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극 <타인의 삶>이 ‘연극’이라는 매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내게 이 작품은 시대극의 상황을 빌려온 작품에 가깝기 때문이다. 작품의 배경은 동독이며, 기본적인 시나리오 구조만 놓고 보면 국가 권력과 검열에 대한 저항을 다룬 시대극이다. 나는 그 역사적 사건 자체를 다룬다기보다는, 그 사건이 끌고오는 소재가 오늘날까지 어떤 질문으로 이어지는가를 묻고있다고 본다.
둘째, <타인의 삶>은 무엇보다 그 질문을 '서사' 이상의 연극적 요소, 즉 무대, 조명, 배우의 움직임과 연기라는 연극적 수단을 통해 세련되고 표현하는데 성공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1. 바라보는 사람과 바라봐지는 사람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는 ‘시선’의 문제다.
작품의 시작에서 정의되는 '시선'은 단순히 '누군가를 바라보는 행위'가 아니라 '권력의 작동 방식'에 가깝다.
동독 사회에서는 검열을 하는 슈타지와 자신이 바라보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슈타지는 상대의 일상과 비밀, 감정까지 파악하지만, 감시당하는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러한 불균형 속에서 시선은 곧 권력이 되고, 일방적인 바라봄은 폭력이 된다.
극의 초반부에서 슈타지 요원 비즐러는 철저히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에게 주어진 이름인 ‘HGW XX/7’은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우고, 그를 익명의 감시 장치로 만든다. 반면 극작가 드라이만과 배우 크리스타 마리아 질란트는 감시의 대상이 된다. 비즐러는 이들의 삶을 기록하고 분석하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판단은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타인의 삶을 바라보되, 그 삶에 참여하지 않는 , 동독의 적극적인 '칼'이자 '방패'다.
그러나 비즐러의 시선이 '권력의 시선'에서 '인간의 시선'으로 이동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는 드라이만을 감시하면서 점차 그의 삶에 감화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즐러가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버린 뒤 드라이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드라이만의 고발 기사를 숨기기 위해 비즐러가 가상의 ‘사회주의 40주년 기념 공연’을 만들어 내는 장면에서, 그는 초반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사회주의의 이상을 진심으로 믿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의무를 포기하면서까지 드라이만과 그의 동료들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다. 이 변화는 정치적 사상의 전환이라기보다,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에 가깝다.
작중 드라이만 역시 정치적 주장보다 인간의 감정이 가진 힘을 강조한다. 그는 친구 예리스카의 죽음을 고발하는 글을 쓰면서 단순히 정치적인 구호를 반복하기보다, 한 인간이 겪은 절망과 비극을 전달하고자 한다. 권력은 인간을 통계와 기록, 관리의 대상으로 환원하지만, 예술은 그 안에서 지워진 개인의 감정을 다시 복원한다. 비즐러가 변화하는 이유 역시 드라이만의 정치적 논리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삶과 예술에 감응했기 때문이다.
2. 감시자에서 관객으로
바로 이 점에서 <타인의 삶>은 결국 예술의 힘에 관한 작품이 된다. 특히 연극은 비즐러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변화 자체를 무대 위에서 직접 보여준다. 비즐러는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기록하는 감시자였지만, 후반부에 이르면 타인의 삶을 해석하고 새로운 서사로 재구성하는 인물로 변한다. 권력의 요구에 맞추어 기록을 작성하던 사람이 하나의 희곡을 창작함으로써, 단순한 기록자에서 예술가로 이동한다.
후반부의 비즐러는 여러 면에서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관객은 처음에는 작품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구조를 바라보지만, 극에 몰입할수록 각 인물의 감정과 삶을 따라가게 된다. 비즐러가 크리스타 마리아 질란트를 사랑하고 예리스카에게 기묘한 연대감과 우정을 느끼게 되듯, 관객 역시 처음에는 낯설었던 인물들의 고통을 자신의 감정 속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비즐러는 감시자의 위치에 있지만, 동시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하나의 연극을 지켜보는 관객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권력의 명령에 따라 타인의 삶을 바라보지만, 점차 드라이만과 주변 인물들의 관계에 몰입하고 그들의 고통에 반응한다. 감시를 위해 시작된 관람은 어느 순간 감응의 경험으로 변하고, 감시자는 자신이 바라보던 사람들의 삶에 책임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즐러가 후반부에 자신이 창작한 희곡을 연기하는 장면은 단순한 극적 장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는 더 이상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감시자가 아니라, 자신이 바라본 삶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예술가로 재탄생한다. 관객은 비즐러의 변화를 설명으로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배우처럼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통해 그의 변화를 직접 목격하고 느낀다.
이는 <타인의 삶>이 시대적 배경에만 머무르지 않고, 예술이 한 인간의 시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장면이다. 처음에는 예리스카가 남긴 시집이었고, 다음은 드라이만과 동료들의 고발 기사였고, 마지막으로는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을 감시기록의 형태로 남겨진 희곡이었다.
3. 폐허 위에서 역전되는 시선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도 바로 이 클라이맥스였다. 이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앞뒤의 무대 연출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드라이만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장관 헴프와 재회한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감시당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벽과 천장에 숨겨진 전선을 확인한다. 그동안 심문실이나 어두운 저녁 장면에서 특정 인물과 공간만을 집중적으로 비추던 조명은 이 장면에서 차갑고 공간을 고루 비추듯 켜진다. 그 결과 무대는 연극적으로 압축된 공간이 아니라, 모든 비밀이 폭로된 일상 공간처럼 보인다.
이어 천장에서 수많은 전선이 한꺼번에 떨어진다. 드라이만은 길게 이어진 전선을 직접 잡아 빼낸다. 전선이 끝없이 이어지는 모습은 그를 향한 감시가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숙하게 지속되어 왔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감시는 더 이상 추상적인 국가 권력이 아니라, 그의 집과 생활 공간을 실제로 침범하고 있던 물질적인 흔적으로 나타난다.
자료실 장면에서는 드라이만을 감시한 기록들이 양쪽에서 쏟아져 나와 무대 위에 널브러진다. 그가 안전하고 소중하다고 믿었던 삶의 공간이 감시와 기록에 의해 유린되었다는 사실이 극적으로 표현된다. 한 인간의 삶은 수많은 종이와 보고서로 환원되어 폐허처럼 흩어진다.
감시 기록은 진실을 보존하는 자료인 동시에 한 인간의 삶을 훼손한 흔적이다. 타인의 말과 행동은 기록되어 남았지만, 삶을 이루는 감정과 맥락은 국가가 정한 문장 속에서 잘려 나간다. 무대 위에 쌓인 기록들은 비즐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권력의 시선이 타인의 삶을 얼마나 쉽게 문서와 정보로 축소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차가운 폐허 속에서 드라이만이 비즐러의 기록을 읽기 시작하면서, 어느순간 변화한다. 비즐러를 연기한 배우가 다시 무대에 등장한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서지만 실제로 만나는 것은 아니다. 드라이만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 비즐러를 바라본다.
지금까지는 비즐러가 드라이만을 일방적으로 바라보았다면, 이 장면에서는 그 구도가 역전된다. 감시당했던 사람이 기록을 통해 자신을 지켜보던 사람을 비로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비즐러의 시선 아래 놓여 있던 드라이만은 이제 기록 속에서 비즐러의 행동과 선택을 읽는다. 일방적이었던 시선은 비로소 상대를 향해 되돌아간다. 일방적이었던 시선이 시간 차를 두고 비로소 동등한 지점에 서는 장면이다.
물론 이들의 관계가 완전히 대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삶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지만, 드라이만은 남겨진 보고서를 통해서만 비즐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역전 속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다. 비즐러는 더 이상 얼굴 없는 감시자로만 남지 않는다. 드라이만은 기록의 틈에서 자신을 지켜 준 한 인간을 발견한다.
4. 감시자가 희곡을 쓰는 순간
이어서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고발 기사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 냈던 희곡을 직접 연기한다. 평소 차갑고 감정을 억누르던 비즐러가 과장되고 격정적인 연기 톤으로 희곡을 재현하는 순간, 작품 전체에서 꾸준히 암시되었던 ‘연극’의 존재가 무대 위에서 폭발한다.
그 희곡은 사회주의 40주년 기념 공연이라는 명목에 맞게 레닌의 혁명 과정을 다룬다. 그러나 희곡의 실제 재료는 드라이만과 동료들이 고발 기사를 쓰던 과정이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동독의 통계 조작을 발견한 사건을 차르를 믿었던 사회주의 동지들이 배신감을 느끼는 장면으로 바꾼다. 동료들이 기사의 내용을 두고 논쟁하는 모습은 혁명이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변형된다.
드라이만이 원고를 들키지 않기 위해 붉은 잉크를 사용한 일은 하얀 우유로 비밀 편지를 쓰는 장면으로 바뀐다. 또한 드라이만이 자신의 글이 당장 아무런 변화를 만들지 못하더라도 후대의 젊은이들에게 호소할 수 있다고 말한 장면은, 레닌의 혁명이 젊은 세대를 깨울 것이라는 대사로 전환된다.
이러한 변형은 비즐러가 단순히 거짓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사건을 선택하고 재배열하여 하나의 극적 서사로 만들어 냈음을 보여준다. 그는 권력의 입맛에 맞게 정보를 가공하는 기록자였지만, 역설적으로 그 과정에서 극작가가 된다.
드라이만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현실을 허구로 바꾸면서 비즐러는 처음으로 자신의 언어와 상상력을 사용한다. 이전에 자신의 집에서 서툴게 새로운 문장을 뱉어 내던 그는, 이제 타인의 행동을 그대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행동의 의미를 해석해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시 쓴다.
그의 희곡은 거짓이지만, 그 거짓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비즐러는 권력이 요구하는 허구의 형식을 빌려 드라이만의 진실을 지킨다. 국가가 타인의 삶을 조작하고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던 언어가, 이제는 그 삶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연극 속에서 또 다른 연극이 재현되고, 감시자였던 인물이 한 명의 극작가이자 배우처럼 무대에 서는 이 장면은 연극이라는 매체가 가진 힘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비즐러의 내면 변화는 대사로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연기 방식과 몸짓, 목소리의 변화로 표현된다. 차갑고 절제된 인물이 과장되고 감정적인 연기를 펼치는 모습 자체가, 그가 더 이상 이전의 비즐러가 아님을 증명한다. 작품의 핵심 메시지가 연극이라는 형식과 배우의 생생한 연기에 맞물려 이 장면 하나에 집중된다.
5. 어디에나 존재하던 감시자, 보이지 않는 동료
작품 전반의 연출 역시 비즐러의 위치 변화를 세밀하게 드러낸다. 그의 그림자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어디에나 존재하는 감시자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하고, 무대 주변을 끊임없이 배회하게 함으로써 인물들이 벗어날 수 없는 시선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처음의 비즐러는 무대 위의 모든 인물을 따라다니는 권력의 눈이다. 그는 인물들의 공간 바깥에 존재하면서도 언제나 그들의 삶에 침입한다. 그의 몸은 한 사람의 몸이면서 동시에 슈타지라는 거대한 감시 체계의 일부처럼 보인다.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는 그림자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어디에나 존재하는 감시 권력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비즐러는 단순히 뒤를 쫓는 감시자가 아니라, 드라이만과 함께 일을 도모하는 보이지 않는 동료처럼 무대에 서게 된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면서도 인물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의 위치는, 감시와 연대 사이에서 변화하는 비즐러의 복합적인 상태를 보여준다.
그는 여전히 드라이만의 삶 바깥에 있는 사람이다. 드라이만과 대화를 나누지도, 자신의 존재를 밝히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전처럼 타인의 삶을 수집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개입한다. 어디에나 존재하던 감시자는 어느 순간 곁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 동료가 된다.
6. 예술가에게 바치는 경의
극의 마지막에서 드라이만이 비즐러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드라이만은 예리스카가 말했던 것처럼 사회의 요구를 대변하는 ‘희곡작가’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의 삶을 솔직히 기록하는 ‘소설가’가 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자신을 지켜본 익명의 감시자를 향한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에게 직접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사람이지만, 누구보다 오랫동안 그의 삶을 바라보고 기억한 사람이다. 그는 동시에 시를 읽고, 연극을 감상하고, 마침내 희곡까지 창작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드라이만이 그에게 바치는 경의는 자신을 구해 준 한 명의 동료에 대한 감사이면서, 예술을 통해 인간적인 시선을 회복한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비즐러는 자신의 이름을 건 작품을 세상에 내놓지 못한다. 그가 창작한 희곡은 드라이만을 보호하기 위한 보고서 속에만 남는다. 그러나 바로 그 익명성 때문에 그의 창작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인정이나 명예를 얻기 위한 예술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이다.
드라이만이 말하듯 인간은 필요에 따라 교체될 수 있는 부품이 아니다. 예술 작품 역시 소비되고 대체되는 물건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고, 권력의 시선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다시 인간의 시선을 돌려준다. 더 나아가 타인의 삶을 기록하던 감시자를 그 삶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예술가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7. 시선이 예술이 되는 순간
<타인의 삶>은 서사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정돈되어 있고, 무대 연출 역시 절제되고 명확하다. 특히 비즐러가 자신이 창작한 희곡을 연기하는 클라이맥스와 그 전후의 장면은 연극이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끝까지 끌어올린다.
이 작품에서 연극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릇에 머무르지 않는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행위와 연극을 관람하는 행위가 서로 겹치고, 권력의 시선으로 시작된 관찰이 타인의 삶에 감응하는 경험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다시 하나의 희곡과 연기로 탄생한다. 연극을 바라보는 행위, 타인을 바라보는 행위, 그리고 그 시선에 의해 인간이 변화하는 과정 자체가 작품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은 그래서 단순히 지나간 시대의 감시와 억압을 재현하는 시대극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작품은 시선에 대해 묻고, 그 시선이 바꿀 수 있는 것을 묻는다.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권력의 시선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시선은 어떻게 다른가. 타인의 삶을 바라본 사람은 그가 본 것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지게 되는가. 그리고 타인을 향한 시선은 어떻게 기록을 넘어 하나의 예술이 되는가.
비즐러는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다만 그가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인간을 감시하고 분류하기 위해 바라보았지만, 나중에는 그 삶을 이해하고 지키기 위해 바라본다. 그의 변화는 시선을 거두는 데서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끝까지 바라보고, 그가 바라본 삶에 응답하기로 선택하는 순간 일어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감시자는 관객이 되고, 관객은 동료가 되며, 마침내 예술가가 된다. <타인의 삶>이 보여주는 예술의 힘은 타인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낙관에 있지 않다. 그 삶을 함부로 기록하고 판단하던 시선이, 타인의 고통 앞에서 멈추고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있다.
그렇게 이 작품은 시선에 대해 묻고, 시선이 바꿀 수 있는 것을 묻고, 인간적인 시선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