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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상자 속의 양 - 보이지 않으니까, 상상하는 만큼 존재하는 것.

상자를 열고 현실을 향해 나아가는 일

by 전주현 에디터
2026.08.1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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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0일 개봉한 영화 <상자 속의 양>이 각본집으로 출간되었다. 휴머노이드에 대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만의 철학적 고뇌가 담긴 작품으로, 컬러 화보와 콘티, 캐릭터 노트, 제작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작품은 큰 사건이나 서스펜스적인 요소 없이도, 휴머노이드와 인간의 거리감을 묘사하는 것만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휴머노이드와의 동거'라는 소재는 여타 SF 장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공상과학 장르로서의 상상력은 진부했으나,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낸 부부의 애도에 중점을 둔다면 신선한 작품이었다.


동화 <어린 왕자>의 한 장면에서 영감을 얻은 제목 <상자 속의 양>. 동화 속 어린 왕자는 파일럿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말한다. 파일럿이 어떤 양을 그려줘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자, 파일럿은 귀찮은 마음에 상자를 그려버린다. 그것은 단순한 상자가 아닌, 상자 속에 담긴 양의 그림이었다. 중요한 건 대상을 바라보는 마음임을 일깨우는 장면이다.


오토네와 켄스케는 아들 '카케루'를 사고로 잃는다. 실의에 빠진 오토네는 남편 켄스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복제한 휴머노이드를 들여온다. 생김새와 말투가 죽은 아들과 똑같은 휴머노이드 카케루. 아직은 휴머노이드와 인간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상이 아니기에, 주변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오토네는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카케루를 살아있는 아이처럼 대한다. 그렇지만 카케루는 역시 로봇이었기에 사람과 다른 점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대신에 상자에 들어가 충전한다. 파란색 불빛이 반짝인다. 그 모습이 마치 상자 속에 담긴 양 같기도 하다.


오토네:  상자보다는 차에 태워서 받는 게 낫겠지?


켄스케:  응.... (아직 납득하고 있지는 않다.)

(안에서 카케루의 새 옷이 엄청나게 나온다. 그것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오토네. 아이가 죽은 뒤, 오토네가 혼자서 계속 사고 있었던 것 같 다. 그것을 늘어놓는 오토네. )


오토네:  7세, 8세...9세용 옷은 좀 크겠지?

(켄스케는 아직 동영상을 보고 있다.)

 

휴머노이드 카케루를 맞이하기 전, 옷을 정리하는 오토네의 모습이다. 그녀는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옷을 계속해서 사고 있었다. 슬픔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일상 속 한 장면을 통해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씬이 인상적이었다. 오토네가 왜 아들을 복제할 수밖에 없었는지, 선택의 의도를 이해시키는 장면으로 다가왔다.


평화로운 어느 날, 오토네의 엄마 노부요와 여동생 아리스가 갑자기 찾아온다. 예고없는 방문에 떨떠름해하는 오토네를 두고, 노부요는 아무렇지 않게 냉장고를 뒤적이며 집안을 돌아다닌다. 그러다 카케루와 마주친다. 죽은 줄 알았던 손주가 버젓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곤 깜짝 놀라는 노부요. 이내 손주의 환생이 아닌 휴머노이드라는 사실을 알고 오토네를 나무란다.


노부요:  뭔 생각으로 저런 걸....

 

오토네:  (평온한 척을 하며) 지금 전국에 3천 명이나 있대.


노부요:  아직 젊은데 한 명 더 만들면 되지.


노부요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데려오냐며 카케루를 물건 취급한다. 전국에 휴머노이드가 3천 명이 있든 말든, 자기 딸이 휴머노이드를 데리고 사는 모습이 마치 애물단지를 껴안은 것만 같아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토네는 아직 젊으니, 아이를 또 낳으면 된다는 엄마의 말이 영 불편하기만 하다. 밖에서 아리스의 아이들과 물놀이하는 카케루. 오토네는 카케루에게 젖으면 안 된다고 얘기한다. 그 말이 마치 '고장 나면 안 된다'는 경고처럼 읽혔다. 불편한 기류가 이어진다. 오토네는 어릴 적엔 자신을 버려놓고 이제 와서 집을 찾아오는 노부요가 원망스럽고, 용서할 수 없다. 몸이 힘드니 하룻밤 자고 가겠다고 말하는 노부요를 두고 오토네가 난감해하자, 카케루가 말한다.


카케루:  엄마는 당신이 자고 가는 걸 원하지 않아요.

(...)

노부요:  인간은 생각하는 걸 다 말하지 않아.


카케루는 7살 아이라기엔 어른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했다. 마치 아이의 외양을 가진 어른처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휴머노이드와 인간의 차이점이 눈에 띈다. 오토네는 자신의 속내를 전부 들여다보는 듯한 카케루가 왜인지 찝찝하다. 한편, 켄스케는 카케루를 데리고 아들이 사라졌던 지하철역으로 간다. 그러곤 카케루에게 '범인이 누구였는지 잘 기억해 보라'고 말한다. 어쩌면 죽은 아들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니, 아들이 마지막에 보았던 장면도 그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미약한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이는 모두 켄스케의 헛된 희망이자 욕심일 뿐이었다. 아들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아들을 죽인 살인마가 있다고 믿어온 것이다. 오토네 또한 노부요를 탓하면서, 노부요가 자신의 시간을 뺏은 탓에 카케루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 다 휴머노이드 카케루를 이용하고 있었다. 카케루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있어도, 카케루를 여전히 죽은 존재로 바라본다는 점은 같았다.


카케루는 불안한 두 사람 밑에서 점차 자신만의 자유를 찾고 싶어 한다. 동네의 휴머노이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몸속에 들어있는 GPS 추적기를 제거한다. 나아가 오토네와 켄스케의 품을 벗어나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집을 짓기로 결심한다. GPS 추적기로부터 분류되고 자신과 똑같은 휴머노이드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서, 카케루는 신체를 되찾은 기분을 느낀다. 마치 진정한 인간이 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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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영혼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과연 인간이라 불릴 수 있을까? AI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신체성'의 유무라고 생각한다. AI 담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모라벡의 역설'이 앞선 주장을 뒷받침한다. 사람한테는 쉬운 감각, 운동, 지각 능력이 기계가 수행하기엔 어려운 과제이고 추론, 계산은 기계에게는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이 모라벡의 역설이다. 우리는 위험한 순간을 육감으로 알아차리기도 하고, 슬플 땐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해소한다. 신체는 살아남기 위한 판단의 과정을 매 순간 반복하고 있다. 음식을 먹지도,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고 데이터로만 움직이는 휴머노이드를, 과연 사람이라 칭할 수 있을까.


카케루는 위치 추적기를 떼어내고, 새로운 가족을 찾아 떠난다.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짓는 건, 더 이상 죽은 아이의 환생이나 그늘로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카케루는 자신의 신체적 자유라도 되찾아 자기만의 삶을 설계하고 싶어했다. 오토네와 켄스케는 휴머노이드 카케루를 보내주기로 결심한다. 아이의 빈자리를 온전히 메꾸기에 기술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부드럽고 온기가 느껴지는, 반찬 투정을 하는 아이를 대체할 수 있는 건 휴머노이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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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속에는 무엇이든 들어있다. 보이지 않으니까, 상상하는 만큼 존재할 수 있는 거다. 오토네와 켄스케가 그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건 아들 카케루가 죽었다는 사실과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다. 휴머노이드 카케루와의 만남과 작별은, 애써 눌러두었던 상자의 뚜껑을 여는 행위였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무한으로 재생되는 존재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카케루 또한 상자에서 벗어나면서, 더는 누군가를 위한 존재로 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이유를 상자 속에서만 쫓던 카케루가, 이젠 새로운 가족을 만나 현재를 살아갈 차례이다. 카케루, 자기 자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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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자 속의 양> 영화를 감상하지 않고 각본집만 읽었다. 영상 매체에 익숙해져서 드라마, 영화를 통해서만 스토리를 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눈에 직관적으로 들어오는 영상도 좋지만, 나만의 속도로 사유하며 읽을 수 있는 활자가 더욱더 좋은 것 같다. 특히나 <상자 속의 양> 같이 인문학적인 고찰이 필요한 작품일수록 문장으로 만나 천천히 사유하는 매력이 크다. 더구나 외국 영화를 볼 땐 자막을 읽느라 장면의 이미지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조금이라도 철학적이거나 은유적인 작품은 한 번 봐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각본집을 읽는다는 건 장면을 직접 상상하면서 캐릭터를 더욱더 깊이 있게 파고드는 과정 같다. 본 리뷰에서 다루진 못했지만, 나무에 대한 이야기와 이를 둘러싼 좋은 대사가 많았다. 캐릭터 설정, 작가 노트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기가 막힌 공상과학적 상상력을 바라는 이에게 쉽사리 추천하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잔잔한 가족 서사와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을 기대하는 이들에겐 필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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