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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연극 <마우스피스>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 사회가 주목하는 목소리는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 선별되었거나 누군가의 입을 통해 발화된 목소리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작가는 이 '대변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작가는 세상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는 사람이다. "궁핍한 세대를 위한 대변인, 길을 잃은 이들과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목소리!" 그런데 잠깐. 정말 그런가? 삼연을 맞이한 연극열전의 <마우스피스>(키이란 헐리 작, 부새롬 연출, 예스24아트원 2관, 2026.04.04.~06.21.)는 작가가 수행해 온 그 대변자라는 역할에 물음표를 던진다. 진정 당신은 그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가? 과연 그게 옳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목소리를 위한 목소리
ⓒ연극열전
자막: 에든버러, 솔즈베리 언덕, 해 질 무렵
극작가로 오랜 시간 실패를 반복해 온 '리비'는 솔즈베리 언덕에 위태로이 서 있다. 예술과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리비는 한때 차세대 예술가로 불렸다. 그들은 리비의 재능을 멋대로 부풀렸다. 네가 바로 우리가 찾아 헤맸던 그 목소리야. 섹시하고 새로운, 세상을 읽어내는 '급진적인 목소리!' 하지만 세상이 원하는 건 딱 그 정도다. 팔릴 만하고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정도, 그 이상은 아니다. 리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논리 위에서 적당한 선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실패한다. 그렇게 누구의 인생도 바꾸지 못한 리비는 자신의 뒤로 반짝이는 재능을 가진 신진 작가들이 줄지어 서 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그제야 리비는 자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깨닫는다. 내내 부유하듯 살아온 인생에 회의감을 느낀 리비에게는 이제 '안정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다. 아찔한 절벽 끝에 선 리비는 죽음을 떠올린다. 고통스럽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끝'이 있다는 사실이다. 리비가 까마득한 어둠 속에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데클란'이 리비를 붙잡는다.
ⓒ연극열전
데클란은 폭력적인 새아버지 '게리'와 무관심한 엄마, 그리고 자신이 끔찍하게 아끼는 동생 '시안'과 함께 살아가는 소년이다. 사랑을 받은 적 없어 표현할 줄도 모르는 데클란은 자신을 괴롭히는 끔찍한 생각들과, 그 생각이 언젠가는 자신을 잡아먹으리라는 불안감 속에 하루하루를 견딘다. 그런 데클란에게 있어 유일한 위안은 '그림'이다. 시안을 돌보느라 수업을 너무 많이 빼먹은 데클란은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난 뒤 한 지역 센터에 다니게 되었고, 거기서 누군가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유한 게 첫 시작이었다. 이후 데클란은 솔즈베리 언덕에 올라 그림을 그리며 억눌린 감정을 마구 배출한다. 이제 그 센터마저 문을 닫아버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만한 곳이 어디에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장면은 이야기의 시작이고, 그래서 더없이 중요하다.
이상적인 첫 장면은 세계 전체를 제시해야 한다.
리비의 첫 대사다. 작가라는 위치에 선 리비의 대사에는 예언적인 힘이 있다. 솔즈베리 언덕으로 도망친 데클란과 그곳에서 삶을 포기하려던 리비가 만나는 첫 장면은 이 대사를 그대로 재현한다. 폭력에 노출된 소년과 실패한 극작가라는 세계 전체를 제시하는 것이다. 데클란의 그림을 보고 그의 예술성을 단번에 알아본 리비는 "네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리비는 이제 데클란의 이야기를 통해 옳은 일을 해 보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은 바로 데클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이었다.
엄청나게 큰 또라이 같은 입
리비는 데클란의 삶을 토대로 극을 쓴다. 극중극이라고 볼 수 있는 리비의 극 제목과 실제 이 연극의 제목인 <마우스피스>는 데클란의 작품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데클란의 그림에는 커다란 입이 그려져 있는데,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건 "엄청나게 큰 또라이 같은 입"이다. 폭력과 무관심 속에 방치된 데클란은 스스로를 구원할 방법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소년이다. 그저 하루를 살아내기 바쁜 데클란은 자신의 이야기를 내뱉는 대신 이 그림 속 입을 통해 소리친다. 세상 전부를 막 다 뿜어내는 것 같은 입, 그 혼란과 광기와 폭력을 담은 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두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연극열전
리비는 데클란의 '입'이 되어주고자 한다. 그건 데클란을 대신해 이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것, 그러니까 자신이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인 '이야기'를 통해 대변하는 일이다. <마우스피스>는 '목소리'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연결돼 있다. 이처럼 극의 제목과 극중극의 제목, 나아가 데클란의 그림 제목이 모두 '마우스피스'라는 일관된 언어로 얽히고설킨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마우스피스>라는 제목은 '마우스(Mouth)'와 '피스(Piece)'라는 두 단어의 결합으로도 읽힌다. '작품(Piece)'을 통해 누군가의 '입(Mouth)'을 대변하는 사람의 이야기. 이러한 해석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작품의 위기-절정부에 해당하는 리비와 데클란의 치열한 대립 장면 때문이다.
나한테 이야기 같은 거 없어요
리비는 데클란의 삶을 극으로 재현한다. 그리고 데클란은 리비가 쓴 <마우스피스>의 결말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리비가 데클란의 트라우마를 극적 장치로 이용하며 멋대로 결말을 맺었기 때문이다. 리비는 자신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설명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너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했어.
훌륭한 마지막 장면은
주제를 풀어낼 필요가 있어.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이런 게 필요해. 이 메시지가-
하지만 데클란은 이딴 '신념'보다 당장의 삶이 더 시급한 인물이다. 이야기든 메시지든 무엇이든 간에 내 삶은 그따위로 숭고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냥 사는 거니까. 분노를 표출한 데클란은 이 프로젝트에 작별 인사나 하라고 소리친다.
그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한테도
자기 목소리라는 게 있고
그 사람들도 직접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니까 좀 다르지!
ⓒ연극열전
하지만 리비는 이제 이 이야기는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리비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각색하고 데클란의 동의 없이 극을 올린다. 자신의 이야기를 빼앗긴 데클란은 무력한 모습으로 <마우스피스>를 관람한다. 바로 이때 객석에 조명이 들어오고, 리비와 데클란 역의 배우가 실제 객석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A열 끝과 끝에 앉은 리비와 데클란은 관객의 영역에까지 침투하며 제4의 벽을 부순다. 이때 관객은 '보는 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자신을 선명하게 감각한다.
리비는 소외된 자의 이야기를 대변하고자 했으나, 실제로 '소외된' 데클란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관객 역시 무대 위 <마우스피스>라는 작품을 보며 데클란과 함께 분노하고 그를 연민하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는 박수를 보내고 극장을 나서며 감상을 나눈 뒤 집으로 향한다. '그다음'의 부재, 즉 소외된 자에 대한 감상만 남아버리는 현실을 이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연출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며 의미망을 확장한다. 두 배우가 앉아 있는 객석의 한 일원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감한 관객은 자신이 극중극 <마우스피스> 내의 관객 역할로 동원된 사실을 직시한다.
ⓒ연극열전
그리고 이 '관객과의 대화' 장면은 카타르시스를 준다. 리비의 말을 빌리자면 이야기에는 여러 법칙이 존재한다. 가령 비극은 반드시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것. 연민은 주인공에게 과도한 고통이 주어질 때 느끼는 안타까움이고, 공포는 그 주인공이 나와 다르지 않은 존재이며 그가 겪는 고통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느낄 때 겪는 두려움이다. 그 연민과 공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극을 감상한 관객은 결국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자신의 감정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막이 내려가는 순간 자신은 이 무대 밖의 '안전지대'에 존재함을 자각한다. 연극 <마우스피스>는 바로 이 비극의 카타르시스가 주는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데클란의 비극은 관객에게 안타까움과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끝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겪는 감정의 정화까지도. 하지만 객석에서 일어난 후에도, 이야기는 끝났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는 게 있다. 때문에 데클란은 끝까지 목놓아 외친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고, 너저분하다 해도 그게 진짜라고.
나의 일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연극 <마우스피스>는 작가와 당사자, 그리고 관객에 대한 이야기다. 한편으로는 이 작품에 이야기라는 말을 써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야기'라는 단어 하나에 포섭될 수 없는 삶도 존재한다는 걸 이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공연장이라는 하나의 '공감 기계' 안에 모인 작가-당사자-관객이라는 삼각구도를 예리하게 포착한 이 작품은 각각의 역할이 가진 맹점을 드러내며 정말 이래도 괜찮겠냐는 질문을 건넨다. 전체적으로 낮은 채도의 나무 질감을 사용하며 건조한 느낌을 주는 무대를 보고 있노라면, 아직 무대화되기 전의 대본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이내 무대는 두 배우와 관객들로 완전히 채워진다. 연출은 무대 위에 직접 자막을 타이핑하며 '극'이라는 장르가 가진 성질을 다방면으로 활용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작품은 미처 생각지 못한 깨달음을 주며 나의 세계관을 확장한다. 보지 않았더라면 평생 놓치고 살았을 관점들. 문제를 먼저 인식한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 의문을 제시하며 세상을 더 나은 쪽으로 밀어 올린다. 하지만 때로는 작가의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작용할 때가 있다. 실제 삶에 대한 각색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당사자'가 명백히 존재하는 일에 대해서는 또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연극 <마우스피스>는 창작에 동반되는 이러한 윤리 의식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힌다.
그러나 끝내 정답을 알려주는 작품은 아니다. 결말에 이르러 리비와 데클란이 번갈아 발화하는 장면을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이 흐려진다. 이분법적으로 판단 내릴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온점보다는 물음표를 찍으며 막을 내리는 것이다. 그다음에 일어날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조명이 어두워지고 음악이 꺼지는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을 삶에 대해 계속 중얼거려 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든 진짜 결말 같은 것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