹은 (콜린스와 크렌쇼에 의해 개념화된) 교차성에 대한 매우 협소하고 피상적인 이해를 통해 나타나는 ‘대문자 여성’ 간의 서사, 서구 근대의 계몽주의적 문법을 따르는 정치적 상상력, 취약성에 대한 혐오, ‘연대’에 대한 협소한 이해… 텍스트 내재적으로 혹은 텍스트를 독해하는 대중적인 욕망에서 나타나는 한계를 살펴보면***, 한국에서 ‘여성 서사’를 다루기 위한 (대중적인) 담론적 자원이 부재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렘피카>는 승리와 성공의 서사에서 나타나는 ‘대문자 여성’이 아니라 세상에 ‘오염된’ 이들의 이야기이며, ‘위인전’의 전개와는 일부러 다른 방향을 택한 이야기다. 라이선스 뮤지컬인 <렘피카>는 그동안 한국에서 창작되었던 대극장 뮤지컬이 보여주는 ‘여성 서사’의 한계를 넘어서며 담론을 확장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창작과 라이선스라는 범주와 그 내적 특성을 단순히 나눌 수 없고, 이러한 조건에 포섭되지 않는 연극/뮤지컬 작품도 있지만 (혹은 이러한 텍스트 내적인 한계를 새롭게 전유하려는 독해의 힘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서사’를 주된 홍보 문구로 내건 한국 상업 창작 공연예술 작품들의 경향을 짚다 보면 앞서 언급했던 의문은 일정하게 반복된다. 물론 내용을 연출의 형식과 조화시켜야 하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최선의 결과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차선책을 선택해야 했던 창작진의 판단 과정과 그 작품을 향유하기 위해 전유와 타협을 거쳐야 했던 이들의 노력은 이해하지만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유지할지 결정하는 시선에 내재한 가치 판단의 논리에 담긴 모종의 ‘혐의’는 부정할 수 없다.
이때 다시 짚어야 하는 것은 여성서사의 영토적 확장에 대한 상상력이 시장화된 대안, 즉 소비 자본주의를 경유하는 방식으로 수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공연예술의 내재적/예술적 가치가 더 많은 ‘이익’이라는 시장의 가치와 항상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경험적) 사실과 함께, 단순히 시장의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생산적인 담론을 위한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얼마나 성공/흥행했는지’라는 소비자 중심주의의 구매력이 나타나는 지표를 통해 ‘여성 서사’의 가능성을 (신자유주의와의 접점 속 소비주의의 언어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공연 프로덕션이라는 조직 내부의 취약성과 한정된 ‘관심’이라는 자원을 감안한다면 불가능한 기획이다. 특정 시즌에 마니아층의 관심을 통해 흥행했지만 시즌이 반복되며 (캐스팅 등 여러 차원으로 인해) 관심도를 잃고 이러한 상황이 공연예술 생태계에서의 특정 작품의 실패로 이어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상업 예술이라는 산업 속에서 ‘시장적 가치’와 ‘누가 더 많이 소비하는가’라는 초점을 버리자는 제안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여성서사’와 ‘여성’이라는 기표에 내재된 정치성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는 담론적 공간(공론장)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해야 한다.
공연 프로덕션 자체의 취약성은 한국의 창작 작품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라이선스 뮤지컬의 경우라도 원작 프로덕션이 라이선스 공연의 진행 과정에도 개입하는 영미권과 달리 독어권이나 러시아권 라이선스 공연의 경우, 내실화된 제도와 체계가 부재하다면 제도의 ‘해커’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 이 시점에서, 이번 <렘피카>의 흥행이 매우 조건적이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렘피카> 한국 공연이 종료된 이 시점에서, 한국 상업 공연예술 작품에서 ‘여성’이라는 기표가 드러나는 역사적 맥락과 그 안에서 <렘피카>가 던진 질문을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렘피카>는 지금 이 시대에 무슨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이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감각 중 가장 생경했던 것은 100년이 넘는 시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의 현실과 닮아 있다는 기묘함이다. 렘피카를 위태롭게 만들었던 젠더화된 취약성과 유럽에서 오랜 혐오의 대상이었던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현재 소수자 혐오와 파시즘의 재-부상,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과 가자 지구에서의 집단 학살이 세계사적 화두가 된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연속되고 있을까? 이 텍스트 속 렘피카에게서 나타나는 ‘차별받는 유대인’이라는 맥락과 피억압성의 문제는 어떻게 현재와의 시차 속에서 ‘시온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유대적인 이동성의 문제로 ‘번역’될 수 있는가? (이는 연극 <올드 위키드 송>이 하지 못한 것이다.) 뮤지컬 <렘피카>가 의미 있는 이유는 이러한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맥락을 (굳이 매끄럽게 다듬지 않으며)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한 공간을 텍스트 내재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마련했다는 점이다.
*** 이에 대한 논의와 문제의식은 아래 문헌 참고: 오혜진, 2021, 「‘주체’와 불화하는 글쓰기 ─최근 한국 퀴어/페미니즘 문학의 에토스에 대한 메모」, 웹진 『SEMINAR』 Issue 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