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 붕괴된 후 지상에서 쫓겨난 인류가 향한 곳은 땅속 깊은 곳에 자리한 지하도시였다. 이미 한 차례 멸망을 겪은 인간들에게 생존은 무엇보다 절박한 문제였고,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질서에 순응해야 했다. 모든 것이 정해진 세계에서 개인의 감정과 선택은 좀처럼 존중받지 못했지만, 그런 곳에서도 인간다운 우정과 사랑은 피어났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잃어버리고, 끝끝내 기억하려는 마음은 견고해 보이던 도시의 질서에 조금씩 균열을 낸다.
천선란 작가가 2023년 발표한 『이끼숲』은 「바다눈」, 「우주늪」, 「이끼숲」 세 편으로 이루어진 SF 연작소설이다. 멸망 이후 지하도시에 정착한 인류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랑과 상실을 경험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끝끝내 '슬픔이 유별나도 되는 곳'으로 향하는 이들의 여정을 따라가며, 절망 속에서도 어찌 되었든 살아가려는 마음의 힘을 이야기한다.

라이브커넥션의 창작 뮤지컬 <이끼숲>은 천선란 작가의 동명 소설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언젠가 지상으로 올라가 진짜 숲과 별을 보자고 약속했던 친구들은 도시가 정해 놓은 규칙과 자신들이 나눈 약속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을 마주한다. 원작에 담긴 상실과 연대의 이야기를 노래와 움직임, 무대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뮤지컬 <이끼숲>은 지난 10월 1일 백암아트홀에서 개막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원작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무대 위에 구현한 방식이다. 차갑고 거친 파이프 구조물과 무대에 설치된 디스플레이는 철저한 계획 아래 운영되는 지하도시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 조명과 무대 연출이 더해져 인물들이 살아가는 공간의 폐쇄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 안을 지배하는 통제의 질서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소설 속 세계를 뮤지컬로 재구성한 창작진도 주목할 만하다. 뮤지컬 <모리스>, <전설의 리틀 농구단>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박해림 작가가 극본과 작사를 맡았으며, 뮤지컬 <매드해터>, <마하고니> 등의 리카C 작곡가는 록 사운드부터 서정적인 선율까지, 서로 다른 분위기의 넘버로 이야기에 힘을 더한다. 여기에 뮤지컬 <이터니티>, <매드해터> 등에 참여한 오루피나 연출이 합류해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사건과 그에 따른 감정의 변화를 무대 위에 풀어낸다.

뮤지컬 '이끼숲' 공연 사진 (제공 ㈜라이브커넥션)
작품의 세계를 다채롭게 채우는 것은 저마다 다른 믿음과 목표를 지닌 인물들, 그리고 이들을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이다.
인공 별을 올려다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클론연구소 경비원 '마르코' 역은 송유택·현석준·홍승안이 맡는다. 도시의 모든 소리를 듣는 도시감청팀 소속 '소마' 역으로는 강연정·강혜인·전혜주가 무대에 오르며, 지상에 진짜 숲이 존재한다고 믿는 개발건설팀 소속 '유오' 역은 정욱진·이주순·이한솔이 연기한다. 원칙과 계획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믿는 도시계획팀 '의주' 역에는 정다예·이혜진·오유민이 캐스팅됐으며, 마르코의 동료이자 깊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은희' 역으로는 김청아·한비·윤지우가 관객과 만난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문제와 부딪히며 살아가는 인물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결국 함께 나누었던 약속이다. 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된 지하도시에서 이들은 자신이 믿어 온 질서와 지켜야 할 약속 사이에서 갈등하고, 때로는 서로를 구하기 위해 정해진 규칙에 맞선다.
그러나 이들이 지키려는 것은 단순히 지상의 숲과 별을 보겠다는 약속만이 아니다. 그 약속에는 소중한 사람과의 기억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삶을 결정하려는 마음도 담겨 있다. 그런 마음조차 자유롭게 지킬 수 없는 세계에서, 이들은 끝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놓지 않으려 한다.
재난처럼 밀려오는 절망 속에서도 사랑과 살아갈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인물들의 여정을 그린 창작 뮤지컬 <이끼숲>은 오는 12월 13일까지 백암아트홀에서 공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