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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날은 점점 무더워지네

어쩌면 우리는 늙어 갈 수 없을지도

by 김그린 에디터
2026.07.1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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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에게는 늙어 갈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이따금씩 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린 노후를 맞이할 수 없을지도 몰라. 인류의 잔여 수명이 우리의 잔여 기대수명보다 짧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수했으나 가장 큰 이유를 대자면 간명했다. 그야 날이 점점 무더워지고 있으니까.
 
나날이 뜨거워지는 지구와 기후위기의 말로라는 것은, 모든 만성의 중차대한 문제가 그러하듯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아 평온한 일상에 침투해 오지 못하는 부류였다. 요컨대 그것은 가게를 둘러보는 찰나의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쓰이고 버려지는 일회용 우산 비닐, 문을 활짝 연 상점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린 에어컨 바람, 이제는 놀랍지 않은 열대성 스콜, 서울의 복판에서도 무리 없이 열매를 맺는 바나나와 파파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었다.
 
그러나 작정하고 현실을 직시한다면 과연 인류의 여생이란 우리에게 애당초 허여된 여생보다 한참 모자라다는 말이 너무나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임계점이 2050년에서 2030년으로 훅 앞당겨졌다나 뭐라나. 돌이킬 수 없는 재앙까지 남은 시간을 알리는 기후위기 시계가 3년을 가리켰다가, 2년을 가리켰다가, 이제는 1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는 해석이 들린다나 뭐라나.
 
물론 무더워지는 것은 비단 지표면뿐만은 아니었다. 끝을 모르고 달구어지는 다른 것들로는 시대를 역행하는 무지와 폭력성, 또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새롭게 등장한 무지와 폭력성, 국제적 정치적 인도적 일상적 내지는 그 밖의 모든 무수한 영역에서 창궐하는 악의와 완고함 등이 있을 터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볼멘소리나 체념만 주워섬기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NGO나 시민단체, 인권단체 등을 기웃거리곤 했다. 그런 단체들이 보내 오는 알림을 주욱 받고 있노라면, 악조건 속에서도 타인을 돕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낄 수 있었지만 동시에 밑바닥 없는 절망도 함께 맛볼 수 있었다. 의로움 내지는 따뜻함을 안고 내밀어지는 손길은 한 줌어치였으나 그에 반하는 저열함이란 언제나 게걸스럽게 팽창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므로. 말하자면 서명 운동이나 후원자 명단에 이름을 적는 사람들의 목록은 늘 일정했고, 그 서명 운동이나 후원을 촉발하는 범죄와 만행은 언제나 드라마틱하게 다채롭고 새로웠다. 안나 카레니나의 도입부를 약간 비틀면 그러하듯이.
 
정말 우리에게 노년을 맞이할 기회가 없을지를 생각해 본다면 역시나 경우의 수는 한 가지뿐인 것처럼 느껴졌고,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 될까 점쳐 본다면 그제서야 경우의 수는 대폭 늘어났다. 우리에게 예비된 종장이란 <투모로우> 식의 마무리일 수도 있고, <시녀 이야기>의 길리어드를 닮아 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니면 수많은 이류 삼류 영화에서 아포칼립스를 다루는 뻔하기 짝이 없는 방식대로 눅진하고 치졸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또 그도 아니라면 사회가 급격히 붕괴되는 모습을 다룬 여느 게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을지도. 언제 어떻게 숨이 다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이 땅 위의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특질 아닌 특질이라지만, 아무튼 간에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삶의 불확실성이 예견된 종말의 확실성에 속수무책으로 압도당하리라는 사실이었다. 가망 없는 확실성이 가능성을 품은 불확실성을 이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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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마지막 세대가 될지 모를, 운이 좋다면 마지막보다 한 칸 앞선 세대가 될 수 있을 처지의 구성원은 어떤 마음으로 남은 삶을 살아내야 할지를 한참 고민했더랬다. 선택지 중 하나는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다며 설치는 자극적인 미디어 작품에서 나오는 모습대로 사는 것이었다. 내일이 없는 듯이, 주변에 위해를 가하길 꺼리지 않으며, 말초적인 쾌감과 욕구의 실현만을 추구하며. 그러나 스스로를 망치고 주변을 망치며 독선적으로 사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겨 먹지 못한 부류의 인간인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체념을 안은 채 욕심도 희망도 절망도 없는 채로 무미건조하게 사는 선택지는 어떨까. 그건 불과 얼마 전까지 내가 채택했던 방식이었다. 도피할 수 있을 때까지 도피하다가 인간다운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 그것은 내가 지닌 유일한 소망이래도 좋았다. 달리 이루고픈 일이나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일 따위는 없었다. 적당히 침잠한 채로 살면 햇빛을 볼 일도 심해로 가라앉을 일도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또 지금에 이르러서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적당히 침잠해 떠다니는 존재를 단번에 끌어올려 주는 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우연에 등이 떠밀려 마주한 햇빛의 파편 같은 것들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본성이란 고루한 논제는 실은 나쁜 쪽으로 물들기 더 쉽게 설계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함을 지켜내는 이들이란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일말의 생각을 덧붙이게 되었다.
 
이제는 그 모든 실망과 그 모든 거절이 너를 여기까지 이끈 거야, 라는 웨이몬드의 대사를 곱씹는 중이고,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사람은 해야 하니까요, 라는 이름 모를 그 옛날의 운동가가 남겼다는 말을 되풀이해 보는 중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며 도피할 수 있을 때까지 도피하다가 인간다운 마지막을 맞이하겠다는 이전의 소망을, 인간다운 삶을 살며 그럼에도 투쟁할 수 있을 때까지 투쟁하다가 인간다운 마지막을 맞이하겠다는 소망으로 바꾸어 읽어 보는 중이다. 여전히 우리 삶의 불확실성은 예견된 종말의 확실성에 압도당하고야 말 것 같지만, 그 예견된 종말의 확실성을 압도하는 더 큰 확실성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은 조금 더 살아 보고 싶다는 마음일 것이다. 아직은 살고 싶다.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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