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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빛이 없어도 자라는 이끼처럼 사는 법 - 뮤지컬 '이끼숲' [공연]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곳에서, 다시 함께

by 손현진 에디터
2026.10.2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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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망 이후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인류의 미래를 상상한다는 점에서, 또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은 문명의 끝을 미리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은 점점 악화되고 있지 않은가. 한참 전부터 경고음을 울려 온 기후 위기와 끊임없는 분쟁, 서로를 향한 악의까지. 그 끝이 정말 멸망뿐이라면,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파국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흘러갈까.

       

      지난 10월 1일 막을 올린 라이브커넥션의 창작 뮤지컬 <이끼숲>이 그리는 '이후의' 세계는 바로 지하도시다. 지상의 문명이 붕괴된 뒤, 인류는 지하로 내려갔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지하도시는 슬픔과 질문이 허락되지 않는 세계다. 그러나 인간다운 우정과 사랑,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한 욕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작품은 이러한 감정들이 질서와 충돌하는 순간을 세심하게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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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발표된 천선란 작가의 SF 연작 소설 『이끼숲』을 원작으로 한 이 뮤지컬은 「바다눈」, 「우주늪」, 「이끼숲」 세 편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재구성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살아가던 네 명의 친구들은 예기치 못한 사건을 계기로 지금껏 당연하게 여겼던 도시의 질서에 의문을 품는다. 작품은 참혹한 현실 앞에 선 인물들을 통해 '그럼에도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소설 속 지하도시를 구현한 무대 연출은 그 질문이 피어난 세계를 관객의 눈앞에 펼쳐 보인다.

       

       

       

      세계, 그다음을 상상하는 무대


       

      뮤지컬 <이끼숲>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다양한 연출적 요소를 통해 지하도시라는 낯선 세계를 제시한다. 하우스 오픈과 함께 객석으로 들어서면 스산한 음향이 가장 먼저 관객을 맞이한다. 그리고 무대 높은 곳에 설치된 디스플레이에는 빅터 연구소, VA2X, 도시감청팀 등 지하도시를 구성하는 다양한 기관과 제도를 소개하는 영상이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마치 잘 만들어진 홍보 영상처럼, 이 도시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친절하게 안내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영상은 관객이 낯선 세계관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동시에 어딘가 묘한 위화감을 조성한다. 모든 것이 잘 정돈된 영상 속 지하도시는 빈틈없이 설계된 완벽한 계획도시처럼 보이지만, 정말 이토록 완벽한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남기는 것이다.

       

       

      천장의 이음매가 눈에 들어왔다.

      물샐틈없어 보였지만 마르코는 저 틈으로 모래가 쏟아져 내리는 상상을 했다.

      사억오천만 헥타르 규모의 지하 도시가 한순간에 내려앉는 것이다.

       

      - 『이끼숲』,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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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이끼숲' 공연 사진 (제공 ㈜라이브커넥션)

       

       

      실제 무대 역시 물샐틈없는 지하도시를 구현한다. 빽빽하게 들어선 구조물과 단단한 금속으로 둘러싸인 공간, 네모난 이음매를 따라 움직이는 차가운 백색광의 조명까지. 무대는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도시의 질서를 반영하듯 치밀하게 계산되고 구조화된 이미지로 다가온다.


      하지만 아무리 견고한 구조물이라도 그 사이로 모래 정도는 흘러내릴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한 통제 아래 운영되는 도시에도 작은 균열은 생겨날 수 있었고, 그 틈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각자의 믿음과 목표를 품은 인물들은 도시의 규칙에 의문을 품은 채 저마다의 선택을 시작하고, 빈틈없어 보였던 세계에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완벽한 도시, 또는 외면한 도시


       

      그리고 균열은 '유오'의 죽음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직업 학교를 수료한 마르코와 소마, 유오, 의주는 업무 분담식에서 여러 부서로 배치된다. 그중에서도 유오가 개발건설팀에 지원한 이유는 지하도시까지 뻗어 내려온 나무뿌리를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 뿌리가 지상에 숲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믿었다. 뿌리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지상에는 숲이 있을 것이고, 숲이 있다면 진짜 별도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건설 현장은 몹시 위험한 곳이었다. 노동자들이 작업 중 부상을 입었을 때 그 신체를 대체할 수 있도록 클론까지 만들어 둘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결국 유오는 작업 중 발생한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때 도시가 노동자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무대 위 디스플레이를 통해 드러난다. 마치 사고 현황을 알리는 전광판처럼, 화면에는 사망자와 부상자의 수가 실시간으로 집계된다. 누군가의 죽음이 하나의 숫자로 환산되는 순간, 노동자들의 존재는 그저 관리해야 하는 하나의 통계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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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이끼숲' 공연 사진 (제공 ㈜라이브커넥션)

       

       

      이러한 부조리는 유오가 일하던 건설 현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클론연구소의 경비원으로 일하는 마르코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동료 은희에게 끌리지만, 그가 일하는 곳 한편에서는 계약서를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외침이 메아리처럼 머문다. 은희 역시 녹록지 않은 현실을 살아간다.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지만, 생계를 위해 일하는 동안에는 정작 어머니 곁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도시의 통제는 노동 현장뿐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에도 깊숙이 개입한다. 인간은 도시의 필요에 따라 생산되었고, 쌍둥이로 태어난 의주와 의조는 함께 존재할 수 없었다. 제출된 계획서에 포함되지 않은 출생이라는 이유로 의조의 존재는 세상에서 지워졌기 때문이다. 한편 사랑하는 유오를 잃은 소마는 그의 클론마저 폐기될 위기에 처하자, 클론과 함께 '위'로 올라가고자 한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낯선 SF 세계관의 이면에 노동과 생존의 문제가 짙게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위험한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노동자, 자신의 노동 조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 생계와 돌봄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까지. 나아가 도시는 누군가의 존재를 손쉽게 지우고, 인간의 몸과 죽음마저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상황은 비현실적인 미래를 배경으로 펼쳐지지만, 그 안에 담긴 문제만큼은 낯설지 않다. 배경만 지상에서 지하로 바뀌었을 뿐, 인간을 둘러싼 부조리는 여전히 반복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문명이 한 차례 무너진 뒤에도 같은 문제를 되풀이하는 존재일 뿐인가.

       

       

       

      정해지지 않은 운명들


       

      지하도시를 구현한 무대에는 차갑고 거친 파이프 구조물과 사각형의 틀, 계단, 높낮이가 다른 통로들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다. 겉으로는 질서정연하게 설계된 공간처럼 보이지만, 배우들이 그 사이를 분주하게 뛰어다니거나 구조물을 타고 오르면 공간의 인상이 달라진다. 특히 눈길을 끄는 소품은 바로 손전등이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는 배우들이 서로 엇갈리는 모습을 눈으로 좇다 보면, 무대는 어느새 복잡하게 뒤얽힌 미로처럼 느껴진다. 사방으로 움직이는 불빛을 따라 관객의 시선도 쉴 새 없이 이동하고, 이어지는 통로가 어디인지도 쉽게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이처럼 출구를 찾기 어려워 보이던 공간에도 새로운 길이 생긴다. 배우들이 의자처럼 생긴 구조물을 옮겨 징검다리를 놓는 것이다. 인물들은 처음부터 마련된 통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발 디딜 곳을 만들어 나간다. 이는 결국 서로를 구할 수 있는 존재는 그들 자신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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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이끼숲' 공연 사진 (제공 ㈜라이브커넥션)

       

       

      한편, 인물들이 입은 회청색 계열의 작업복은 미래의 노동자들이 입을 법한 옷을 연상시킨다. 각기 다른 성격과 직업을 지닌 인물들이지만, 비슷한 형태의 의상은 이들을 하나의 체계에 속한 구성원처럼 보이게 한다. 개인의 개성보다 주어진 역할이 먼저 드러나는 모습은 자유보다 효율을 우선하는 지하도시의 성격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이러한 도시의 질서는 공연 중간중간 등장하는 선전 광고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장면이 전환되는 틈마다 경쾌한 광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디스플레이에는 도시를 홍보하는 영상이 펼쳐진다. 밝고 명랑한 목소리는 이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를 반복해서 노래하지만, 이런 낙관적인 분위기는 인물들이 겪는 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 도시가 스스로의 완벽함을 강조할수록, 그 이면에 자리한 부조리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시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의 손을 잡고 누구를 구할지만큼은 결국 인물들 스스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끼처럼 살아간다는 것


       

       

       

      지하도시는 경쾌한 광고 음악으로 이곳이 얼마나 완벽한지를 끊임없이 노래하지만 관객이 목격한 현실은 전혀 달랐다. 반면 인물들이 부르는 넘버 「이끼숲」은 완벽한 세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완전한 현실에서도 끝내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노래한다. 이들이 거듭 외치는 '살자'는 도시의 질서에 순응해 생존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럼에도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가까워 보인다.


      원작을 집필한 천선란 작가는 '구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죽음마저 숫자로 집계되는 세상에서 인물들은 서로를 향해 손을 뻗는다. 정해진 길이 없다면 직접 길을 만들고, 홀로 나아갈 수 없다면 서로에게 의지한다. 이들이 서로를 구하는 방식은 세상의 질서를 단번에 뒤엎는 일이 아니라, 이끼처럼 끈질기게 곁을 지키는 일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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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이끼숲' 공연 사진 (제공 ㈜라이브커넥션)

       

       

      살아가는 데 특별히 고귀한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바위틈에서도, 버려진 구석에서도, 심지어 멸망한 도시에서도 삶은 이어진다. 구질구질해도 좋고 남들처럼 근사하게 피어나지 못해도 괜찮다. 인물들이 노래하듯, 크게 빛나지 않아도 온 세상을 덮는 이끼처럼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들이 바라는 숲에 끝내 닿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동안 서로가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고,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만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테다. 그렇게 불확실한 내일 앞에서도 서로의 곁을 지키려는 친구들의 여정을 그린 창작 뮤지컬 <이끼숲>은 오는 12월 13일까지 백암아트홀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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