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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손상된 지구에서 비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법 - 패치 인류세

기술적 오만과 종말론적 냉소를 넘어서는 '응답-능력'의 윤리

by 신동하 에디터
2026.10.24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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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세는 인간이 지구 전체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보는 시대 구분이다. 기존 인류세 논의는 보통 인간을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로, 자연을 그에 따라 바뀌는 대상으로 여긴다. 기후 과학자들은 온실가스 배출량, 기온 상승치, 해수면 변화를 측정하여 인간이 환경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왔다.


      그러나 환경 변화는 지구 장소마다 다르게 일어난다. 어떤 숲은 같은 기후 위기 속에서도 무너지고, 어떤 숲은 남는다. 멸종하는 종이 있는 반면 새로운 곳으로 이동해 번성하는 종도 있다. 이처럼 환경 변화는 추상적인 평균보다 구체적이다. 특정한 장소와 그곳에 사는 생물들 사이의 구체적인 접촉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패치 인류세』의 저자들은 이러한 불균등한 차이에 주목한다. 저자들은 인간이 혼자 환경을 바꾼다는 단순한 생각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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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건은 누가 만드는가


       

      기존 인류세 논의는 인간의 무분별한 벌목, 산업 시설 건설, 대규모 물류 운송만을 환경 파괴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러한 설명은 환경 변화가 인간의 의도와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생태계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인간의 예측과 다르게 전개된다.


      첫째, 인간은 저마다 다른 특정 지역을 개발한다. 지역마다 토양 조건, 서식 생물, 산업 기반, 토지 이용의 역사가 각기 다르다. 저자들은 생태적·역사적 조건이 고유한 시공간 단위를 '패치'라고 부른다. 이때, 같은 개발 행위라고 하더라도 실행되는 패치의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둘째, 비인간 생물은 인간의 계획에 능동적으로 반응한다. 비인간 생물은 인간이 바꾼 환경 속에서 인간의 의도를 벗어나 자율적으로 번식하거나 변이한다. 저자들은 인간이 구축한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일으키는 인간 외 존재들의 특성을 '이탈성'이라고 부른다.

       

      북아메리카산 붉은소나무좀의 확산은 패치와 이탈성이 함께 작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인간은 목재 무역을 위해 북아메리카의 소나무를 중국으로 운송했다. 붉은소나무좀은 원래 서식지에서는 천적과 숙주 나무의 방어로 인해 대규모 산림 파괴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붉은소나무좀이 중국이라는 새로운 패치에 도착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붉은소나무좀은 중국 현지의 곰팡이와 결합했고, 그 결과 대규모 소나무 산림 고사가 일어났다.

       

       

       

      2. 자연은 누가 기록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신만을 자연의 지배자로 여겨왔을까. 그 이유는 근대 이후 자연을 관찰하고 지식으로 기록해 온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서구 근대 과학자들은 자신들을 자연 외부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단일 주체라고 생각했다. 과학자들은 동식물을 분류하고 평균 기온과 탄소 농도를 수치화했다. 그리고 보편적인 지식 체계를 세웠다. 이 체계 속에서 자연은 과학자의 관찰과 통제를 받는 수동적 대상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전 지구적 평균 데이터에서 붉은소나무좀의 확산 등 개별 패치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변화를 놓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지 주민도 기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현지 주민들은 생물의 생태 주기와 과거 토양 상태를 실제로 오랫동안 관찰해 왔다. 그러나 서구 과학자들은 객관성이라는 명분 아래 원주민의 기여를 공식 기록에서 지웠다.


      둘째로, 예술가 등 아카이비스트들도 기록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숲이 사라질 때 변하는 풍경의 시각적 형태나 생물들의 소리, 훼손된 토양의 질감은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시청각 매체를 통해 현장의 감각적 변화를 기록하고, 환경 파괴가 생물들에게 어떤 충격으로 닥쳐오는지를 가시화해야 한다.


      『패치 인류세』의 저자들은 이처럼 다원화된 주체들을 결합하려 한다. 그 방법으로 '쌓기'를 제안한다. 쌓기는 서로 다른 자료를 하나의 보고서나 모델로 단순화하는 대신 차이를 그대로 살린다. 과학자는 수치 데이터를 남기고, 현지 주민은 구술 증언을 남긴다. 예술가는 감각 기록을 남긴다. 쌓기는 이 세 자료를 같은 층위에서 겹친다. 서로 다른 관찰과 기록을 하나의 기준으로 환원하지 않고 함께 놓음으로써, 단일한 관점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생태적 관계와 역사적 차이를 포착한다.

       

       

       

      3. 힘은 누구의 것인가


       

      '인류세'라는 이름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거대한 힘의 주체를 '인류' 전체로 뭉뚱그린다. 이 이름은 모든 인간이 환경 파괴에 똑같이 기여했고, 그 피해도 똑같이 분담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낳는다. 그러나 개발을 결정하고 이익을 얻는 위치와, 파괴된 환경에서 고통을 겪는 위치는 철저하게 나뉘어 있다.


      첫째 당사자는 지배 집단이다. 지배 집단은 자본을 투자하여 개발을 주도한다. 소수의 다국적 자본가, 대기업, 제국주의 국가들은 글로벌 무역 경로를 개설했다. 자원을 채굴하여 화석 연료 기반의 산업을 확장했다. 붉은소나무좀 또한 글로벌 목재 업계의 결정에 따라 이동했다. 목재 업계는 이 결정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려 했다.


      둘째 당사자는 취약 계층이다. 취약 계층은 개발 결정권 없이 피해를 직접 겪는다. 식민지 주민, 원주민, 작업장 노동자들은 해당 패치에 산다. 무역 투자자와 달리 산림 고사와 생태계 교란으로 삶의 터전을 잃는다.


      이 권력 격차는 지식 생산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환경을 바꾸는 집단은 자연을 정의할 권력도 독점했다. 제국주의 국가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수탈하려고 과학 연구를 지원했다. 그 결과 과학 연구는 자연을 통제와 착취의 대상으로만 기록했다. 그리고 식민지 토착민의 지식을 공식 기록에서 밀어냈다. 과학자 역시 특정한 국가와 학문 제도의 영향 아래에서 일하므로, 이 권력 구조 외부에 서 있는 중립적 관찰자가 아니다.

       

       

       

      4. 손상된 세계에 머물기: 대안으로서의 '응답-능력'


       

      『패치 인류세』가 폭로하는 현실은 기존 인류세 담론보다 훨씬 암울하다. 기존 인류세 담론은 인간에게 죄책감을 지우면서도 역설적인 안도감을 주었다. 인간이 망가뜨린 지구라면 인간의 기술과 지혜로 다시 수리할 수 있다는 '중앙 조종실'의 환상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치 인류세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계를 한 번에 뜯어고칠 통합 제어판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고 선언한다. 저마다 다른 생태 조건(패치)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생명들의 자율적 번식(이탈성)이 얽힌 세계는 통제 불가능하다. 과거의 온전한 자연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이 냉혹한 자각은 사람들을 깊은 무력감으로 몰아넣는다.


      이 무력감이 오늘날 두 가지 손쉬운 도피로 이어진다. 하나는 첨단 기술이나 지구공학으로 지구 전체를 수리할 수 있다고 믿는 기술적 해결주의다. 다른 하나는 "어차피 지구는 끝났다"며 손을 놓아버리는 종말론적 무력감이다. 두 태도는 겉보기에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같다. 둘 다 거대한 기술 관료나 파멸의 서사 뒤로 숨어, 지금 발 딛고 선 구체적인 현장의 고통에 개입하기를 포기하는 행위다.


      그 대안으로 도나 해러웨이의 '응답-능력'을 제시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해러웨이는 과거의 파괴에 사후적 죄책감만 묻는 법적 책임을 거부한다. 대신 이미 망가진 세계 한가운데서 도망치지 않고, 타자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실천을 제안한다. 타자와의 접촉 방식을 끊임없이 고쳐 짓는 역량이다. 이는 고장 난 보일러를 한 번에 갈아치우는 영웅적 구원이 아니다. 상처 입은 세계를 버려두지 않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끈질기게 조율하는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다.


      여기서 『패치 인류세』의 절망을 넘어서는 정반대의 가능성이 열린다. 지구가 단일한 기계가 아니라 무수한 패치의 얽힘이라면, 실천 역시 단 한 번의 영웅적 구원일 필요가 없다. 지구 전체를 수리하는 일은 거대 기술 권력이나 국가의 몫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패치 안에서의 실천은 다르다. 내가 선 자리에서 다른 존재의 신호에 귀 기울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들과의 접촉 방식을 매일 고쳐 나가는 일은 평범한 개인도 당장 시작할 수 있다.


      결국 인류세의 새로운 주체는 전능한 인간이 아니다. 파멸을 기다리며 냉소하는 관객도 아니다. 새로운 주체는 상처 입은 세계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타자의 부름에 기꺼이 응답한다. 그리고 매일 관계를 다시 짓는다. 바로 '응답-능력을 실천하는 주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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