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이 글에 대한 제목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깊이 고민하다가 한국 창작 뮤지컬 <영웅>의 시그니처 가사 "누가 죄인인가"를 가져와 붙여보았다. 이 단 한 문장을 제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뮤지컬 <소크라테스 패러독스>를 관람하는 동안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생각의 과정과, 극이 끝난 후 다다른 최종적인 결론을 가장 완벽하게 대변해 주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2,500년 전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 법정을 현대의 가장 치열한 언어 예술인 '힙합'으로 재해석한 이 무대는, 가사 하나하나를 날카로운 랩 라임과 비트로 맞부딪히며 관객을 자연스럽게 아테네 법정의 배심원석으로 끌어들인다. 고전 철학의 고리타분한 변론 대신 무대를 가득 채우는 힙합의 파격적인 에너지 속에서, 나는 비로소 "과연 누가 죄인인가"라는 질문 속에 놓이게 되었다.
쉽게 생각하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이 이미 그의 제자 플라톤에 의해 쓰였고, 이 책은 고전 중에서도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기에, 흔히 우리는 이미 소크라테스 쪽의 변론이 타당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이 법정을 바라보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왜냐? 소크라테스는 이미 기나긴 역사의 시간을 거쳐 지성인으로 인정받아 왔으니까. 역사 속에서 다수가 인정한 거면 나도 그 인정의 무리에 편승하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더란다. 철학을 전공했음에도 소크라테스에 큰 관심이 없었던 나는 공인되어 온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의 의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이 사실이다.
엇, 그런데 막상 공연을 보고 나니 이전까지 소크라테스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 뒤흔들렸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수호한 선인, 그리고 그를 고발한 멜레토스는 희대의 악인'이라는 이 분명한 편가르기와 이분법이 과연 온당한 평가인가? 그런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웠던 현명한 다른 관객 분들도 계셨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서로를 까내리는 랩 배틀을 잠자코 듣다보면 어느 한편에 표를 행사함으로서 의견을 분명하게 표명하는 것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디스전을 듣다보니 드는 생각은 멜레토스는 확실히 현실적이며, 그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상대적으로 이상적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30인의 과두정을 겪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분열되었던 이 국가를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로 조직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 것이 부당한 생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시장에 들려오는, 더군다나 옳다고 인정되어 온 내용을 사실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검토해 보는 것, 그리고 그 끝에 도출되는 '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자각에서부터 다시 깨달음의 여정을 시작하는 지난한 과정을 인생의 과제로 삼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멋있어 보일지는 몰라도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어느새 내가 배심원이 되기라도 한 것 마냥 그 두 사람의 주장과 근거를 들어보며, 나는 나름 한 단어와 하나의 문장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한 단어는 '아포리아(aporia)'고, 한 문장은 '모든 진리는 부분적이다'는 것이었다. 아포리아란, '무엇이 없다'라는 뜻의 a와 '길/통로'라는 뜻의 poros의 합성어다. 직접적인 의미로는 길이 없기에 난관에 봉착했다는 것이고, 철학사의 맥락에서 이 용어는 두 개의 대립하는 주장이 각각 타당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한 쪽의 편조차 들어줄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사실 뮤지컬 <소크라테스 패러독스>도, 그리고 이 뮤지컬이 다루고 있는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도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바로 '아포리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음의 2가지 이유에 근거하는데, 이는 우연히도 내가 이 뮤지컬의 제목을 보다가 든 궁금함에서 기인한다.
여기서 패러독스라는 말과 아포리아가 비슷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수 있는데, 둘은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강조점이 다르다. 패러독스는 '엉켜 있는 상황/논리 자체'인 것과 달리, 아포리아는 '그 상황/논리에 부딪혀 더 이상 나아가거나 판단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첫째, 소크라테스 패러독스는 소크라테스'의' 패러독스(Socratic Paradox)를 의미한다. 소크라테스가 소위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자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제시하던 내용과 방식이 바로 '역설'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 이유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결론은 그러한 역설의 극치를 보여준다.
둘째, 소크라테스 패러독스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패러독스(Paradox about Socrates)를 의미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 철학적 무기로 인해 (더 정확히는 소크라테스를 헛된 궤변을 가르치며 비싼 돈을 받는 소피스트라고 풍자하는 당대의 희극 <구름>이 그가 고발당하게 만든 동인이 되었기에) 아테네인들의 반발과 불만을 사게 되어 사형까지 이르게 된다. 가장 지혜롭다고 판명된 자가, 가장 문명화되고 자유롭다고 자부하던 아테네 민주주의 법정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모순이 발생된 것이다.
배심원석에 앉아 그들이 도달한 아포리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대 위에서는 각자의 완벽한 논리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의 고발장에 적힌 논리적 모순을 정밀하게 파헤치며 반박하고, 멜레토스 역시 공동체의 생존과 법 질서라는 정당한 명분을 들어 소크라테스의 반박에 맞반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 모두는 각자의 영역에서 타당한 근거를 대며 논쟁하고 있지만, 사실 두 논리가 지향하는 목적지가 완전히 다르기에 대화는 접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 엇갈린다.
두 인물의 디스전은 서로 다른 규칙을 가진 완전히 다른 게임의 충돌이다. 소크라테스는 '체스'를 두는 방식으로 변론한다. 체스는 '킹'을 죽이면 끝이 나는 게임이다. 그렇기에 그 하나의 분명한 목적을 위해 판 위에 놓인 각각의 말은 각자에게 부여된 고유한 역할과 엄격한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소크라테스는 체스판 위에서 상대 변론의 논리적 모순을 하나씩 파헤쳐 체크메이트로 몰아넣는다. 이때 소크라테스에게 배심원 수백 명의 표수나 대중의 평판은 무의미하다. 그가 말한 영혼의 덕은 숫자나 세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멜레토스는 마치 '바둑'을 두는 방식으로 소크라테스를 향한 자신의 고발이 타당했음을 주장한다. 바둑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 돌들이 뭉쳐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판 전체의 영토를 정복하면 이기는 게임이다. 개별 돌의 독자성보다 '대중의 표결과 집단적 세력'과 같은 수의 힘을 우선시하는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라는 개인의 논리가 맞는지 점검하기 보다 '아테네라는 판 전체의 질서와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따라서 멜레토스의 바둑판 위에서 소크라테스의 정밀한 반박은 그 판을 흔드는 한가하지만 위험한 소음이다.
체스 기사와 바둑 기사가 한 무대 위에 서서 각자의 룰을 주장할 때, 애초에 정상적인 게임이나 대립은 성립할 수 없다. 서로 사용하려는 룰 자체가 다르기에, 이 논쟁은 치열한 토론이 아니라 각자의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상대 변론의 모순을 파헤치며 체스판의 룰로 압박하려 들면, 멜레토스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체제의 위협이라는 바둑판의 룰로 눌러버린다. 성립될 수 없는 판 위에서 체스판에 바둑돌을 쏟아붓고 있었으니, 합의나 설득이 아닌 사형 선고라는 파국이 도출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대립은 무대 위 두 사람이 쏟아내는 랩의 리듬과 분위기를 통해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소크라테스가 정해진 박자를 쪼개가며 긴 논리를 조목조목 따지는 날카롭고 빡빡한 랩을 구사한다면, 멜레토스는 듣기 쉬운 리듬에 선동적인 캐치프레이즈를 반복하고 앙상블의 호응까지 더해진 웅장하고 굵직한 랩으로 맞선다. 치열하게 서로를 반박함에도 서로의 논리적 판을 인정하지 않기에 발생하는 이 음악적 엇갈림은, 인간이 지닌 가치의 한계를 보여준다. 각자의 판 안에서는 완벽한 진리일지 몰라도, 상대의 세계를 온전히 수용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가 치열한 랩 배틀에서 증명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떠오른 문장이 바로 "모든 진리는 부분적이다"라는 문장이었다. 이 문장은 진리를 어느 하나로 완결해 버리는 순간 그에 대치되는 다른 내용은 배제되기 쉽다는 것을 경고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영혼의 덕도, 멜레토스가 말한 공동체의 질서도 모두 논리적으로 봤을 때는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국가 질서의 안정과 덕 있는 개인은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둘은 동시에 실현될 수 없으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하나는 배제되기가 쉽다.
그렇다면 서로의 룰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한 쪽의 사형 선고로 끝나버린 이 아포리아는, 그저 비극적인 대화의 처참한 실패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라는 거대한 말을 깨우기 위해 신이 보낸 '등에'라고 말했다. 편안함에 취해 나태함에 빠진 말을 등에가 끊임없이 쏘아대며 깨우듯, 이 비극적 충돌은 관객인 우리에게 손쉬운 정답 대신 불편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분법적인 우리의 사유 방식을 흔들어 놓는다.
이 극은 '누가 죄인인가?'에 대한 명쾌한 정답을 쥐여주지 않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아포리아의 과정을 통과한 뒤 맞이하는 결론은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쪽의 말에 솔깃해 다른 쪽 상대를 손쉽게 악으로 몰아세우던 미숙한 이분법을 뒤로하고, 두 가치가 만드는 팽팽한 긴장감으로부터 '균형 잡힌 지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한 가지 방법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